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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 끈이 자주 풀린다. 잘 꾸미고 다니는 편도 아니지만 늘어진 신발 끈을 치렁치렁 끌고 다니는 행색마저 못 본 척 지나가긴 쉽지 않나 보다. 끈 제대로 묶으라는 말을 하루에도 몇번씩 듣는다.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이게 꽤 재밌다. “너 신발 끈 풀렸어”라는 짧은 말에도 미세하게 색과 두께가 다른 감정이 실린다. 넘어질까 불안한지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안쓰러움과 걱정이 묻어나는 목소리도 있다. 간혹 답답함 섞인 푸념이 들려올 땐 괜히 내가 미안해진다. 물론 세상은 내 풀린 신발 끈 따위는 아무 신경 쓰지 않고 바쁘게 돌아간다. 그래서일까. 잠시 쭈그려 앉아 주변을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새삼 감사하다. 풀린 신발 끈이 아니었으면 굳이 하지 않았을 생각, 대면하지 않았을 감정들이 그제야 하나씩 눈에 들어온다.
명절이 되면 으레 하는 일들이 있다. 주간지 입장에선 그중 하나가 합본호 제작이다. 2주치 분량을 만드는 큰 이벤트인 만큼 적재적소 어울릴 아이템 찾는 데
[송경원 편집장] 신발 끈을 고쳐 매며 생각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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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석은 언제 박차고 나갈까요?” 2023년 3월 국민의힘 전당대회 즈음 한 방송국 PD가 물었다. “아직은 있고 싶은가 봅니다. 영부인 못 건드리는 거 보세요.” 2022년 9월 도이치모터스 사건의 진상이 더 불거지면서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때 한 발언이 반박되었지만,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는 ‘김건희’라는 금은 차마 밟지 못하고 시간을 보냈다(“저도 살려고 그랬던 겁니다”?). 탈당을 예고할 무렵에야 야권의 김건희 특검론에 편승했는데, 그때도 한동훈 당시 법무부 장관에게 “천사”, “군계일학” 따위의 상찬을 늘어놨다. 고발사주 사건 전날 손준성 검사에게 보낸 이미지 60여장이 뭔지 설명하지 못하는 천사, 딸이 부당하게 만든 스펙을 대입에서 쓰지 않았음을 입증 못하는 일학이라. 그는 대통령을 바로잡으려다 밀려난 게 아니다. 자신이 밀려나는 수준에 맞춰 명분을 갖다붙였을 뿐. 그들이 한창 쿵짝이 잘 맞던 시절은 어땠나.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윤석열), “20대 여성은 어젠다
[디스토피아로부터] 내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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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열자마자 무언가 잘못됐다고 느꼈다. 선배는 물론이고 동료 에디터 들. 심지어 항상 자기 자리에만 앉아 있던 편집장까지 모두 원탁에 둘러서 있었기 때문이다. 시끌벅적한 소리는 내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들은 모든 대화를 멈추고 가만히 나를 바라봤다. 마치 녹색 기사를 처음 대면한 원탁의 기사들처럼. 선배만이 눈을 몇번 깜빡이며 어리바리하지 말고 빨리 자리에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걸어가면서도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침묵은 깨지지 않는다. 겨우겨우 선배 옆자리에 도착하고 주변을 향해 죄송하다는 의미의 묵례를 몇번 하고 나서야 정적이 깨진다.
편집장은 ‘맛과 요리’ 부서에 어울리는 풍채를 지니고 있지만 둔하거나 무거워 보인다기보다는 듬직해 보인다는 표현이 좀더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는 먹는 것에도 진심이고, 먹는 것에 대해 쓰는 것도 진심처럼 보였다. 에디터들이 가져오는 기사 하나하나 주제를 다시 잡아주고, 표현을 고쳐주고, 내용을
[김민성의 시네마 디스패치] 맛과 요리 섹션: 기획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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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쓰다’라는 표현을 좋아한다. 대체로 애정을 가진 어떤 것에 집중하고 애쓰는 상태를 드러낼 때 꺼내는 말인데 긍정보단 부정적인 상황에 곧잘 쓰인다. “괜찮아, 마음 쓰지 마.”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주름 사이 걱정거리를 새기고 다니는 내 꼴이 안쓰러워 보였는지, 술 한잔에 사연을 주워 삼키더니 서둘러 대화를 끝냈다. 굳이 대화를 더 이어가지 못한 건 ‘마음 쓰지 말라’는 친구의 당부에 담긴 배려를 알기 때문이다… 라고 멋지게 말하고 싶지만 실은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도 없어서다. 마음은 사용하면 닳아 사라지는 소모품일까. 정해진 총량을 넘어가니 여유도 바닥난다. 미안하면서도 차마 마음을 나눌 기력이 없다.
사실 ‘마음을 쓴다’는 표현보다는 ‘마음이 쓰인다’는 표현이 더 와닿는다. 때론 의지 바깥에서 작동하는 것들이 우리를 있어야 할 자리로 이끌기도 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박박 긁어도 더 남은 게 없었던 마음 한구석에 무언가 샘솟는 걸 느낀다. 친구에 대한 미안함인
[송경원 편집장] 마음이 쓰여, 마음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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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어린이들에게는 명함만 한 종이에 내 이름을 써서 준다. 어린이에게도 종이에 이름과 좋아하는 동물을 써달라고 한다. 강아지와 고양이가 단연 인기이지만, 다양한 동물이 등장한다. 호랑이, 도마뱀, 토끼, 코알라, 장수풍뎅이, 물고기…. 그리고 유기체. 유기체? “저는 과학을 좋아하는데 동물도 과학이라서 좋고, 동물은 모두 유기체니까요.”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어린이가 한창 유기체 공부 중인 것만은 알 수 있다.
누군가 특정 용어를 유난히 자주 사용한다면 높은 확률로 그 말을 최근에 배운 거라는 농담이 있다. 나는 거기에 웃지 못한다.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린이도 아닌데, 새로운 개념을 알게 되거나 지식을 얻으면 호시탐탐 그걸 티 내려 한다. 근래에는 ‘포스트휴머니즘’, ‘트랜스휴머니즘’ 같은 말을 신이 나서 자주 썼다. 그래도 글로는 쓰지 않는다. 글로 쓰면 수준이 금방 드러난다는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그조차도 몰랐던 청소년 시절에는 ‘패러다임’을
[김소영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새로운 낱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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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에 들어가 토끼를 잡는 법’에 관한 재미난 만평이 있다. 4시간의 수색을 마치고 나온 CIA는 “모든 정보원들이 수풀 하나하나 돌 구석까지 샅샅이 정밀수색한 결과 토끼는 이곳에 존재하지 않습니다”고 결론짓는다. FBI는 24시간이 지난 뒤 “토끼는 도망쳤습니다. 하지만 멀리 가지 못했을 겁니다”라고 발표한다. 마지막으로 KGB는 20분 만에 만신창이가 된 곰 한 마리를 끌고 온다. 곰은 자백한다. “저는 토끼입니다. 저희 부모님도 토끼입니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신작 <노 베어스>를 보다가 문득 이 웃기고 섬뜩한 만화가 떠올랐다. 때론 조금 떨어져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구 소련 수사 기관의 무능과 부조리를 조롱하는 이 4컷 만화를 지금 다시 보니 공포를 동력 삼아 작동하는 권력의 설계도를 마주하는 기분이다.
시간은 선형적으로 흐르는 것 같지만 때때로 동시적으로 존재한다. 한 사람, 한 집단, 한 국가의 역사는 선형적으로 인식되지만 시선을 대륙, 지구
[송경원 편집장] (이제) 여기엔 곰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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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같은 회사. 나도 그렇지만, 직장을 다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싫어하는 말일 테다. 가족으로만 구성된 회사는 있을 수 있어도, 가족의 화목함을 기대할 만한 회사란 없다. 가족조차도 애초에 화목함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목적이 있는 기업, 특히나 영리를 추구하는 회사는 화목함이 아닌 다른 운영 원리에 기초를 둘 수밖에 없고 그게 훨씬 더 바람직하다. 따라서 가족 같은 회사란 가족보다도 못한 회사의 다른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수십년도 전에 대학이란 곳에 학생이 되어 다닐 때에도, 같은 ‘족’(族)자가 붙는 단어인 민족이란 말이 쓰일 때 거슬린 적이 많았다. 게다가 그 거대하기만 한 민족을 좁디좁은 가족으로 환원하는 어법은 더욱 싫었다. 국토를 어미나 누이의 몸으로 환유하고, 침략자를 그 여성 신체를 유린하는 이민족 남성으로 묘사하는 발언을 들을 때마다 돋아 올랐던 소름. 내가 침략당하는 민족에 속한 남성‘으로서’ 같이 분노해주길 바랐을 것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분노는 오
[정준희의 디스토피아로부터] 그들이 그렇게도 밉고 우스워 보이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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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다. 이야기를 향한 멈출 수 없는 욕망은 <아라비안 나이트>처럼 죽음마저 미룰 정도로 강력하기에, 오래전부터 이야기에 중독된 인류는 ‘다음 이야기’를 발굴할 갖가지 수단을 발명해왔다. 이러한 욕망을 실로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구현한 모델 중 하나가 바로 속편이다. 반복되는 패턴이 주는 안정감 위에 새로움을 더하는 약간의 변주는 모르는 사람 없는 흥행의 기본 패턴이다. 속편은 산업의 규모가 커질수록 실패의 위험을 줄이기 위한 장치로 활용되지만 실은 안정제에 가깝다. 무슨 말이냐면, 실제로 성공할 확률을 높인다기 보단 '이렇게 하면 잘 될 거'라는 심리적 위안에 가까운 경우가 다반사다.
단순히 넘버 링으로 이야기의 생명줄을 이어가던 시대는 지났다. 이른바 ‘세계관’ 모델이 제시된 이후 이야기를 잇고 확장하는 방식은 다채로워졌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보였던 것뿐’이었던 걸까. 안전한 길을 걷겠다고 야심차게 기획된 후속작들이 줄줄이 외면받는 것을 보니 생
[송경원 편집장] 인간의 호기심은 끝이 없고, 이야기는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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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동안 <스트릿 우먼 파이터>를 즐겨봤다. 그전에는 <사이렌: 불의 섬>을 열심히 봤고 <골 때리는 그녀들>도 좋아한다. 공통점은 ‘움직이는 여자들’을 실컷 볼 수 있다는 것. 그 여자들의 몸은 대체로 마르고 여리여리하지 않으며 그들의 움직임은 예쁘고 섹시해 보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이 프로그램들을 보고 나면 해독 주스를 마신 듯 건강해지는 느낌이다.
많은 이들이 미디어에서 여성의 몸이 지나치게 대상화된다는 점을 비판한다. 많은 챗봇이 여성의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고 많은 안드로이드가 여성의 외형으로 만들어져왔듯이 미디어에서 찬사를 받는 많은 몸들은 여성의 것이었다. 챗봇이나 로봇을 남성으로 만들고 미디어에서도 남성의 몸만 재현하자는 말이 아니다. 문제는 미디어가 여성의 몸을 보여준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여성의 ‘어떤 몸’을 보여주는가에 있다. 우리는 여성이 어떤 몸이어야 사랑받는지 알고 있다. 섹시하지만 너무 섹시해서는 안되고 예쁘
[임소연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새해에는, 움직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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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계절의 변화에 둔감했다. 나는 바람이 차가운 초겨울까지 반바지를 입고 외출했고, 걸으면 땀이 나는 늦은 봄에도 두꺼운 스웨터를 입고 다녔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거나 에어컨 없이 살 수 없을 정도가 되어야 ‘여름옷’, ‘겨울옷’을 입었다. 그래서 내 방 옷장엔 언제나 사계절 옷이 함께 걸려 있었다. 엄마는 반팔 티셔츠와 롱패딩이 같은 행거에 걸린 것을 보고 화를 냈고, 동생은 나의 무신경함이 정신적 문제일 수 있다며 상담을 권유했다. “게을러서 그래, 미안해.” 나는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들에게 사과하는 것으로 계절의 변화를 느끼곤 했다.
억울하다. 비록 옷차림 때문에 대충 사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내게도 엄연히 나만의 계절 의식(Ritual)이 있다. 봄에는 두릅을 사서 먹는다. 데쳐서 초장에 찍어 먹고 튀겨서 간장에 찍어 먹었다. 올해는 전에 꽂혀서 두릅전에 도전해보았전. 여름에는 공포영화를 본다. 이번 여름엔 끌리는 영화가 없어서 강태진 작가의 공포 웹툰 <사변괴
[복길의 슬픔의 케이팝 파티] 너를 만난 건 어느 추운 겨울 날, (원타임,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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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번 나가보지도 못하고 기간 종료된 헬스장 문을 겸연쩍게 다시 두드린다. ‘처음은 가볍게’라는 핑계로 운동 같지도 않은 운동을 마치고 시내 나가는 길. 버스에서 괜히 어학원 수강료 한번 검색해본 뒤 마지막으로 서점 한 바퀴. 새해가 되면 연례행사처럼 도는 코스다. 올해는 헬스장보다 건강검진을 먼저 받아봐야 할 것 같고, 어학원 대신 어학 앱을 찾아보는 등 해마다 디테일에 변동은 있지만 본질은 변함없다. 새해에는 달라져야겠다는 각오 절반. 혹시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 절반으로 시작하는, 예정된 배드 엔딩. 꾸준히 실패에도 같은 실수를 적극적으로 반복하는 건 이거라도 해야 내가 덜 모자란 인간이 될 것 같은 불안 때문이다. 연말이 감사와 반성에 젖어드는 과거 시제의 단어라면, 새해는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책임감의 미래 시제에 묶여 있다. 더 나은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의 주술.
오랜만에 서점을 찾았더니 베스트셀러 코너에 온통 쇼펜하우어다. ‘기대가 낮으면 실망도 적다’를
[송경원 편집장] 배드 엔딩, 새드 엔딩, 해피 엔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