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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쏟아지는 비의 시선에서 시작된다. 수직에 가까운 부감이 비와 평행을 이루며 마당을 내려다본다. 의자들이 어지러이 널려 있고 탁자 위에는 고운 꽃들이 흐트러져 있다. 파티가 열린 뒤끝의 정취다. 그 위로 벌들의 짝짓기, 좀더 정확히는 여왕벌의 짝짓기에 대한 내레이션이 비처럼 뿌려진다. 숫놈들이 떼를 지어 날고 있는 무더기 속으로 여왕벌이 다가가 하나를 선택한다는. 파티는 끝난 게 아니었다. 결혼식은 갑자기 퍼붓는 비 때문에 실내로 자리를 옮겨 계속되는 듯하다. 신부의 아버지인 스피로(마르첼로 마스트로이안니)는 사진 촬영을 재촉하는 말에 마지못해 딸의 뒤쪽에 서지만 고개를 반쯤 떨군 채 셔터 소리를 듣는다. 스피로에게서 한발 떨어져 선 아내의 표정도 못내 불안하다. 화사한 축복으로 가득 차야 할 결혼식이 싸늘하게 쏟아지는 비와 불안정하게 떨리는 인물들로 메워져 있는 게 빛나는 햇빛과 곱디고운 지중해를 가진 그리스를 자욱한 안개와 추적추적한 비, 짙은 회색의 인물로 채색한 앙겔로풀
꿀벌과 함께 오른 스산한 여행길, <비키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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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방의 총탄은 트렁크 바깥에서 안으로 뚫고 들어온 것이 아니라 안에서 바깥으로 뚫고 나간 것이다. 첫 장면은 그렇게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사전정보를 갖지 못한, 혹은 후반부를 목격하지 않은 어느 누가 이 순간 총탄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을까. 이 첫 장면은 <주홍글씨>가 다룰 내용에 대한 요약이다. 김영하의 단편소설 <사진관 살인 사건> <거울에 대한 명상>을 원작으로 한 변혁의 두 번째 장편영화 <주홍글씨>는 바로 그 보이는 사실과 숨겨진 진실의 경합에 대해 진술하고 있으며, 엇갈린 애정의 총탄이 어디로 날아가 어떻게 박히는지 그 탄착지를 추적해가고 있다.
살인 사건 현장에 도착한 강력반 반장 기훈(한석규)은 사진관 여주인 경희(성현아)를 만난다. 그녀는 유력한 살인 용의자다. 기훈은 보험금을 노린 사진관 여주인 경희가 그녀의 정부와 짜고 남편을 죽였다고 짐작하지만, 증거를 잡지 못한다. 게다가 점차 그녀는 묘한 성적 매력까지 풍기며
끝없는 욕망의 원죄, <주홍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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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위강이 감독한 <무간도>는 홍콩누아르 부활의 신호탄이며 폭발했던 홍콩영화 전성기에 대한 쓸쓸한 회고록이다. 일대기를 그려내는 교차편집에 의한 시간 구성과 ‘역지사지’를 통한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표하는 방법론은 미래를 꿈꾸기보다는 과거를 거슬러오르는 ‘퇴행’의 몸짓이다. 퇴행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회고는 비장하고 아름답다. <강호>는 <무간도>의 이형동질이다. 현란한 카메라워크와 빈번한 고속촬영 사용을 통한 화려한 화면구성에서부터 ‘내부의 적’(<무간도>의 영어제목인 ‘지옥의 사건’(Infernal affairs)은 ‘내사과’(Internal affairs)의 의도적인 언어유희로 보인다)이라는 캐릭터 설정까지 <강호>는 <무간도>의 오솔길을 고스란히 밟아나간다. <무간도>의 주요 배우를 대거 영입한 출연진과 제작진도 그러한 심증을 더욱 짙게 만든다.
삼합회 두목인 홍(유덕화)과 부두목 레프티(장학우)는 오
불혹이 되어 재회한 <열혈남아>의 두 남자, <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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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베이 공항. 남편, 딸과의 여행에서 돌아온 40대의 릴리(장애가), 비행을 마친 30대의 스튜어디스 시엥(르네 리우), 말레이시아에서 온 20대의 가수지망생 샤오지에(리신제). 각자의 여정을 마치고 ‘도착’한 그 공항에서 시작된 영화는 일상으로 돌아가려던 그녀들 앞에 낯선 삶을 던져놓는다. 남편의 외도를 확인한 릴리는 이혼 뒤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고, 여러 연인들의 관계를 불만족스럽게 여기던 시엥은 갑작스럽게 겪은 지진으로 외로움과 무기력감에 빠져든다. 샤오지에는 함께 가수데뷔를 준비하는 통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그녀에게 친구 이상의 감정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한다. <20 30 40>은 새로운 일상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야 할 ‘도착’이 결론적으로 ‘연착’이 되고 ‘불시착’이 되어버린 세 여성의 삶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각각 일상의 위기를 맞게 되는 세 여자들은 나름대로 잃어버린 일상을 복구하기 위한 시도를 펼치지만 역시 삶은 만만치 않다. 그녀들의 어설픈 시도
잃어버린 일상을 복구하기 위한 세 여성의 시도, <20 30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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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한숨처럼 가벼운 것일지도 모르는 영혼, 이것을 천근의 납덩이처럼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두 번째 장편영화 <21그램>의 세 인물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교통사고로 남편과 딸을 잃은 여인 크리스티나(나오미 왓츠), 그녀의 가족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전과자 잭(베니치오 델 토로), 그리고 크리스티나 남편의 심장을 이식받아 가까스로 생명을 잇게 된 폴(숀 펜)에게 있어서 삶은 그저 무심히 계속되면서 지옥도를 펼쳐 보일 뿐인 악몽에 지나지 않는다. 복수, 죄의식, 그리고 운명이라고 하는 낡고 오래된 테마는 이들의 주변을 맴돌면서 점점 형체를 갖추고 육중해지는데, 그러한 테마를 탁월한 솜씨로 설득력 있게 빚어내는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연출력은 고작 두편의 장편영화를 만들었을 뿐인 신인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미스틱 리버>(2003)의 그것보다는 반쯤 잦아든 듯한 연기를 보여주는 숀 펜, 점점 두터워지는 죄
조각난 시간의 파편들 틈으로 솟아오르는 삶, <21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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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들은 6개월 뒤 다시 만나지 않았다. 이것이 9년을 끌어온 수수께끼의 답이다. 연락처도 성도 모른 채 헤어진 셀린느(줄리 델피)와 제시(에단 호크)의 9년 뒤를 그리는 <비포 선셋>은, 로맨티스트와 현실주의자를 고루 만족시켰던 <비포 선라이즈>의 열린 결말을 비로소 닫아건다. 그러나 우리는 정말 진실을 알고 싶었을까? 속편을 통한 그들의 재회가 반갑지만은 않았던 것은, 제시와 셀린느처럼 우리도 1994년 6월16일 그들이 나눈 감정이 지속과 반복이 불가능한 종류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어그러진 약속과 이지러진 기억, 붙잡을 수 없는 것을 잡으려는 덧없는 발돋움 외에 그들의 후일담에 무엇이 있을 수 있을까? 그러나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은 포개지는 삶의 어떤 순간들을 통해 기적처럼 영속하는 시간을 찾아낸다. 춤추는 어린 딸을 보는 순간, 열여섯살의 시간으로 돌아가 첫사랑 소녀의 춤을 바라보는 남자에 관한 제시의 이야기는, 링클레이터가 <비포 선
열망을 감추는 몸짓 속의 진실, <비포 선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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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살의 그녀가 쓴 20대 일기장을 들추니 빼곡하게 적힌 여관 이름밖에 들어오지 않는다. 왜 여관 이름들은 적어놓았을까, 또는 왜 여관이라는 단어만 붉은 등을 켜고 있는 것일까. 애틋하기는커녕 얼굴 붉어질 여관방의 기억이지만 굳이 변명하자면 이것이야말로 성에 눈떠가는 젊음의 궤적일지 모른다.
게다가 일기를 쓴 나지니(김선아)와 주요 등장인물인 지니의 역대 애인 명단(이현우, 김수로, 공유)을 보건대 이 일기장의 문체가 웃음기 가득한 발랄한 것이며, 적나라한 성애 묘사엔 별 관심이 없음을 짐작하겠다. 어찌 훔쳐보고 싶지 않겠는가. 그런데 일기장이 돌연 (지니를 떠난) 이기적인 수컷들을 응징하기 위한 증거 자료로 채택되면서 그나마 일기장에 흐르던 따스한 분위기가 증발되고 우린 어리둥절해진다.
증발되기 전, 처음엔 싱그럽고 풋풋했던 한 에피소드. 사랑 없으면 소용이 없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미사포를 쓰고 성가를 부르는 한 여자의 눈빛은 그야말로 사랑으로 충만하다. 성가대 지휘자 구현(
29살의 그녀가 쓴 20대 일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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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가 내 기억 속에 있어.” 교통방송 리포터 서유진(송지효)은 어디선가 본 듯한 전화번호를 자신의 번호라며 알려주는, 어디선가 본 듯한 인상의 남자 강성주(고수)를 만난 뒤 이렇게 중얼거린다. 마약특별수사본부 강력계 형사 강성주는 경찰로 호송되던 와중에 사라진 100억원어치 마약의 행방을 찾고자 수사에 나선 참이다. 그리고 서유진은 자신과 같은 디지털카메라 동호회에 속한 한 멤버가 마약거래에 연루된 사람인지도 모른 채 사건에 휘말려들고 있었다. 단서를 잡으면 다시 끈이 풀리는 미로 같은 사건에 강성주가 깊숙이 다가가는 동안, 서유진은 눈앞에 벌어지는 일들이 과거의 일부였던 듯 이상한 데자뷰를 경험하기 시작한다.
유진이 과거라고 믿었던 그 이미지는 예언이 담긴 미래였다. 어긋나듯 일치하는 현실과 미래. 그 이미지의 중첩을 경험하는 그녀의 직업은, 공교롭게도 도심의 ‘현재’ 교통상황을 실시간 알려주는 리포터다. 유진의 환영이 다가올 미래었음을 밝히는 순간부터 <썸>
바꾸려 했으나 바뀌지 않는 운명, <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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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여고생과 열몇살 나이가 많은 남자가 집안 사이의 약속에 의해 부득이 결혼을 올린다. 이들의 결혼생활은 섹스와 애정보다 유아적인 장난에 기반을 두며, 남자가 여자아이의 학교에 교사로 부임하면서 새로운 단계를 맞는다. 학교에서 여자아이는 또래 남자아이를 짝사랑하고 남자는 같은 학교 여교사의 애정공세에 시달린다. 어디서 많이 본 이야기라고?
2002년 홍콩에서 만들어진 <아저씨 우리 결혼할까요?>는 최근의 ‘<어린 신부> 표절 논란’에서 ‘원본’으로 지적되는 영화다. 과연 두 영화는 캐릭터 설정에서부터 기본 상황까지 상당한 유사성을 보인다. 함께 대형마트를 누비는 장면이야 현대 아시아 대도시의 부부생활이 비슷할 터이니 넘어갈 수 있다 해도, 남자를 짝사랑하는 여교사가 집으로 쳐들어오는 신에 이르면 ‘표절설’이 근거없지만은 않다는 느낌도 받게 된다. 그러나 가족, 학교라는 배경을 활용해 코믹한 상황을 만들어가는 <어린 신부>와 달리 <아저씨…&
<어린 신부>의 원본? <아저씨 우리 결혼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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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를 하루 전세 내 밤새 도심을 돌겠다는 평범하지 않은 손님이 있다. 소금과 후추를 적당히 섞어 뿌린 듯한 회색빛 머리칼, 딱 달라붙는 고급 회색 슈트를 입은 이 정체불명의 사내는 빈센트(톰 크루즈)다. 이런 손님이라면 택시운전사 맥스(제이미 폭스)가 제격일 것이다. 노스스프링에서 유니온까지는 7분, 베니스까지는 3분. LA 시내 구간구간의 소요시간을 빠삭하게 외우고 있으니 말이다. 오후 6시부터 이튿날 새벽 4시까지 10시간 안에 도심 다섯 군데를 돌며 비즈니스를 해야 하는 강행군이라면 이런 프로페셔널 운전사를 골라야 한다.
택시가 LA 야경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심도 깊은 카메라로 잡아낸 이국적인 대도시의 밤풍경을 보라. 부감으로 잡아낸 풍경 속엔 밤하늘에 흩뿌린 듯한 빌딩의 노란 불빛과 바람에 고요히 흔들리는 야자수가 어울려 고즈넉함을 자아낸다. 여기에 웨스트 코스트 스타일 재즈로 편곡한 바흐의 <G선상의 아리아>가 넘실댄다.
<G선상의 아리아>
삭막한 도시의 밤에 찾아온 악몽, <콜래트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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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앙코르와트 사원 석벽에 사랑의 비밀을 봉인한 그 남자는 어떻게 됐을까. “먼지 낀 창을 들여다보듯” 희미하게 지나간 날들을 기억할 뿐이라던 그 남자는 지난 사랑의 실패를 딛고 또 다른 인연을 만났을까. 아름답고 안쓰럽고, 그래서 궁금했던 그 남자 차우가 돌아왔다. 그는 변했고, 변하지 않았다. 그건 왕가위도 마찬가지다. <2046>을 만나는 일은 <화양연화>를 거듭 돌아보는 데서 시작된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런 방식으로 만들어낼 거라고는 짐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상상한 것 이상, 예상한 것 이외의 것을 보게 될 거라는, 다소 호들갑스러운 예고가, 이럴 때 어울린다.
우선 그 남자의 근황. 신문사 일을 그만두고 포르노 소설을 쓰는 차우(양조위)는 밤마다 여자를 갈아치우는 바람둥이가 되어 있다. 만취해 쓰러진 여자(유가령)를 데려간 곳은 오리엔탈 호텔 2046호. 사랑했던 여인 수리첸(장만옥)과 남몰래 만나고, 함께 무협소설을 써내려가기도
왕가위의 화려하고 비장한 ‘오페라’, <20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