-
첫사랑이 죽는 날까지 식지 않는다면 행복할까. 한날 한시에 사랑하는 사람과 숨을 거둔다면 더 행복할까. 일견 지고지순해 보이는 이런 낭만적 연애관은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근대의 발명품이지만 이제는 조금 낡아 보이고, 자칫 끔찍해 보이기까지 한다. 거꾸로 보면 오직 한 사람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숨막히는 발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로는 이런 신파적 사랑 이야기가 벙어리 장갑과 털모자 노릇을 할 때도 있다. 치매 걸린 할머니의 순애보쯤으로 요약될 <노트북>엔 직접 손으로 짠 벙어리 장갑의 따스한 분위기가 흐른다. 나이 든 세대와 젊은 세대의 사랑을 엮어나가는 뜨개질 솜씨 덕분이다. 누군가 손으로 공책에 써서 수십년 간직해온 이야기는 낡았을지는 몰라도 진실되다.
갈대가 흔들리는 노을진 강가를 누군가가 혼자 노를 저어가는 인상적인 도입부가 끝나면 병원 자원봉사자로 보이는 한 할아버지가 등장해 치매 걸린 할머니를 위해 이야기를 들려준다. 기껏해야 한 시간에 40센트를 버는 벌
치매 걸린 할머니의 순애보, <노트북>
-
비무장지대는 사실은 완전 중무장지대다. 남북한의 총구가 바늘 한뼘의 공간에 모두 집중된 곳. 한쪽에서 총탄을 날리기 직전까지만 그곳은 한시적으로 ‘비무장’이다. <DMZ, 비무장지대>는 남북한의 대치 상황처럼 두 갈래의 스토리로 나뉜다. 전반부는 수색대라는 한계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되는 신참 지훈과 고참 민기의 ‘아버지·아들’ 관계와 그들이 자신의 해방구인 ‘호텔 코코넛’을 꾸려가는 병영담이다. 후반부는 영화의 주제가 본격화되고 남과 북의 군인들이 자아내는 대립과 만남 그리고 그 결과인 비극을 그리고 있다.
영화학도 지훈(김정훈)은 부대 안에서 과감히 야한 영화를 상영하다가 보안대 일당에게 봉변을 당한다. 이때 구세주처럼 나타난 수색대 고참인 이민기(박건영) 병장. 그를 ‘아버지’ 삼아 보직을 수색대로 바꾼 지훈은 초소이며 자신들만의 아지트 ‘호텔 코코넛’에서 고참 권해룡(정은표)과 함께 세 사람만의 새로운 군생활을 시작한다. 긴장된 근무 상황을 제외하면 휴양지의
남과 북의 청춘들이 겪는 딜레마,
-
귤도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되어주는 게 예의다. 비욘세의 <Crazy in Love>를 깔아놓고 <택시 더 맥시멈>은 이것이 미국영화임을 외치면서 시작한다. 그도 그럴 것이 <택시 더 맥시멈>은 화제의 프랑스 액션영화였던 <택시> 시리즈를 폭스사가 리메이크한 영화. 뉴욕으로 건너가면서 원작의 남자들은 <택시 더 맥시멈>에서 여자주인공으로 성전환했고, 원작보다 더욱 익살맞아졌다.
‘조금 삭았던’ <택시>의 주인공 다니엘 역은 이제 볼륨 넘치는 몸매의 벨(퀸 라피타)에게 넘어간다. 벨은 카레이서를 꿈꾸는 스피드광. ‘머큐리 퀵서비스’의 1등 사원이었던 그녀는 새끈한 택시 한대를 뽑아 거리로 나선다. 그러나 어쩌다 사고뭉치 형사 와쉬번(지미 펄론)을 만나 은행 강도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이 과정에서 스크린을 수놓는 오토바이의 질주와 택시의 짜릿한 속도감은 <택시> 시리즈의 그것을 그대로 빼닮았다. 불법개조해 성
<택시> 시리즈의 짜깁기 축약본, <택시 더 맥시멈>
-
<신암행어사>는 시대물이 아닌 하드보일드한 형사물이다. 주인공 문수가 주어진 미스터리를 하나씩 풀어나가는 방식의 이야기구조는 감독 시무라 조지의 전작 <마스터 키튼>을 답습한다. 배경을 인물과 분리하고 캐릭터의 세부에 정성을 기울이는 극화 방향도 이러한 내러티브의 구조와 연결된다. 스토리의 배경인 춘향전, 박문수, 유의태 등의 역사적 장치들은 이야기 진행을 위한 의사(擬似)- 역사적 장치로 축소된다. 주인공 문수가 “기적 따위는 세상에 없다”고 되뇌이는 모습은 <무사 쥬베이>에서 그저 주어진 미션에 충실히 임해가던 ‘쿨가이’ 닌자 기바카미 쥬베이와 닮았다. 두 인물에게 존재론적, 사회적, 역사적 정체성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자신과 적으로 남겨진 세상뿐이다. 시공간적 배경은 축소되는 차원을 넘어 소거되고 역사성은 탈각된다.
문수는 망해버린 쥬신국의 홀로 남은 암행어사다. 사막을 건너던 그는 암행어사가 되기 위한 과거에
한·일 합작 극장애니메이션 1호 하드보일드 형사물, <신암행어사>
-
-
인생은 무엇일까? 인간은 왜 고통받아야 하는 것일까? 구원의 길은 없는가? 어떻게든 이 부류의 고뇌가 찾아오면(발단) 대개는 서사의 산을 오른다(전개). 그리고 그곳에서 갖은 통과의례와 시험을 거치고(위기) 마침내 깨달음이라는 안개 뒤 산정에 올라 대답을 쟁취한다(절정). 그리고 정확히 있었던 그 지점으로 하산하는 것이다(결말). 외관상 전혀 변하지 않았지만 실은 모든 것이 죽고 다시 태어난 상태. 이를 일컫는 수많은 이름, 성장, 구원, 해탈, 게슈탈트 변환, 패러다임 시프트 등등. 따지고 보면 영화를 포함해 모든 이야기는 이 소멸과 생성에 관한 종교적 에픽이다. 다만 장르영화의 경우 주인공이 겪어내야 할 이 변화와 성장의 과정을 모두 일정한 도식에 밀어넣고 구조화한다는 점이 있을 뿐이다. 내러티브 자체의 종교성은 어쩌면 모든 시간예술의 숙명인지 모른다.
그러나 깨달음 그 자체에 대한, 구원 그 자체에 대한, 믿음 그 자체가 고뇌가 되는 영화는 이 일정한 도식을 사용할 수 없다.
종교적 깨달음에 대한 영화적 명상, <삼사라>
-
<클린>은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첫 번째 국내 개봉작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1996년 작품 <이마베프>를 기억하고 있지만, 그 영화는 한국의 극장에 걸리지 못한 채 비디오로만 출시되었고 비디오 마니아들의 입을 통해서만 떠돌았었다. 말하자면, <클린>은 <카이에 뒤 시네마>의 필자로서 많은 글을 썼고, 잉마르 베리만에 관한 책을 펴냈고, 홍콩 무협영화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있고, 허우샤오시엔을 존경한 나머지 그에 관한 다큐멘터리 <허우샤오시엔의 초상>(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가 얼마나 허우샤오시엔을 따르는지 절로 알게 된다)을 만들어낸 시네필 출신의 감독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심상을 비평적인 측면이 아닌 창작의 측면에서 공식적으로 만나게 되는 첫 번째 영화인 셈이다.
<이마베프>는 비평가로서의 그의 화려한 이력과 공력에 대한 기대감을 충분히 만끽시킬 만한 영화였다. 일견에서 제기되는 영화와 뱀파이어의 존재론적
인물과 음악을 따라가는 갱생의 드라마, <클린>
-
<귀여워>는 두 남자의 모습에서 시작된다. 늘어진 뱃살 아래 팬티 한장만 입고 철거민들을 두드겨패는 깡패와 아이를 점지받으러 온 여인을 낡은 아파트 복도 벽에 세워놓고 손수 씨를 뿌려주는 박수무당. 그리고 사정에 이른 무당의 신음소리와 함께 타이틀이 떠오른다. 귀여워. 누구도 이 남자들을 귀엽다고 생각하지 않겠지만, 이 타이틀을 소리내어 읽어주는 한 여자만은 진심인 듯, 깨물어주고 싶다는 목소리로 “귀여워”라고 말한다. 그 여자 순이 덕분에, 깡패와 박수무당과 다른 두 남자는 정말 귀여운 존재가 되어갈 것이다.
한때 아이 점지에 용하다고 소문났던 무당 장수로(장선우)는 쓰러져가는 아파트에서 배다른 두 아들과 살고 있다. 큰아들 후까시(김석훈)는 <본 투 킬>에서 정우성이 탔던 오토바이 V맥스를 타고 세상이 한점으로 모일 때까지 달려보는 게 소원인 퀵서비스맨이다. 후까시보다 조금 늦게 아버지를 찾아온 탓에 둘째가 된 개코(선우)는 건달기가 농후한 견인차 운전기사
콩가루 집안 배다른 네 부자 이야기, <귀여워>
-
‘히트작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재활용될 뿐이다!’ 십년도 훨씬 지난 영화의 속편을 뜬금없이 제작하질 않나(<더티 댄싱2>) 프레데터와 에일리언을 맞붙여 싸우게 하질 않나, 과거 히트작들을 무리하게 우려먹어야 할 만큼 소재 기근에 시달리는 할리우드의 최근 사정을 물론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렇다곤 해도 제작하는 속편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졸작 신세를 면치 못했던 ‘저주받은 클래식’ <엑소시스트>에까지 다시금 손을 대다니, 얼마간 그 고충이 눈물겨울 지경이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결론1) <엑소시스트: 더 비기닝>(이하 <엑소시스트4>)은 생각보다 끔찍하지만은 않다.
공포영화의 고전이 된 <엑소시스트>가 세기적 악몽이 된 이유는, 사실 180도 목 회전 신공을 보여준 소녀 리건(린다 블레어)의 엽기 충격 쇼 때문이 아니라 선과 악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 믿기 힘든 심령 혈투를 너무나 리얼하게 만든 캐릭터들의 생생한 약동과
저주는 살아 있다, <엑소시스트: 더 비기닝>
-
“난 누구도 사랑한 적 없어. 영혼까지 썩어 있으니….” 여자는 꼼짝달싹 못하게 붙들린 채 이를 갈고 있는 남자에게 속삭인다. “돈이 오기까지 몇 시간 여유가 있어. 어디 가서 좀 놀다올까?” 이 뻔뻔할 정도의 태연함, 너의 쾌락을 즐겨라! 여기, 히치콕의 여주인공이 재탄생한다. <현기증>에서 제임스 스튜어트를 그토록 매혹시켰던, 그리하여 결국 추락사당하는 킴 노박의 옆모습은 우아하게 스카프를 감고 커다란 선글라스로 눈에 든 멍을 감추는, 그러나 결코 살해당하지 않는 옆모습으로 재현된다. “왜 악당들이 잘사는지 알아?”라는 그 여자의 거만한 질문에 다른 답이 있을 수 없다. 그녀는 원하는 대로의 정체성을 덮어쓸 수 있다. 겉모습만 바뀌는 게 아니라 그녀의 기억조차 완전히 조작될 수 있는 것이다. 브라이언 드 팔마가 오래간만에 작심하고 히치콕 스타일로 찍은 스릴러 <팜므파탈>은 순수하게 (히치콕의) 영화적 쾌감을 체현하려는 욕망으로 팽배하다.
컴컴한 호텔 방 안
범죄와 배신의 섹시한 파노라마, <팜므 파탈>
-
웨이언스 형제는 뻔뻔하다. <스크림>을 비롯해 그 무렵 히트한 호러, 스릴러, 액션물을 닥치는 대로 베끼고 비틀고 버무린 ‘잡탕’영화 <무서운 영화>는 무서운 게 아니라 황당하고 어이없게 웃기는 영화였다. 그 속편은 또 어떤가. 유령 나오는 집이 주인공인 <더 헌팅>을 패러디한 <무서운 영화2>는 전편보단 못했어도, ‘막가파 유머’의 소신을 충분히 피력했더랬다. 이번엔 더하다. 맏형 키넌 아이보리는 두 동생 숀과 말론을, 여성으로, 그것도 백인 여성으로 ‘둔갑’시키는 대담함을 보였다. 그들이 여장한 건 차마 못 보겠다고? 그러니까 ‘웃자’는 얘기다.
세트로 사고치는 FBI 요원 케빈(숀 웨이언스)과 마커스(말론 웨이언스)는 퇴출 위기에 몰리고, 납치 위협에 노출된 호텔 재벌가 자매의 경호를 자청하지만, 그들의 귀한 얼굴에 흠집을 내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예정된 자선 파티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버티는 그들을 대신해, 케빈과 마커스는 어마어
인종과 성과 문화에 거침없는 조롱을! <화이트 칙스>
-
그의 과거는 끔찍했다. 그가 끔찍함을 견디는 법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기억의 끈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과거를 근근이 견뎌냈다. 혹은 끔찍함으로부터 도피했다. 과거의 시공간에서 분리된 채 현재에 안착한 그는 문득 잃어버린 과거가 궁금해진다. 그러나 호기심이 생기는 순간 기억은 복원되고 불행은 시작된다. 뒤늦게 과거의 진실을 대면하려는 자에 대한 현실의 때늦은 단죄일까, 그 끔찍한 과거의 기억을 타자에게 떠넘기고 홀로 현재로 도피했던 자신에 대한 처벌일까.
상처로 가득한 어린 시절의 에반(애시튼 커처)은 종종 기억을 잃는다.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그는 매순간 자신의 기억을 일기로 기록한다. 상황이 점점 악화되자, 그는 상처 입은 어린 시절을 함께 나누던 친구들을 떠나 모범적인 대학생으로 자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예전의 일기장을 들춰보다가 우연히 과거의 기억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 기억과의 대면에 괴로워하던 그는 불행한 과거를 지우고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내는 법을 발견하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의 거대함, <나비효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