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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정순’, 중년 여성 재현의 사각지대를 밝히는 불꽃같은 이름

중년 여성 정순(김금순)은 남편을 일찍 떠나보내고 지방의 한 식품 공장 노동자로 일하며 살아가고 있다. 허구한 날 아들뻘의 작업반장 도윤(김최용준)에게 무시당하기 일쑤지만 정순은 늘 겪는 일이라며 넉살 좋게 웃어넘긴다. 정순은 공장에 새로 들어온 중년 남성 영수(조현우)와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영수가 묵고 있는 모텔 달방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던 두 사람은 차를 빌려 출근 전 훌쩍 바람을 쐬고 오는 등 소소한 연애를 즐긴다. 그러던 어느 날, 영수가 찍은 정순의 영상이 사람들 사이로 퍼져나간다.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수많은 이들이 그 영상을 주고받는다. 정순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충격에 빠지고, 정순의 딸 유진(윤금선아)은 분노하여 경찰서를 찾아간다.정지혜 감독의 장편 데뷔작 <정순>은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온 디지털성범죄와 중년 여성 노동자의 삶을 겹쳐 보인다. ‘정순’이라는 이름보다는 ‘엄마’, ‘이모’, ‘아줌마’로 불리는 어느 중년 여성의 평범한 일상은 디지털성범죄로 송두리째 흔들린다. 세상이 흔히 피해자로 떠올릴 법한 젊은 세대가 아닌, 결혼을 앞둔 성인 딸을 두고 있는 중년 여성을 피해자로 디지털성범죄를 조명하는 영화는 우리 사회의 에이지즘(노인 차별)과 관련한 또 다른 화두를 던진다. 이에 가장 고통받는 건 당연하게도 정순이다. 범죄 사실을 알자마자 경찰서로 달려간 유진 곁에서 정순은 점점 몸을 움츠린다.

<정순>은 서울독립영화제 2022, 제24회 부산독립영화제, 제17회 로마국제영화제 등에 초청되고, 특히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한국경쟁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신예 정지혜 감독은 세심하고도 사려 깊은 연출을 통해 중년 여성 노동자의 삶의 단면과 디지털성범죄 피해자의 분투를 그려낸다. 우리 사회 소외된 계층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를 소재로 하는 여타 영화들이 의도치 않게 저지르는 무심한 실수나 의도적으로 꾀하는 자극적 묘사 등을 <정순>에선 찾아보기 힘들다. 정순의 성범죄 피해를 반복 묘사해야 할 때 ‘노래’라는 간접적 방법을 활용한 점이 그 예다. 그 노래는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후반부 장면에서 다면적 감정을 환기하는 요소가 된다. 엄마도, 이모도, 아줌마도 아닌 ‘정순’이 피해자다움의 신화를 난타하는 해당 장면은 가해자가 만들고, 세상이 뒤집어씌우고, 공권력이 묵인한 올가미를 벗어나고자 하는 애처롭고도 강인한 몸부림이다.

정지혜 감독이 만들어낸 영화 세계를 보다 풍요롭게 하는 것은 배우들이다. 배우 김금순의 활약이 무엇보다 돋보인다. 초반부의 생활감 넘치는 장면들부터 앞서 언급한 후반부 장면까지 영화를 빈틈없이 채워넣는다. 정순의 딸 유진 역의 윤금선아 또한 김금순과의 뛰어난 호흡으로 영화의 완성도를 높였다. 조현우, 김최용준 등 남성 배우들 또한 각자 주어진 역할을 능숙하게 소화한다.

“돈 주면 다 된 거지.”

사건 이후 공장에 오랜만에 출근한 정순은 작업반장 도윤을 포함해 자신을 보고 놀라거나 불편해하는 이들을 맞닥뜨린다. 영상을 유포함으로써 범죄 행위에 가담한 이들, 가해자보다 피해자를 책망하는 이들을 향해 던지는 정순의 나직한 한마디는 영화는 물론이고 우리 사회의 폐부를 꿰뚫는다.

CHECK POINT

<69세> 감독 임선애, 2019

중·노년 여성으로서 성범죄와 에이지즘의 피해자라는 점에서 <69세>의 효정은 정순과 닮았다. 두 여성감독의 섬세한 연출을 바탕으로 배우 예수정과 김금순의 뛰어난 연기가 극을 이끈다는 점 또한 두 영화의 공통점이다. 각 영화의 후반부, 효정과 정순이 보여주는 용기와 결단을 나란히 놓아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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