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리 지구촌이니 세계화니 해도 외국에 나간다는 건 여전히 지금도 포스트 바벨탑 시대임을 체감하는 일이 된다. 그 나라 말도 우리말도 무용지물이고 영어마저 각자의 버전대로 발음이 휘어지노라면, 소통 불능의 해프닝은 유쾌한 추억으로 남기 전에 웃지 못할 답답함과 서글픔으로 물들기 일쑤다. 이때만큼 모국인이라면 누구나 친구가 될 것 같은 순간도 없다. 그 혹은 그녀와는 통역도 필요없고 감정의 언어마저 같을 테니. 이른바 코드까지 맞다면, 눈치볼 것 없는 외국은 도리어 로맨스의 요람으로 변하기 십상이다.
할리우드 중견배우인 밥 해리스(빌 머레이)와 이제 막 결혼한 샬롯(스칼렛 요한슨)도 비슷한 처지다. 위스키 광고 촬영차 일본에 온 밥은 죄다 자기보다 머리통 하나만큼 작은 일본일들의 호들갑과 거두절미식 엉터리 통역에 어안이 벙벙하다. 아내와의 국제전화도 겉돌기만 한다. 사진기자 남편을 따라 도쿄로 온 샬롯은 말로만 사랑한다는 남편이 일 핑계로 사라지고 나면 할 일이 없다. 현란한 도심이
소통 불능의 도시에서 유랑하는 두 이방인,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
전쟁과 질병, 기아에 허덕이는 곳을 찾아다니며 난민들을 구호하는 영국인 의사. 그리고 런던 상류 가정의 미모의 유부녀(직업은 화랑 큐레이터이다). 이 둘의 사랑 이야기라면 어떤 영화일지 짐작이 갈 것이다. <머나먼 사랑>은 대의명분까지 갖춘, 그러나 그 대의명분 때문에 이뤄지기는 힘든, 그래서 더 마음 깊이 고결하게 새겨지는 로맨스에 어드벤처를 곁들인 감동의 드라마가 되기를 의도한다. 그러나 의도에 멈춘다. 극적인 로맨스를 만들기 위해 가난하고 힘든 도처의 나라에서 불필요한 악인들이 만들어지고, 의사 남자의 동기도 모호해진다. 이쯤 되면 구호활동이라는 대의명분은 공주병 환자의 장신구로 전락하는 느낌이다. 진짜로 구호활동에 전념하는 사람들이 보면 짜증이 많이 날 것 같다.
남자 의사는 닉(클라이브 오언)이고 큐레이터 유부녀는 조르단(안젤리나 졸리)이다. 조르단이 닉을 처음 본 건 런던의 한 자선단체 파티장이다. 에티오피아에서 구호활동을 하던 닉이 이 파티장에 나타난 건 구
숭고한 이미지에 기댄 감동의 공허함, <머나먼 사랑>
-
2000년 만들어진 독일의 <아나토미>는 독일에서만 1천만달러의 수익을 올리고, 67개국에 팔리며 인기를 끌었다. 한 대학에서 벌어지는 불법 인체해부실험을 다룬 고어영화 <아나토미>가 고어영화팬만이 아니라 보통의 관객을 끌어들인 매력은 무엇일까. 인간존재의 물질적 조건을 알기 위해서는, 치료하거나 능력을 상승시키기 위한 방법은 우연히 얻어지지 않는다. 수많은 실험과 노력, 그리고 자의이건 타의이건 희생이 필요하다. 법적으로는 동물실험으로 국한되어 있지만, 사실 이 세계 어딘가에서는 ‘인체실험’이 이루어지고 있을 수도 있다. 음모론이지만, 충분히 의미있는 가설이다. 이미 알려진 일본의 731부대를 비롯하여 잔혹한 인체실험은 끊임없이 존재해왔다.
<아나토미>를 만들었던 슈테판 루조비츠키는 속편에서, 전편의 문제제기를 이어간다. 요하킴(바르나비 멧슈라트)은 근육수축증에 걸린 동생을 치료하겠다는 생각으로 의사가 되었다. 베를린의 병원에서 인턴으로 일하게 된
반복되는 불법 인체실험의 공포, <아나토미2>
-
스페인이 아직 이슬람권과 기독교권으로 양분되어 있던 시대, 기독교 왕국 카스티야의 촉망받는 청년무사 로드리고는 형제처럼 지내던 친구이자 유력한 왕위계승자 산쵸가 음모로 피살되고 얼떨결에 사랑하는 여인의 아버지마저 죽이게 된다. 친구와 연인 모두를 잃는 갑작스러운 시련. 게다가 반역자로 몰려 고향에서 추방당하지만 장차, 한국으로 치자면 ‘성웅 이순신’에 비견될 스페인의 민족 영웅 ‘엘시드’가 될 로드리고에게 이 모두가 극복될 시련임은 불문가지. 탁월한 검술과 높은 덕성으로 아랍왕국의 친구들을 도와 승리자(엘시드)라는 호칭을 부여받고 본국에서의 사랑과 명예도 되찾게 되는 것은 물론이다. 이후 수세기에 걸쳐 모든 문학, 음악, 연극의 소재로 사랑받는 것도 포함해서.
그러나 <엘시드: 전설의 영웅>(<엘시드>)이 다루고 있는 이 11세기 중세 영웅의 실제 이야기는 사실 훨씬 더 복잡한 감이 있다. 로드리고는 그 이후로도 두번은 더 추방당하고, 사랑해서 결혼한 여인은
영웅설화의 어설픈 흉내, <엘시드 : 전설의 영웅>
-
-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스파이 키드 3D: 게임 오버>는 온통 기시감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니, 부분적으로 3D를 차용하여 50년대 할리우드공포영화들, 혹은 <스파이 키드> 시리즈의 전작들과 <매트릭스>(게임 속에 들어가면 자연적으로 게임 유저가 되어 능력을 전수받는 주인공)는 차치하고서라도 기시감을 넘어선 또 다른 기억 착오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영화 자체에 대해 포화상태의 지식을 요구하는 영퀴들, 혹은 우리의 여가시간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는 (비디오, 컴퓨터, 오락실 등등의) 게임들. 아마도 이 영화가 주는 이상한 감회는 예전에 100% 디지털 ‘배우’들로만 이루어졌던 <파이널 환타지>가 슬쩍 안겨주었던 영화의 위기감 같은 것에 비견될지도 모른다.
영화가 시작하면 마치 게임의 스타트처럼 ‘설명’이 뜬다. “주인공 중 하나가 안경을 쓰면 따라서 입체안경을 쓰세요. 눈이 정 피곤하면 나가서 팝콘이랑 콜라를 사드세요. 하지만 그러면 벌써 4
어린이들이 기대하는 게임같은 영화, <스파이 키드 3D : 게임 오버>
-
<열두명의 웬수들>은 정말 존재했던 가족의 이야기다. 열두명의 자식을 두었던 프랭크 B. 길브레스는 그중 두 아이와 함께 <치퍼 바이 더 더즌>(Cheaper by the Dozen)을 썼고, 그 책은 1940년대에 베스트셀러로 자리잡았다. 50년이 넘게 흐른 지금, “열둘이나 되는 아이들을 자식 둘 키우는 것처럼 수월하게” 길러낸 이 경이로운 아버지는 시대와는 맞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선량하고 난처한 얼굴을 가진 스티브 마틴은 일보다 가정을 위에 두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남자를 설득력 있게 연기했다.
풋볼 코치 톰 베이커(스티브 마틴)와 아내 케이트(보니 헌트)는 열둘이나 되는 아이들 때문에 좋은 직장도 포기하고 시골에서 살고 있다. 아이들은 헌옷을 물려입어야 하고 자기만의 방도 가질 수 없지만 행복하게 지내왔다. 그러나 이 행복은 톰이 모교팀 코치 자리를 받아들이면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새로 이사간 화려한 저택보다 시골의 낡은 옛집을
누가 누군지 부모도 헷갈려! <열두명의 웬수들>
-
낸시 마이어스 감독은 전작 <왓 위민 원트>와 마찬가지로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에도 아주 실용적이고 친절한 제목을 붙였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류의 서점 처세술 코너의 남녀관계 지침서나 <코스모폴리탄>의 기획기사에 자못 어울릴 법한 제목인데, 이러한 작명법은 실제 낸시 마이어스 영화의 속성과도 통하는 바가 있다. 말하자면 그의 로맨틱코미디에는 잡지 편집자의 감각이 있다. 이는 고전 스크루볼코미디의 위트와 리듬을 계승한 노라 에프런에 비하면 훨씬 느리고 성긴 대사를 보완하는 무기이기도 하다. 마이어스의 로맨틱코미디는 캐릭터를 창조하는 작업 못지않게 오늘날 구애와 짝짓기의 세계에서 실제로 이슈가 되는 상황을 끌어들이는 데에 공을 들이며 타깃 관객층도 그만큼 구체적이고 분명하다.
<사랑할 때…>의 헤드라인은 노년에 접어든 전문직 독신 남녀들의 데이트 게임. 서른 미만의 미녀만 상대하며 화려한 싱글로
노년의 로맨스, <사랑할 때 버려야할 아까운 것들>
-
지난 2001년을 두고 누벨바그의 재래를 보여준 한해라고 이야기한 평자들이 꽤 있었다.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프랑수아 트뤼포, 그리고 “영화감독은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자신의 신념을 현재에도 열심히 실행해가고 있는 클로드 샤브롤을 제외한 누벨바그의 주요 멤버들 세명 모두가 신작들을, 그것도 그해의 가장 주목할 만한 영화들에 속할 만한 작품들을 내놨으니 그런 말이 나올 법도 했다. 이 누벨바그 이후의 새로운 작품들, 즉 장 뤽 고다르의 <사랑의 찬가>와 에릭 로메르의 <영국여인과 공작>, 그리고 자크 리베트의 <알게 될거야> 가운데에서 리베트의 영화가 처음으로 국내 관객과 ‘정식’ 만남을 가지게 되었다(이들 영화들은 모두 국내에서 열린 몇몇 영화제를 통해 소개된 바가 있다). 이건 한편으로는 반가우면서도 의아한 일이기도 하다. 고다르에 비해서도, 그리고 로메르에 비해서도, 리베트라는 시네아스트는 우리에게 확실히 미지의 존재에 가까우니까 말이다
노대가의 가볍지만 우아한 터치, <알게 될거야>
-
박경희의 장편 데뷔작 <미소>는 감독 임순례가 프로듀서를 맡고, 또 한명의 감독 송일곤이 남자 주인공 ‘지석’으로 등장하며, 기성 배우 추상미가 노 개런티를 선언하면서 마침내 완성된 영화이다. 현재 블록 버스터를 향한 영화적 ‘튜블러 비전’을 앓고 있는 한국영화의 명단 사이에 이 영화가 끼어 있다는 것은 지난한 싸움 끝에 이른 등재라는 사실을 예측하고도 남기 때문에 우선은 즐거운 출현이다. 그 점에 대해 화답하듯 몇몇 국내외 영화제들은 수상과 초청이라는 형식을 빌려 지지를 보냈다.
<미소>는 이미 영화를 본 몇몇 관객의 입소문이 들려주는 것과는 달리 여성의 문제에 치열한 초점을 맞추고 있거나 일상성의 테마로 채워져 있지 않다. 의외로 <미소>는 너무 초연하기 때문에 야심적으로 보이는, 더러는 너무 본질적이기 때문에 추상적으로 보이는 질문을 던진다. 영화가 스크린을 가득 채운 ‘눈’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단지 효과가 아니며, 유인원과 분자생물이 끼어드
삶의 곤경 속에서 되찾는 미소의 깨달음, <미소>
-
프로듀서 국병두, 김재호 감독 이형석 각본 이형석 촬영·조명 김동은 편집 문인대 작곡 이은석, 전종혁 믹싱 성지영, 홍예영 녹음 이정용, 김용국 미술 권순영, 김희석 출연 전형민, 송문수, 김주령 제작연도 2002년 상영시간?? 등급 15세 관람가 개봉 2월2일
<호흡법, 제2장>이라는 제목의 뜻이 무엇인지 처음부터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 그것은 옆방으로 난 구멍을 통해 무엇인가를 엿보는 소년의 의도를 오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가 흘러나오고 거친 숨소리가 들리는 옆방은 젊은 삼촌 부부의 방이다. 십만 단위 암산도 척척 해내는 이 조숙한 소년의 성적 호기심이 그 이유일 거라고 쉽게 예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근 사격장에서 크게 울려오는 총성도, 소년이 부리나케 달려가 개에게 를 콧노래로 들려주는 의미도, 개의 귀에 씌워져 있는 귀마개도 모두 잘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실은 소년이 보고 있었던 것이 삼촌 부부의 태교장면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나서야 모
자연과 인간의 공존, <호흡법, 제2장>
-
시선이 잘 미치지 않는 도심의 으슥한 곳만을 출몰하며, 발견될 때마다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은 바퀴벌레만이 아니다. 여기, 주머니 사정 팍팍하고 시간 쫓기는 창노와 송이 같은 연인들도 그렇다. 선거 벽보 문구에도 엉뚱하게 몸이 동하고 아이들이 써놓은 낙서에도 달아오르는 이들, 그러나 당최 묵은 회포를 풀 만한 곳이 마땅치 않다. 계단에서, 골목 어귀에서, 그리고 심지어 화장실에서까지 뒤엉키는 연인을 떼어놓는 어색한 헛기침과 민망한 눈길들. 하지만 여관 가기엔 돈이 없고, 비디오방 들어가기엔 찜찜하다. 다시 보다 으슥한 곳으로 움직이려는 이들의 동선이 미소를 자아내는 가운데, 곁으로 공사판 먼지를 숨기기 힘든 도시의 주변부가 무심하게 흘러간다. 씁쓸하게 웃겨주는 인간생태보고서 플러스 동네에로무비? 하지만 영화는 더 나아간다.
참다 못해 당도한 곳은 문이 열린 빈집, 마침내 이들이 가택침입을 불사하고 섹스에 몰두하는 동안 과일 사러 나간 집주인 아줌마가 스릴러적 교차편집으로
가난한 연인들의 섹스 성공기, <생산적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