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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콕행 비행기 안에서 2월13일
1월25일 첫 촬영을 시작으로 한국 분량 촬영이 끝났다. 어느덧 방콕 촬영 분량만 남아 있다. 유독 이번 촬영이 짧게 느껴지는 것은 비단 타이트한 스케줄 때문만은 아니다. 한국 분량을 촬영한 2주 동안 카메라 안과 밖에서 감지되는 현상과 변화를 바라보고 소화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대도시의 사랑법>을 촬영하며 김세인이라는 개인의 삶과 직업인으로서의 감독의 삶, 양 측면에서 현재 내가 발 딛고 있는 이 지점이 매우 중요한 순간이라는 것을 계속하여 자각했다. 지난 에세이에 언급했던 고민들에 대한 완벽한 해답은 아니지만 어떤 실마리 정도가 내 발밑으로 자꾸만 흘러들어오는 것 같았다.
두렵지 않다. 촉박한 시간으로 인해 촬영장에서 내내 뛰어다녀야만 했다. 심지어 조급한 마음에 컷을 하기 직전에는 모니터 룸 입구에 서서 모니터를 지켜봤다. 컷과 동시에 모니터 룸 문을 열며 밖으로 달음박질을 시작했다. 짧은 시간 내에 최선의 오케이컷을
[김세인의 데구루루] 방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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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의 계절이 왔다. 봉준호 감독이 ‘로컬 어워즈’라고 언급하기 전까진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엄밀히 말하면 그냥 남의 나라 시상식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 어떤 시상보다 가장 주목도가 높고 영향력이 큰 행사라는 사실을 부정하긴 어렵다. 적지 않는 개봉 영화가 아카데미의 결과에 따라 울고 웃는다. 할리우드가 세계 영화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생각해볼 때 이상할 게 없지만 한 꺼풀 열고 들여다보면 속내는 좀더 복잡하다.
분명 아카데미에서 주목받는, 이른바 ‘아카데미 영화’가 따로 존재한다. 좀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요란한 여름 블록버스터보다는 감독의 작가적 야심과 예술성에 초점을 맞춘 영화들이 오스카의 사랑을 받아왔다. 상업과 예술의 경계를 나누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지만 동시에 이보다 더 직관적이고 명확하게 와닿는 구분도 드물다고 생각한다. 유효하고 냉혹한 현실. 그렇기에 할리우드엔 아카데미가 필요하다. 아카데미는 흥행, 상업성 일색의 할리우드가 꾸는 시네마를 향한 마지막 낭만
[송경원 편집장] 오스카의 계절, 영화,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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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에 김대중> 기획 기사(<씨네21> 1440호, ‘가장 미움받은 정치인,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에 올렸던 내 글에는 ‘샤이 김대중’이었던 소년 시절이 있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내가 정당 차원에서 지지했던 쪽은 따로 있었다. 김대중의 소속 정당보다 훨씬 더 불리한 처지의 정당이었다. 발단은 1992년 총선 당시의 민중당이다(현 진보당의 전신인 민중당과는 다른 당이다). 하교하던 국민학생은 버스 안에서 민중당 선거운동원의 발언을 만난다. 민중당이라는 당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전년도 광역의원 선거 때, 비디오카메라 촬영 연습을 하던 아버지가 합동연설회를 찍어와 집에서 틀었다. 세 후보 중 민중당 C 후보가 마음에 들었다. ‘가난했던 사람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정치를 하고 있다!’ 가난한 급우 몇몇도 말했다. “우리 엄마, 아빠는 C를 찍었다.”
버스 안 운동원은 자기네 국회의원 후보 Y가 감옥에 갔다 왔음을 알렸다. 상대가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을 지낸
[김수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정직한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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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점은 영화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20자를 넘지 못하는 한줄 평에서 굳이 미덕을 찾자면 명확한 입장과 직관적인 반응을 빠르게 전달할 수 있다는 것 정도다. 요즘은 이마저 더 빠르게 확산시킬 통로가 널렸으니, 검증된 레거시 미디어의 전문성과 공신력을 차별화 요소로 꼽을 수 있겠다. 물론 그 와중에도 빼어난 통찰력으로 시인처럼 한줄에 핵심을 관통하는 문장을 뽑아내는 분들이 있다. 하지만 별점은 본질적으로는 수치화할 수 없는 것을 수치화하는 모순된 작업이다.
별점의 핵심은 결국 데이터다. 데이터는 축적을 통해 위력을 발휘한다. 자연스럽게 별점의 무게는 영화 한편을 관통하고 해석하는 것보다는 개별 평자의 축적된 감식안 쪽에 쏠린다. 일관성 있게 꾸준히 별점을 쌓아가는 평자의 별점이 신뢰를 얻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때론 이런 흐름이 역전되어 개별 영화에 대한 평이 아니라 그걸 잘 판별하는 평자에 대한 평가로 소비되기도 한다. <파묘>의 안과 밖을
[송경원 편집장] (<파묘> 곁에서) 별점을 파헤치다 마주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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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적인 감정이 나를 압도할 때는 종이 한장을 꺼낸다. 공책은 안되고 반드시 낱장 종이여야 한다. 거기에 감정의 내용과 그것이 생겨난 이유를 적는다. 이 종이는 곧 찢기고 구겨져 쓰레기통으로 갈 것이므로, 나는 마음 놓고 솔직해진다. 그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고, 다 쓴 다음에 보면 내용이 생각보다 싱거워서 왠지 부끄러워진다. ‘기분이 안 좋다’ 정도로 뭉뚱그린 감정이 사실은 불안, 두려움, 분노, 미움, 슬픔 등이었다는 걸 알면 그것들을 잘 다룰 수 있을 것만 같다. 문제는 ‘질투’다. 종이에 이 낱말이 적히면 생각이 복잡해진다.
‘질투는 나의 힘’이라며 긍정적인 에너지를 끌어올리는 사람도 있다. 그는 아마 기형도의 시 <질투는 나의 힘>을 모르거나 제목만 아는 사람일 것이다. 시 속에는 ‘힘’이 없다.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라는 탄식만 있을 뿐이다. 나는 그 시를 무척 좋아한다.
사실 나는 질투의 장인이다. 평생 질투를 개발하고, 거기에
[김소영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질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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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획이 정해지면 취재가 시작된다. 취재를 한 후에 데스크에서 정리한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계간지는 계절의 변화에 맞춰서, 월간지는 한달의 시기에 따라서. 지금 일하는 부서는 월간지라 대부분 월초에 치열하게 기획 회의를 마치고 중순까지 취재를 마치고 남은 기간 마감을 치는 형태로 한달의 업무 스케줄이 짜인다. 그나마 주간지에서 일하는 게 아니라 다행이라 해야 하나.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잡지를 만드는 사람에게 야근은 대부분 필연적이다. 나 역시 그렇다. 심지어 옮긴 팀에서 첫 취재였고, 첫 인터뷰였다. 어떤 형태로든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녹취를 풀기 전에 저장해둔 좋아하는 인터뷰 기사를 다시 찾아 읽었다. <씨네21>이 금정연, 오한기, 이상우와, 정지돈 작가와 나눈 대화, 인터뷰에서 브래드 피트가 앤서니 홉킨스를 인터뷰한 기사, <뉴요커>에서 마이클 슐먼과 프랜 리보위츠의 인터뷰. 각각 톤과 방식은 다르지만, 좋은 인터뷰의 요
[김민성의 시네마 디스패치] 맛과 요리 섹션: 인터뷰 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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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허버트 작가의 소설 <듄>은 함부로 믿지 않는 자를 어여삐 여기는 이야기다. 그래서 좋아한다. 표면적으론 분명 닳고 닳은 메시아 서사인데, 이제껏 영상화된 결과물들이 사막행성 아라키스에서의 투쟁기와 영웅 탄생에 초점이 맞춰지다 보니 더욱 그쪽으로 소비되는 게 아닌가 싶다. 몰락한 명문가의 정당한 계승자가 변방에서 힘을 키워 돌아오는 복수담은 언제나 잘 먹히는 법이니까. 하지만 이 오래된 상상력은 사실 통쾌함과는 거리가 멀다. 프랭크 허버트의 <듄>은 신화적 서사보다는 정해진 운명 속에서 번민하는 연약한 인간의 초상을 응시한다. 메시아의 성경보다는 <맥베스>나 <리어왕>에 가깝다.
대개의 SF가 그렇듯 설정과 무대가 우주 단위일 뿐 근간의 질문은 간단하다. 최선의 운명과 최악의 자유의지 사이 당신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듄>의 무대는 미래 우주지만 속살은 종교와 신비주의로 포장된 중세 암흑시대로 채워져 있다. 과학이란
[송경원 편집장] ‘파묘’와 ‘듄: 파트2’, 사랑스러운 호들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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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괴함. 기이하고 괴상망측하다는 뜻이다. 조금 더 길게 풀자면, 평상의 것들과는 너무도 달라 예측하거나 헤아리기 어렵다는 의미이다. 여당의 비상대책위원장이 전통시장을 찾고 기자들에 둘러싸여 카메라 세례를 받는 일이야 그저 식상할 뿐 기괴할 것까지는 없었다. 총선 전이고, 게다가 설 연휴를 앞둔 차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가 한손에는 날것의 털 뽑힌 목 잘린 닭의 아랫부분을 쥐고, 다른 한손에는 시장상품권 뭉치를 펼쳐 든 모습을 보았을 때, 내 머리는 이물질이 낀 톱니바퀴마냥 덜컥거렸다.
‘저게 대체 무슨 장면인 걸까?’
본래 의미가 파악되지 않는 장면을 보면 잠시간 멈칫할 수는 있다. 그래서 그 사진이 실린 기사를 읽어보았다. 보통은 제목이라도 보거나 맥락을 담은 문자 정보와 결합되면 이해하기 어려운 이미지도 그럭저럭 납득이 되는 법이다. 그런데 읽고 나서도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양계농가들의 시위 장면도 아니고, 지역화폐 활성화를 부르짖는 시장 상인도 아닌데, 게다가 그 두
[정준희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생닭,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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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과장을 보태) 잡지 제작 에너지의 삼 할은 실수를 바로 잡는 작업에 투입된다. 몇번을 체크해도 안 보이던 오타는 어디 숨어 있었던 건지 인쇄만 들어가면 잃어버렸던 동전마냥 데굴데굴 잘도 나온다. 오타로 인한 좌절감은 그나마 귀여운 수준이고 간혹 이름이나 제목이라도 틀리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고 땅이 꺼지는 것 같다. 그럴 때마다 선배들에게 혼쭐이 났지만 마지막엔 꼭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다독여주던 게 생각난다. 그렇지. 실수는 누구나 할 수 있다. 다만 그 말이 당사자 입에서 나오면 곤란하다. 그건 염치의 문제다. 부끄러움이 없어지면 둔해지고, 둔해지면 습관이 된다. 주변에서 ‘괜찮다’고 위로해주는 말에 더 창피하고 무겁게 느껴질 때까진 아직 괜찮은 거다. 스스로 괜찮다고 합리화하기 시작한 순간이야말로 진정 위험신호를 울려야 할 때다.
이승만 전 대통령을 다룬 다큐멘터리 <건국전쟁>이 화제다. 2월1일 개봉한 이 비밀스런 영화는 설 연휴 크고 작은 영
[송경원 편집장] <건국전쟁>, 믿음과 염치의 상관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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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과학자인 지인과 팟캐스트를 시작했다. 이름은 ‘이과 여자’. 제목에 ‘문과 남자’가 들어가는 과학책도 있다는데 이과 여자 둘이 ‘이과 여자’ 이름으로 못할 것 없지 싶었다. 기획 회의 후 지인은 팟캐스트 로고로 써보면 어떻겠느냐며 핑크 베이지색으로 그려진 짧은 단발머리 여자의 얼굴 이미지를 보내왔다. 인공지능이 생성해준 이미지라고 했다. 생성형 인공지능 서비스 유료 이용자로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나의 첫 요청은 “이과 여자”를 표현하는 로고를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뒷머리를 동그랗게 묶은 여자의 옆얼굴 주위로 막대그래프, 원자구조. 여성 성별 기호 등이 원형으로 배치된 이미지였다. 비교를 위해 “이과 남자”도 표현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과 남자는 다부진 표정으로 정면을 보는 남성의 얼굴이었는데 넥타이를 매고 각진 모자를 쓰고 있어 군인 장교처럼 보였다. 배경에는 원자구조와 톱니바퀴, 시험관 같은 것들이 그려져 있었다.
여자와 남자를 한번씩 해보고 나니 “이과 사람”은
[임소연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이과 여자와 퀀텀 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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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ller Coaster> (청하, 2018)
청하의 <Roller Coaster>를 들을 때 나는 언제나 B를 떠올린다.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에 만난 B는 PC방 야간 아르바이트 동료였다. 빈자리가 도통 나질 않는 대학가 인기 PC방에서 나는 청소와 고객 응대를 맡았고, B는 간편식품을 조리하고 배달하는 것을 담당했다. 기억 속 B는 항상 바쁜 사람이었다. 일찍 졸업하고 싶어서 계절학기를 듣는다던 그는 편의점, PC방, 교습학원 보조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며 친구들의 펑크난 아르바이트를 메꿔주는 만능 대타로도 활약했다.
그래서 B의 무단결근은 큰 사건이었다. PC방 사장은 B가 일하는 1년 동안 단 한번도 연락 없이 잠수를 탄 적이 없었다고 몇 차례나 반복해서 말했다. 전화를 받지 않는 B가 걱정되는 건 사장도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기억을 더듬어 일전에 딱 한번 가본 적 있는 B의 집을 찾아갔다. B의 이름을 부르면서 초인종이 없는 쇠문을 노크했
[복길의 슬픔의 케이팝 파티] 넌 Roller Coa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