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터 데이비드슨 지음 / 정지현 옮김 / 아트북스 펴냄
불이 켜진 창문은 상상의 여지를 남긴다. 무서운 이야기에서는 앞으로 벌어질 참혹한 사건의 전조를 의미하고, 성냥팔이 소녀의 이야기에서는 소녀가 갖지 못한 따뜻한 가족(의 사랑)을 뜻한다. 문화사학자 피터 데이비드슨은 시와 소설, 그림에서 불이 켜진 창문들을 찾아내 읽어내는 작업을 하고 <불이 켜진 창문>을 썼다. 이 책에 나열된 불 켜진 창문들의 풍경과 사연은 시대와 장소, 정서를 함축하는데, 피터 데이비드슨의 문장은 그 고요한 밤의 창문들 앞을 서성이는 느낌을 선사한다. 세기말의 여름 저녁 풍경을 보여주는 앙리 르 시다네르의 <달콤한 밤>은 1897년 작품으로 시다네르는 프루스트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찬사한 작가다. “발아래 땅은 그림으로 곧장 비치는 달빛에 흠뻑 젖었다. 나무 그림자는 스케치로 표현되었다. 무엇보다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의해 따뜻함과 고요함이 잠깐 멈춘 느낌이 강
[CULTURE BOOK] ‘불이 켜진 창문’
-
두 차례 진행된 민희진 어도어 대표의 기자회견은 사건이나 논쟁의 단계를 뛰어넘어 하나의 콘텐츠가 되었다. 특히 두 번의 기자회견은 공통적으로 시각 정보를 발판 삼아 화제성을 이어갔다. 여성 대표가 주도하는 기자회견 자체가 워낙 드문 장면이었거니와 보편적으로 예측 가능한 공식 석상 복장과 달리 초록색, 노란색 등 유채색의 캐주얼한 의상은 기존 ‘공식’을 무시한 정치적인 메시지가 되었다. 등장인물의 역동적인 표정은 또 어떤가. 어른의 책임을 말하며 오열하다가도 “죽긴 내가 왜 죽어” 하고 금세 얼굴을 갈아 끼우고, 기자의 면박에 “저를 혼내실 건 아닌 것 같아요”라고 명확한 목소리로 선을 긋는 장면은 그 어떤 드라마에서보다 입체적이다. 그런 민희진 대표를 향한 2030 여성들의 지지에서는 기시감이 느껴진다. 일종의 콘텐츠적 데자뷔랄까. <마녀의 법정> 마이듬(려원),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 차현(이다희), <런 온> 서단아(수영) 등 일을 잘하기
[이자연의 TVIEW] 콘텐츠로서의 민희진 기자회견
-
송경원 지음 바다출판사 펴냄
글쓰기는 쓰고자 한 글과 쓴 글을 가능한 한 닮게 만들려는 노동이다. 여기에는 필연적인 틈새가 발생하기 마련인데, 대체로 머릿속의 이상을 눈앞의 현실이 따라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상상의 지평선을 훌쩍 넘기는 무언가에 당도하기도 한다. 2009년 <씨네21> 영화평론상을 수상하며 영화평론가로 데뷔한 뒤 2012년부터 <씨네21> 기자로 활동하다 2023년에 편집장이 된 송경원의 첫 평론집 <얼룩이 번져 영화가 되었습니다>가 출간됐다. 기자와 평론가 사이에서 그가 찾아낸 영화 글쓰기의 해법은 어떤 것이었는지 만날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그의 글을 오랫동안 읽어온 독자로서 첨언하자면, 만화, 애니메이션(<바람이 분다> <3월의 라이온> <환상의 마로나>)과 게임에 대해서라면 그의 분석은 언제나 좋은 읽을거리가 된다. 이 책에 실린 글 중에서 <덩케르크> <1917>
[CULTURE BOOK] ‘얼룩이 번져 영화가 되었습니다’
-
초능력이 대물림되는 복씨 집안의 아들 복귀주(장기용)는 과거로 회귀하는 능력을 가졌지만 행복했던 순간으로만 돌아갈 수 있을 뿐 과거를 바꿀 수는 없다. “나만 행복한 시간은 진짜 행복이 아니란 걸” 알게 된 귀주는 타인을 돕기 위해 소방관이 된다. 그러나 딸 이나(박소이)가 태어나던 날, 자신과 업무를 바꿔준 선배가 학교에 난 화재 현장에서 순직한다. 선배뿐 아니라 “내가 부모가 되던 날 수십명의 부모가 아이를 잃은” 그날 이후 귀주는 선배를 살리기 위해 끊임없이 과거로 돌아간다. 그러는 사이 그의 ‘현재’는 망가지고, 아내마저 교통사고로 잃는다. 그 사건으로 귀주는 세상과 단절한 채 살게 된다. 귀주의 우울증을 시작으로 엄마 복만흠(고두심)은 불면증에 걸려 예지몽을 상실하고, 누나 복동희(수현)는 고도비만 때문에 비행술을 쓸 수 없게 된다. 즉 우울증, 불면증, 고도비만이라는 ‘현대인의 질병’에 걸려 초능력을 잃게 된 것이다. 이런 복씨 집안의 재산을 노리고 ‘사기꾼’ 도다해(천우
[오수경의 TVIEW] ‘히어로는 아닙니다만’
-
-
안미옥 지음 / 창비 펴냄
시인 안미옥의 첫 번째 산문집. 아들 ‘나무’가 태어나 5살이 될 때까지의 시간을 안미옥의 시간과 나란히 두고 기록한 글인데, 성장하는 아이와 함께 익숙한 언어를 낯설게 배우고, 언제까지고 낯설 세상을 즐겁게 익히는 기록이기도 하다. “재미있고 신기한 것은 알수록 재미있고, 두렵고 무서운 것은 알수록 이해가 되어 무섭지 않게 된다. 요즘 나도 내게서 신기하고 무서운 것을 계속해서 발견해나가는 중이다. 나무와 함께하면서, 잊었던 어린 나의 세계를 한번 더 살아보는 것 같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일들은 마음에 오래 남는다고 했던 <여름잠>을 떠올리게 하는 문장 사이로, 우는 사람에겐 어느 것이 자신의 것인지 모르게 더 큰 눈물을 선물하고 싶다고 했던 <여름 끝물>을 연상시키는 시어 사이로, 삶의 여름을 향해 쑥쑥 커가는 아이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풍경은 삶이 되어 구체성을 띤다. 안미옥은 구름을 보며, 비가 올 것처럼 흐리다가
씨네21 추천도서 - <조금 더 사랑하는 쪽으로>
-
이병률 지음 / 문학과지성사 펴냄
이병률의 새 시집이 나왔다. 더이상 설명이 필요 없겠지만…. 이번 시집은 ‘두 사람’으로 시작한다. 문을 여는 시 <어떤 그림>은 미술관의 두 사람이 이 방과 저 방을 지키는 일을 한다는 문장으로 독자를 끌어들인다. “두 사람은 각자 담당하는 공간이 있었지만/ 두 사람은 꼭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나란히 공간을 옮겨 다녔다// 그림이 그 두 사람을 졸졸 따라다녔다.” 그리고 다음 시(<공원 닫는 시간>)에서 (아마도 같은, 아마도 다른) 이 두 사람은 같은 길을 가는 중이다. “각자 태어난 두 나무가 서로 몸을 끌어 가까워져/ 담을 만들고 물을 흐르게 하고/ 서로에게서 솟아난 영감은 서로 엉키고/ 누구도 그들의 엉킴을 풀지 못하는 것/ 그것이 인생의 전모라지만.”
사랑의 말을 듣고 싶을 때 이병률을 찾는 이들을, 이번 시집은 실망시키지 않는다. 코로나19의 풍경을 말할 때도 그렇다. 중국에서 봉쇄당한 경험, 한국에서
씨네21 추천도서 -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
-
김유태 지음 / 글항아리 펴냄
책이 인생을 바꿀 수 있을까?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바꿀 수 있다고 증언하는 책이 나왔다. 김유태의 <나쁜 책>은 이른바 ‘금서’로 취급되어 출간이 금지되거나 작가가 고발당하거나 심지어 작가의 죽음으로까지 이어진 책들을 다룬다. 금서는 왜 금지당하는가? 사회의, 나아가 국가의 치부를 들춰내고 고발하기 때문이다. 그 거침없는 당당함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지식을, 깨달음을, 해방을 준다. 이 책들은 작가의 수난 시대로 이어지는가 하면 베스트셀러의 영예를 안기기도 한다. 이 책 자체가 매력적인 작품들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을 하는 것은 물론이다. 저자 김유태는 각 책의 내용을 소개하면서, 책에 얽힌 우여곡절을 상세히 전한다. 하나같이 읽고 싶게 만들면서.
박찬욱 감독이 시리즈로 만든 <동조자>는 베트남전쟁을 소재로 하는 이야기임에도 베트남에서 금서다. 공산당 모독이 반복해서 서술되는 데다 베트남의 국부로 통하는 호찌민을 직접 비판한
씨네21 추천도서 - <나쁜 책>
-
미쓰다 신조 지음 / 민경욱 옮김 / 비채 펴냄
호러와 미스터리를 결합한 독특한 분위기의 소설. <검은 얼굴의 여우> <하얀 마물의 탑>에서 이어지는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의 세 번째 책이다. 전후 일본 사회를 충실히 담아내는 역사물로서의 매력과 초현실적인 공포를 느끼게 하는 사건의 연쇄, 그리고 이성으로 차근차근 짚어가는 사건풀이가 두루 재미를 준다. 시간순으로는 <검은 얼굴의 여우> 이후의 사건이며, <붉은 옷의 어둠> 이후에 <하얀 마물의 탑>의 시간으로 진입한다.
시리즈에서 명탐정 역할을 하는 인물은 모토로이 하야타. 탄광에서 검은 얼굴의 여우로 불리는 괴기와 밀실 살인을 해결한 그는 만주 건국대학에서 만난 동창 구마가이 신이치에게서l 연락을 받는다. 도쿄에 와서 이상한 사건을 해결해주었으면 하는 요청이다. ‘붉은 미로’라 불리는 비좁은 미로 같은 암시장에서 여성들을 뒤쫓는 ‘붉은 옷’이라 정체불명의 괴인에 대한
씨네21 추천도서 - <붉은 옷의 어둠 >
-
붉은 옷의 어둠 - 미쓰다 신조 지음
나쁜 책 - 김유태 지음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한 적 - 이병률 지음
조금 더 사랑하는 쪽으로 - 안미옥 지음
씨네21 추천도서 - <씨네21>이 추천하는 5월의 책
-
꼭 모든 인터뷰나 토크쇼가 진지한 주제를 다뤄야 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허심탄회한 웃음이 높아질수록 숨겨온 속마음을 더 쉽게 고백할 수 있고 그로부터 완화된 분위기가 출연자와 시청자 모두를 편안하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피식대학에서 제작하는 <피식쇼>는 지나치게 메시지 중심적이던 과거 토크쇼로부터 차별점을 갖는다. 방탄소년단 RM에게 “메신저로 친구 생일 선물을 보낼 때 얼마짜리를 보내”냐는 질문이나 손흥민에게 “(별명이 ‘소농민’이라는 점에 착안해) 농부가 된다면 어떤 작물을 키우고 싶냐”는 질문은 예상치 못한 공략으로 허허실실 웃음을 터뜨리게 한다. 권위나 위계와는 거리가 먼 분위기. <피식쇼>는 그것을 지향한다. 한국어와 영어를 뒤섞어 진행하는 독특한 방식도 많은 구독자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You know, I have 가오”(알잖아, 나도 가오 있는 거), “What time was 가장 늦게 일어난 시간”(가장 늦게 일어난 때가 언제야?) 등
[이자연의 TVIEW] ‘피식쇼’
-
장 피에르 다르덴, 뤽 다르덴, 미셸 시망 지음 / 김호영 옮김 / 마음산책 펴냄
“켄 로치보다 덜 교조적이고 미하엘 하네케보다 덜 이론적이며 마이크 리보다 덜 일화적인 이들의 영화는 진실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정신주의가 결합된 영화적 전통을 이어간다.” 프랑스의 영화사가인 뱅상 로위는 <다르덴 형제>의 서문에서 다르덴 형제의 영화를 이렇게 말했다. 관객을 극도로 자극하면서도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그들의 영화 세계에 대해 10년간 인터뷰를 지속해 이 책을 엮은 사람은 <포지티프>의 편집장을 지낸 영화평론가 미셸 시망이다. <더 차일드> <로나의 침묵> <자전거 탄 소년> <내일을 위한 시간>에 대한 긴 대화가 차례로 등장하고, ‘영화수업-응시하는 카메라’라는 제목으로 실린 글에서는 프랑스의 한 대학에서 열린 행사에서 오간 이야기가 실렸다. 어쨌거나 이 인터뷰집은 미셸 시망의 결코 짧지 않은 질문들도 새겨읽
[CULTURE BOOK] 다르덴 형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