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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제국주의의 문화적 코드, <스타 워즈 1:보이지 않는 위험>
심영섭(평론가) 1999-07-13

어린이가 그린 제국주의

1. 들어가는 말

평론가들은 칭찬하지만 관객들은 잘 들지 않는 영화가 있다. 반대로 평론가들은 혹평을 해도 관객이 극장 앞에 몰리는 영화도 있다. <스타워즈 에피소드1: 보이지 않는 위험>(이하 <보이지 않는 위험>)이 바로 그런 영화다. 평론가와 <스타워즈>의 관계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갖는 오해가 있다. <스타워즈>가 처음부터 평론가들로부터 “우스운 영화” 취급을 받았다는 통념이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스타워즈>가 점점 평론가들에게 외면을 당한 것은 <스타워즈4> 이후 <스타워즈>가 잘 만든 SF영화를 넘어서 미국의 건국 신화로 자신을 격상시키면서부터였다.

아무튼 미국인들이 <스타워즈>에 대해 갖는 애정의 정도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고, 개봉 9일 만에 서울에서도 관객 40만명을 불러모으는 괴력을 보이고 있다. 이는 시장규모를 감안하건데 미국 못지 않은 열기다. 도대체 <보이지 않는 위험>은 무엇 때문에 이제까지 <스타워즈>에 시무룩했던 대한민국 사람들까지 극장 앞으로 불러들이는 포스를 발휘하는 것일까.

<스타워즈>는 어차피 어른이 되어서도 동심을 잃지 않는, 어른 아이들을 위한 영화이다. <스타워즈>는 영화의 완성도나 질을 떠나서 단지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으로 나뉠 뿐이다. 오히려 <스타워즈>에서 가장 감동적인 부분은 <스타워즈>의 철저한 상업주의이다. <스타워즈>는 그 자체가 영화산업이자 거대한 문화적 이벤트이며 전세계적으로 번영하고 있는 가장 비싼 컬트영화이다. 치밀하게 계산된 전략으로 비밀주의를 고수하고, 그 비밀주의 자체가 화제를 몰고 오는 스타워즈 전략은 <제국의 역습> 이후 변함이 없다. 이같은 비밀주의는 <스타워즈>를 하나의 종교로 만들어놓았고, 관객들에게 이 비밀결사에 들어가느냐 마느냐 하는 선택의 여지를 남겨놓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펼쳐질 <스타워즈>에 대한 비판도, 영화적 성과보다는 영화 이면의 ‘안으로부터의 비판’이 돼야 할 것 같다. 특히 <보이지 않는 위험>에서조차 변하지 않은 몇몇의 허구와 진실, 어쩌면 스타워즈 팬으로서는 눈감아 줄 수 있지만 평론하는 사람으로서는 짚고 넘어가야만 하는 변함없는 스타워즈의 결함으로 말이다.

2. 정서적 핍진성이 결여된 영화, <스타워즈>

한마디로 <보이지 않는 위험>은 여러면에서 이전의 <스타워즈> 시리즈에 비해 가장 함량 미달이다. <스타워즈1>은 시리즈 중 이야기 구조가 가장 허술하게 변모한 일종의 괴변이다. 일단 <보이지 않는 위험>은 정서적으로 끌어 잡아당기는 면이 없다. 일례로 꼬마 아나킨 스카이워커가 노예인 자신의 엄마와 이별하는 장면에서 분명히 우리는 어떤 서글픔을 느껴야 하는데도 이 장면의 잔향은 다른 사건들 사이로 밋밋하게 사라져버린다. 다른 말로 하면, <스타워즈>는 상상 속의 세계를 시각적으로 창조하는 “시각적 핍진성”에는 성공했지만, 그 안에서 살아 숨쉬고 행동하는 인물들의 감정과 정서에 관객이 동화되도록 만드는 “정서적 핍진성”에는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사실 시각적 핍진성에 바쳐진 조지 루카스의 공로는 놀랍도록 섬세하다. 아미달라 여왕이 통치하는 나부 행성은 “어디서 많이 본 듯하지만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모습”이고, 나부 행성의 물속에 사는 겅간족의 탈것과 무기도 세심히 디자인돼 있다. 하지만 관객은 그 모든 캐릭터들의 움직임을 그냥 구경꾼으로서만 쳐다볼 뿐이다. 조역에 불과한 겅간족이나 자자 빙크스는 그렇다 치더라도 콰이곤 진이나 아나킨 스카이워커에게조차도 감정이입이 안 된다.

<스타워즈>는 알다시피 운명론적인 이야기이다. 아나킨 스카이워커는 뛰어난 능력을 지닌 인간이지만 숙명에 의해 그 힘을 선에 바치지 않고 악인으로 변해간다. 아버지 못지 않은 능력을 지닌 그의 아들 루크 스카이워커는 다행히 정의의 편에 서지만 이번엔 아버지를 죽여야 하는 살부(殺父)의 숙명에 처하게 된다. 전편의 <스타워즈>는 이같은 운명론의 신화가 갖는 어떤 비장미가 있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위험>의 아나킨 스카이워커가 스승인 콰이곤 진을 만나고, 끝내는 어머니를 떠나 새로운 길을 가게 되는 과정은 전혀 숙명의 향기를 풍기지 못한다. 대체 아나킨의 어머니 쉬미 스카이워커는 아들이 생명을 잃을지도 모를 위험한 포드레이스에 참가하는 것을 왜그리 맥없이 허락하는 것일까? 이 부분에서 관객은 쉬미가 영웅의 어머니이니까라는 납득하기 힘든 체념을 전제로 다음 이야기로 옮겨가야 아쉽지 않게 된다. 그 못지 않게 허술한 부분은 집을 떠나는 아나킨의 감정이다. 이제 아홉살밖에 안 된 이 아이는 제다이가 되는 것 외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는 그냥 몇 마디로 자신의 슬픔을 ‘서술’한 후, 배낭을 메고 낮선 사람을 따라 나선다. 캐릭터가 선명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캐스팅의 문제와도 관련있어 보인다. 겅간족과의 동맹이 체결되자 싱긋 웃으며 머리를 긁는 이원 맥그리거는 스스로를 연기했지 오비완이 되지 못했고, 아나킨 스카이워커 역의 제이크 로이드 역시 전자오락을 좋아할 것 같은 장난꾸러기 어린이지 엄청난 능력을 간직하고 숙명을 맞이할 영웅의 전조는 도무지 느껴지지 않는다. 요컨대 캐릭터가 스토리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토리에 캐릭터가 따라오는 모양새가 되고 만 <스타워즈>의 이야기 구조는 설득력과 비장미 모두에서 점수를 잃고 있다.

3. 창의성이 결핍된 영화, <스타워즈>

<스타워즈>에서 또 하나의 논란거리는 <스타워즈>가 과연 창의적인가 하는 것이다. <스타워즈>는 매회마다 특별한 모습의 희귀한 우주인들과 눈이 휘둥그레질만한 배경들을 자랑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상상력은 볼 것에 한한 이야기이다. <스타워즈>의 제다이가 사실은 일본 사무라이를 닮았다는 것, 그들의 포스가 동양의 기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보이지 않는 위험>에서 이러한 루카스의 일본 취향은 극에 달한 것 같다. 아미달라 여왕의 복장은 동양의 왕후들의 복장을 연상케 하고 일본 사무라이들의 옷을 그대로 갖다 입힌 다스몰의 의상, 그리고 칼 대신 라이트 세이버로 싸우는 콰이곤 진과 다스몰의 한판 대결은 영락없는 사무라이 영화의 한 장면이다.

여기에 덧붙여 아나킨 스카이워커의 탄생 비화는 아무래도 루크 스카이워커의 전철을 그대로 밟은 것 같은 복제의 예감이 들게 한다. 예전 시리즈에서도 루크 스카이워커의 탄생 비화는 <스타워즈>의 핵심이었다. 루크 역시 <새로운 희망>에서 처음 그 태생이 신비로운 수수께끼의 인물이었고, 그후 <제국의 역습>에서는 다스 베이더가 아버지임이 밝혀져 관객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물론 <제다이의 귀환>에서 레아와의 혈연성으로 그 수수께끼가 완전히 풀렸지만. 이러한 공식대로 <보이지 않는 위험>은 아나킨 스카이워커의 탄생 비화를 슬쩍 흘려놓는다. 마치 이전 <스타워즈> 삼부작이 위기의 지구를 구원하는 영웅의 신약적인 모험담이라면, 새로운 <보이지 않는 위험>은 노예의 땅에서 영웅을 해방시키는 모세나 벤허류의 구약적 이야기 구조를 표방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아나킨 스카이워커의 탄생의 장엄함은 자자 빙크스 같은 유머스런 인물이나, 빈약한 이야기구조와 무게중심이 전혀 맞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위험>은 소소한 영화적 재미를 위해 자신의 신화적 장엄함을 탈색시켜 버린다. 아무리 봐도 R2D2 정도의 로봇은 애교였지만, 자자 빙크스나 겅간족의 보스 나스 같은 인물은 <스타워즈>의 격을 떨어뜨릴 뿐이다. 결국 <보이지 않는 위험>은 이전 <스타워즈> 삼부작의 도돌이표, 그것도 장엄함과 비장미가 씻겨 내려간 허술한 동화로 전락해버린 도돌이표가 되고 말았다.

4. 미국적 이데올로기의 세계적 전파

결국 <스타워즈>의 가장 밑면에 숨겨진 이야기는 무엇인가? 이것은 진정 <스타워즈>가 미국인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는 파워의 핵심이자, 상업적 포스의 실체이기도 하다. 사실 <스타워즈>는 우주로 이야기를 넓혀놓은 미국의 세계 정복담일 뿐이다. 그것은 마치 자신의 공격심을 두려워하는 꼬마 환자가 바이킹을 그린 후, 온갖 재미있는 이야기를 갖다 붙이는 것과 동일한 심리적 기제이다. 우주는 세계이고 괴물은 타자이다. 가장 용감하게 지구를 구해내는 사람들은 여전히 할리우드 식의 백인 남자들이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자자 빙크스 같은 인물이다. 자자는 말하자면 <뮬란>의 엉터리 용 무슈, 또는 디즈니 영화에서 숱하게 봤던 어릿광대에 다름 아니다. 여기에 자자의 말투는 <러시 아워>의 크리스 터커와 에디 머피를 합쳐놓은 어릿광대의 종합판이다. 심지어 자자는 어엿한 생명체임에도 불구하고 로봇인 C3PO에게까지 “저 친구는 어딘가 맛이 간 것 같아”라며 조롱받는다. 사실 자자 빙크스는 일종의 변장한 흑인일 뿐이다. 그리고 포드 경주에서 사막에서 총을 쏴대며 경주를 방해하는 투스켄 부족은 용감한 카우보이들에게 화살을 쏘아대는 인디언에 다름 아니다.

여기에 아미달라 여왕의 나부 행성과 겅간족의 관계는 어떠한가? 겅간족의 보스 나스는 아마달라 여왕의 읍소 때문에 자칫하면 종족 전체를 절멸시킬 수 있는 무모한 전쟁에 종족을 동원한다. 만일 아나킨이 장난처럼 나부 전투기에 올라 침략군 네이모디언의 지휘함을 폭파시키는 “우연적 필연”이 없었다면 아마 겅간부족은 나부 행성에서 절대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반면 아미달라 여왕이 이끄는 몇명의 결사대는 수많은 겅간을 총알받이로 쓰면서도 별다른 희생없이 승리를 달성한다. 아미달라 여왕은 무릎을 한번 꿇음으로서 백성의 목숨을 지키는 미국적 실용주의의 절정을 보여주었지만, 좌우로 침을 뿌려대는 보스 나스는 스스로의 자존심을 위해 동포를 희생시킬 뻔한 것이다. 마치 미국이 벌여놓은 베트남전쟁에 한국군이 가서 피를 흘리고도 미군과는 다른 피값을 받았듯이 말이다.

애초에 <스타워즈> 3부작은 미국의 건국신화에 대한 찬양이었다. 공화국의 자유를 위협하는 제국에 반기를 혁명의 투쟁은 그대로 영국에 반기를 든 미국의 독립전쟁에 대입되는 것이었다. 기실 아미달라 여왕이나 영국 악센트의 오비완, 의회, 기사, 제국은 모두 영국적 코드들이다. 아름다운 미국 청년 루크 스카이워커는 이들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유와 정의라는 보편성 가치를 체화하는 순진한 민주주의자로서의 성장담이 바로 <스타워즈> 삼부작의 실체이다. 그러나 작금의 <보이지 않는 위험>에 이르러 루카스는 노골적인 시장논리의 수호자로 변신한다. 자유로운 무역을 방해하는 네이모이단들은 자세히 보면 코가 없이 디자인돼 있다. 코는 심리적으로 자존심을 상징한다. 자존심도 밸도 없이 자국의 이익에만 급급한 외계인.

미국이 보는 타국의 이미지란 결국 이런 것인가?

얄궂게도 자국영화를 지키자는 한국의 네이모이단들은 미국과 결사 항전의 태세를 취하고 있다. ‘<스타워즈>니까’란 한마디는 주술적인 힘을 갖지만, 이러한 마술에서 깨어나 주위를 둘러보면 별들의 전쟁은 생각보다 우리 앞에 아주 바싹 다가왔음을 느낄 뿐이다. 그리고 늘 그렇듯 앞으로의 <스타워즈>가 가져다주는 흥행의 절정기, 그 여름의 한복판은 바로 7월4일, 미국의 독립기념일이 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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