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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디스토피아] 그처럼 산다는 것
김규항(출판인) 2000-03-14

내 친구 석구는 용인의 한 시골 교회 목사다. 지난해 어느 날 카트를 밀며 장 보는 아내 뒤를 좇을 때 울린 전화 속엔 15년 만에 듣는 녀석의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몇주 뒤 나는 야트막한 산 중턱에 소박하게 박힌 녀석의 교회를 찾았다. 내가 길을 헤매다 늦게 도착한 탓에 녀석은 이미 설교중이었고 나는 묵상을 하고 자리에 앉았다. 광고 시간에 녀석은 나를 불러일으켜 여러분 저의 귀한 옛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하고 소개했다. 교인들의 평화롭고 따뜻한 박수소리 때문이었을까. 녀석의 소개말이 내 귀엔 여러분 여기 탕자가 돌아왔습니다, 하고 들렸다. 탕자는 녀석의 사는 모습에 안도했다. 녀석은 15년을 하루같이 천천히 예수에게 다가가고 있다.

내가 한신에 입학했을 때 녀석은 신입생을 환영하러 나온 2학년들 가운데 하나였다. 녀석은 한신이란 학교가 있는지조차 모른 채 입학한 나와는 달리 일찌감치 신학공부를 소망했다. 내가 기독교 신앙의 사회적 역동성을 깨닫고 예수라는 사나이를 인생의 기준으로 삼게 된 데는 녀석의 영향이 컸다. 녀석은 대책 없는 건달에서 엉성한 대학생으로 생활을 전이하고 지리멸렬하던 내게 예수에 대해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제 소망에 대해 조용히 말하곤 했다. 나는 녀석을 따라 한걸음씩 예수에게 다가갔다.

언젠가 나는 신학을 공부하려는 소망을 접은 이유가 교회에 대한 낙심 때문이라고 적었지만 다른, 좀더 큰 이유는 예수처럼 살 자신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예수에 대해 알기 시작했을 때 나는 온몸으로 그를 받아들였지만 그에 대해 좀더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예수를 따라 사는 일의 얼개를 파악하게 되었을 때 나는 거스를 수 없는 절망감에 빠졌다. 검약한 삶을 넘어, 자기 헌신의 기쁨마저 생략한 채 오로지 남을 섬기다가 완전한 고독감 속에 사라져가기엔 내 속엔 내가 너무 많았다.

내가 예수의 삶에서 넘어설 수 없었던 지점은, 그가 보여준 삶의 폭이 인간이 이룬 어떤 선한 그룹에서조차 결국 오해받기 십상이라는 사실이었다. 이를테면 예수는 정치범으로 몰려 죽었지만(당시 로마 식민지령에서 십자가 처형은 민족해방 운동가들에게 사용되었다. 물론 전시 효과 때문이었다) 정치범이 아니었다. 그를 죽이는 일은 로마 식민정권, 유대 괴뢰정권, 유대교 지도자들 같은 압제자들간의 합의였을 뿐 아니라 예수가 자신들의 정치 혹은 영혼의 해방을 이루어 줄 거라 믿고 따르던 제자들과 민중의 합의이기도 했다.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그를 정치 지도자로 혹은 영혼의 지도자로 제각기 받아들였지만 그들이 예수를 좀더 알게 되었을 때 그를 정치 지도자라 여겼던 사람들은 그를 영혼의 지도자라 여겼고 그를 영혼의 지도자라 여겼던 사람들은 그를 정치 지도자라 여기게 되었다. 정치적 해방만을 바라는 사람들에겐 영혼의 해방을 되새기고 영혼의 해방만을 바라는 사람들에겐 정치적 해방을 되새기는 예수의 방식은 사람들의 욕망을 거슬렀다. 완전한 인간 해방이란 그 둘간의 접점 속에 있는 게 분명했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선택한 정치 혹은 영혼의 해방 전선이 상할까 두려워했다.

이제 예수가 죽은 지 2천년이 지나 그는 죽음으로 세상의 모든 죄를 사했다는 모호한 신학론의 박제가 된 채 사람들의 욕망의 담보물이 되었다. 예수를 근거로 한다는 기독교 정신이 인류의 주요 부분을 장악한 지 몇 세기가 지났지만 그가 보여준 완전한 인간 해방의 방법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2천년 전 그가 죽을 때보다 결코 늘지 않았다. 예수를 배신한 자책감도 이젠 바래어가고, 오늘도 천천히 예수에게 다가가는 내 친구를 바라보는 일로나 추레한 삶을 위무하는 내가 할말은 아니겠지만, 아무래도 아무리 둘러봐도 예수의 삶은 대개 헛되었던 것 같다. 예수는 2천년 전 우리에게 해방을 가르쳤지만 우리는 2천년째 예수에게 욕망을 요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