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디션 소식을 듣자마자 만화방으로 달려가 앉은자리에서 <정년이> 단행본을 전부 읽었다.” 매란국극단 연구생 홍주란이 <자명고> 오디션에 합격한 뒤 자신만의 구슬아기를 찾아 헤맸듯 우다비는 주란의 새로운 면면을 살피려 했다. 원작과 다른 궤적으로 그려진 주란을 체화하려면 “일관된 정서”를 발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웹툰의 주란이 “미묘한 분위기 아래 조용히 빛을 숨긴 원석”이었다면 우다비의 주란은 “선하고 선명한 사람이지만 차갑고도 치열한 내면의 싸움”을 지니고 있다. 냉담한 영서(신예은)와 즉흥적인 정년(김태리)도 주란 앞에선 편하게 속내를 드러낸다. “화합을 원하고 스스로 융화되려는 주란은 구슬아기를 연기할 때도 고미걸을 받쳐줄 방법부터 고민한다.” 그 때문에 정년에게 함께 연기할 수 없다고 말하는 8화의 고백은 우다비에게 가장 어려운 장면이었다. “너무 아픈 말들이다. 정년에게 커다란 상처를 주면서도 주란의 일관된 정서를 위반하지 않아야 했다.”
촛대
[who are you] 우다비 <정년이>
-
내향적이고 적요한 세계 안에 역사의 여파가 밀려온다. 내전으로 깊은 내적 상흔을 입은 어른들은 대체로 과묵하고 간혹 말을 하더라도 자신의 슬픔에 대해선 입을 다문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깊은 골을 알지 못한다. 다만 어느새 감지한다. 그들이 속한 세상의 메마른 공기와 잔혹함을 접한다. 그 세상 속에서 아이들은 외로움을 느끼고 심하게 앓는다. 그리고 때로는 유령 같은 존재를 만난다. 빅토르 에리세에게 유령 같은 존재는 곁에 실존하는 존재와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같은 비중으로 혹은 더한 비중으로 인물들의 육신을 뒤흔들기 때문이다. 에리세의 인물들에게 과거란 흘러간 시간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시간이며, 회한이 아니라 격정의 시간으로 다가온다. 격정은 감정의 파고가 극렬하게 드러나는 표정과 과격한 몸짓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외려 미니멀한 구도, 차분한 톤과 무드, 인물이 느릿한 행동을 취해 변화시키는 사물의 상태, 절제된 화면 속에서 일어나는 빛의 변화. 무엇보다 오래된 아픔, 시간이 흘러도
영화와 역사의 불가분한 관계, 빅토르 에리세 감독론과 전작 소개
-
운명은 죄가 없다. 삶의 무게를 버티기 힘들 때 우리는 이 묵직한 울림의 단어에 너무 많은 책임을 미루곤 한다. 어차피 그렇게 될 일이었다고,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손을 놓을 때 그 무기력한 낙담조차 정해진 운명인 걸까. 빅토르 에리세 감독이 1992년 <햇빛 속의 모과나무>를 연출한 뒤 네 번째 영화 <클로즈 유어 아이즈>를 세상에 내놓기까지 31년의 세월이 걸린 건 이미 정해진, 필요한 일이었던 걸까. 영화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예상외로 단호하고 명료하게 답한다. 어떤 길이, 어떤 경로로, 어떻게 닦여 있는지는 실은 그다지 중요치 않다고. 오직 눈을 떠 바라보는 순간부터 비로소 시작되는 것들이 있으니, 그게 바로 영화의 운명이라고.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사라진 유명 배우를 추적하는 어느 영화감독의 걸음에 동행하는 영화다. 노년의 영화감독 미겔 가라이(마놀로 솔로)는 한 TV프로그램으로부터 연락을 받는다. 22년 전 실종된 배
작별하지 않는다 , 빅토르 에리세의 <클로즈 유어 아이즈>가 매혹적인 이유에 관하여
-
31년 만의 귀환. 1973년 <벌집의 정령>으로 세계 예술영화사의 거장으로 단숨에 등극한 이래 세 번째 장편 <햇빛 속의 모과나무>(1992) 이후 종적을 감췄던 빅토르 에리세가 돌아왔다. 복귀작 <클로즈 유어 아이즈>는 지난해 칸영화제에서 프리미엄 상영되며 “가슴 시린 시네마의 고별 무대”(<할리우드 리포터>)라는 소문을 풍겼고, 31년 만에 돌아온 거장이 영화에 대한 영화를 만들었다는 소식은 전세계 영화 팬들의 가슴을 강하게 건드렸다. 이 감응을 마주하고자 <씨네21>은 <클로즈 유어 아이즈>에 대한 애틋한 리뷰와 뾰족한 비평을 비롯해 빅토르 에리세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널리 조망했다. 더하여 <클로즈 유어 아이즈>가 왜 20세기 메타 영화의 끝을 예견하는지를 살폈다. 마지막으로 빅토르 에리세 감독이 <클로즈 유어 아이즈>를 두고 밝힌 자신과 영화의 관계를 덧붙였다. 영화의 죽음, 극장의 쇠퇴란
[특집] 영화의 존재론을 말하다, <클로즈 유어 아이즈> 리뷰와 비평, 빅토르 에리세 감독론과 20세기 영화의 진단
-
-
<앵콜요청금지> <보편적인 노래> <졸업>…. 평범한 말과 음을 모아 비범한 음악을 만들어온 밴드 브로콜리너마저가 정규 앨범으로는 5년 만에 4집 《우리는 모두 실패할 것을 알고 있어요》로 돌아왔다. 정식 발매 전부터 공연과 온라인 감상회를 열어 리스너들의 호응을 쌓아온 이번 앨범엔, 자신과 세상의 필패를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다 나은 내일을 도모하기 위해 지금 노래하려는 자의 위로가 정겹게 서려 있다. 19년째 한 밴드에서 오래 호흡을 맞춰온 브로콜리너마저의 덕원과 류지, 객원 기타리스트로 함께하다 올해 밴드의 정식 멤버로 합류한 동혁이 <씨네21>을 브로콜리너마저의 작업실로 초대했다. 유자차 대신 커피를 마시며 들은 신보의 제작기를 전한다. 개인 사정상 인터뷰에 함께할 수 없었던 키보디스트 잔디는 부드러운 말이 가득한 편지로 답을 보내왔다.
- 지난 5월 앨범을 발매하기 전 미리 오프라인 음감회를 통해 관객들에게 4집의 미출시
[트랜스크로스] “이 앨범은 보편적 욕망에 관한 이야기다” - 정규 4집 《우리는 모두 실패할 것을 알고 있어요》 발매한 브로콜리너마저 덕원, 잔디, 류지, 동혁
-
전쟁 노예가 된 루시우스(폴 메스칼)가 검투사가 되어 콜로세움에 설 수 있었던 건 검투사들의 주인이자 상인인 마크리누스(덴절 워싱턴) 덕분이다. 광기에 사로잡힌 두 황제의 입안의 혀처럼 굴던 마크리누스는 루시우스를 앞세워 서서히 자신의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덴절 워싱턴은 <아메리칸 갱스터> 이후 리들리 스콧 감독과 오랜만에 합을 맞추며 역사적 인물이 아닌 자신만의 “새로운 마크리누스를 창조했다"고 전했다.
- <글래디에이터 Ⅱ>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에이전트에서 “리들리 스콧 감독이 신작을 준비 중이고 대본을 보낼 것이다”라고 알려주었고, 리들리 스콧 감독도 직접 연락을 준 것으로 기억한다. 무엇이 먼저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리들리 스콧 감독과 <아메리칸 갱스터>를 통해 좋은 결과를 얻은 적이 있기에 그의 신작 <글래디에이터 Ⅱ>라는 것만으로도 작품에 참여할 이유는 충분했다. 대본도 훌륭했기에 바로 결정을 내릴 수
[인터뷰] “대담하고 폭력적이며 야심차다”, <글래디에이터 Ⅱ> 배우 덴절 워싱턴
-
검투사 막시무스(러셀 크로)의 아들 루시우스는 전장에서의 복수를 꿈꾸며 콜로세움에 모습을 드러낸다. 적의 움직임에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루시우스는 영화 <애프터썬>, 드라마 <노멀 피플>에서 폴 메스칼이 연기해온 캐릭터와 완전히 다르고, 폴 메스칼은 “바로 그 점 때문에 이 작품에 끌렸다”고 말한다.
- 액션영화의 주인공들은 남성성에 관한 고정관념에 얽매이곤 한다. <글래디에이터 Ⅱ>에서의 본인 역할이 할리우드의 남성 캐릭터에 대한 관점이 변화했음을 드러낸다고 생각하나.
루시우스는 전통적인 주연에 가깝다. 그래서 큰 변화가 있기보다는 그것을 다시 상기시키는 것에 가깝다. 배우로서의 내 역할은 내가 익숙한 남성성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맡은 인물에 필요한 남성성을 연기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서로 다른 성격의 남성 캐릭터를 연기해왔는데 그 과정이 즐거웠고 이는 남성이라는 존재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루시우스는 전통적인
[인터뷰] “침묵 속 무게 있는 권위를 보여주고 싶었다", <글래디에이터 Ⅱ> 배우 폴 메스칼
-
장엄한 로마의 세계가 다시 구현된다. 리들리 스콧 감독이 24년 만에 <글래디에이터>의 속편을 내놓았다. 검투사 막시무스(러셀 크로)의 죽음 후 20여년이 지난 시점에서, 그와 황제의 딸 루실라(코니 닐슨) 사이에서 태어난 루시우스(폴 메스칼)가 새로운 주인공이 되어 돌아온다. 전쟁 노예가 되어 로마에 발을 들인 루시우스는 전장에서 잃은 소중한 이들에 대한 복수를 꿈꾸며 검투사 신분으로 콜로세움에 입성한다. 리들리 스콧 감독은 여러 인물의 욕망이 교차하는 로마를 다시금 화려하게 재건해냈다.
- 24년 만에 <글래디에이터>의 세계로 다시 돌아왔다. 속편을 만들게 된 계기는.
영화가 성공했을 때 나는 바로 다음 프로젝트로 넘어가곤 한다. <글래디에이터> 이후 20여년간 다른 영화를 20여편 만들었을 정도다. 하지만 수년이 지나도 사람들이 여전히 <글래디에이터>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느꼈고 루시우스의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있겠다는 생각
[인터뷰] “좋은 서사는 여전한 힘이 있다고 믿는다”, <글래디에이터 Ⅱ> 리들리 스콧 감독
-
한 고등학교 쓰레기통에서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라는 글귀로 시작하는 유서 형태의 편지가 발견된다. 상황을 덮으려는 학교측과 달리 정 선생(노진업)은 편지의 주인을 찾고자 한다. 학생들의 글씨를 일일이 대조해보던 정 선생은 유년 시절, 자신이 바라는 어른의 모습을 상상하며 열심히 일기를 쓰던 한 10살 소년을 상기한다. 2023 대만금마장영화제에서 신인감독상, 관객상을 거머쥔 데 이어 2024 홍콩금상장영화제, 2024 홍콩감독조합상에서 연이어 신인감독상을 수상한 젊은 창작자가 등장했다. 장편 데뷔작 <연소일기>로 잠재력을 인정받은 탁역겸 감독은 자살과 우울증이라는, 자국 홍콩이 마주한 사회문제를 소년 요우제(황재락)의 삶에 투영한다. 요우제의 부모는 또래보다 늦되는 그를 영재 동생 요우쥔(하백염)과 비교하며 매순간 몰아붙인다. 부모의 기대치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요우제에게 돌아오는 건 그를 무시하는 주변인들의 가시 돋친 말뿐이다. 탁역겸 감독은 “육체적 상처는 시간
[인터뷰] 자살과 우울에 대한 깊은 이야기, <연소일기> 탁역겸 감독
-
올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를 시작으로 시체스국제판타스틱영화제, 가오슝영화제, 자카르타 필름위크까지. 김민하 감독은 첫 장편 <아메바 소녀들과 학교괴담: 개교기념일>로 각국 영화제를 순회한 뒤 막 돌아온 참이었다. 핸드폰 사진첩에 가득 쌓인 추억을 공유하는 그의 표정에서는 희색이 감돌았다. 그는 해외 영화제에서 여고생들이 수능 답을 얻기 위해 귀신과 숨바꼭질에 도전한다는 한국 호러 코미디가 세계 관객에게 용기에 관한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했다. 폭소가 끊이지 않는 극장의 풍경도 목격했다. 그래서 결심했다. 더 많은 사람을 즐겁게 만들겠다고, 영화의 유속에 맞춰 더 멀리까지 가보겠다고.
- 중학생 때 <주온>을 보고 놀라 한약을 지어 먹었다는 일화를 들었다. 그런 어린 시절을 거쳐 첫 장편으로 호러영화를 만들었다.
그때 약뿐만 아니라 침도 맞고 목사님께 기도도 받았다. (웃음) 호러영화를 선택한 건 신인감독이 그렇게들 데뷔한다는 관례를 따
[인터뷰] 사랑이 공포의 대상을 무찌를 수 있다, <아메바 소녀들과 학교괴담: 개교기념일> 김민하 감독
-
임완호 촬영감독이 남극에서 생애 처음 고래를 목격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은 수중촬영 전문가 김동식 감독이었다. 헬기로 300km를 날아 통신이 잡히는 장보고 기지로 돌아온 그는 메시지를 남긴다. ‘형, 우리 고래 다큐 하나 해봅시다.’ 이 찰나의 순간은 두 사람을 7년의 파트너십으로 이끌었고 그렇게 한국 자연다큐멘터리의 새 역사가 쓰였다. SBS 창사특집 4부작 다큐멘터리 <고래와 나>는 제60회 백상예술대상에서 대상 후보로 경쟁한 끝에 예술상을, 제51회 한국방송대상에서 대상을 받으며 극장판 개봉(10월30일)을 앞두고 더할 나위 없는 예열을 마쳤다. 작품의 키 스태프일 뿐만 아니라 모험의 주체이며 발언의 당사자이기도 한 임완호, 김동식 촬영감독이 <씨네21>를 찾아 꿈과 낭만, 경외로 가득했던 삶의 한 단면으로서의 영화 <극장판 고래와 나>를 소개한다.
- 통가에서 혹등고래를 만나는 순간, 7년간 육상과 공중 촬영을 맡아온 임 감독이
[인터뷰] 젖 먹임과 키스라는 기적 <극장판 고래와 나> 임완호, 김동식 촬영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