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은 영화 위해 살고 평론가는 영화 덕에 산다?
최근 개봉한 송능한 감독의 두 번째 영화 <세기말>에서 흥미로운 대목 중 하나는 주인공이 평론가를 비판하는 장면이다. 첫 번째 에피소드의 주인공인 시나리오 작가 두섭이 술집에서 만난 평론가에게 일침을 놓는다. “자넨, 자네 마누라한테도 별을 주고 그러나? 마누라 쌍통은 두개반, 젖퉁이는 별 세개… 그러면서 살아? 사랑하는 대상이라면 신중해야지. 영화를 밥그릇으로 보니까 함부로 별을 주고 그러는 거 아냐? 천박하고 파쇼 같은 짓이야. 그런 짓 하지마.” 원조교제하는 졸부, 돈이란 잣대로 모든 걸 판단하는 졸부의 아들, 지적 허세를 부리며 이율배반적 삶을 받아들이는 대학강사 등 99년 서울의 우울한 풍경을 대변하는 인물들 가운데 영화평론가도 한몫을 차지한 것이다. 송능한 감독은 “이게 평론가 전체에 대한 원한으로 오인되지 않기를 바란다. 평론가들이 늘 만드는 사람들에게 충고하는데, 한번쯤은 만드는 사람이 평론가들에게 충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하지만 평론가를 보는 감독의 시선이 곱지 않음은 쉽게 눈치챌 수 있다.
평단에 대한 감독들의 불만이 별점주기에 국한된 건 아니다. “20자평이라면서 20자도 못 지키는 인간들”이라는 <세기말>의 신랄한 어투에는 비평의 권위를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정서도 깔려 있다. 이름을 밝히길 꺼린 한 감독은 “내가 본 영화평 가운데 내게 영향을 주고 자극을 줄 만한 게 없었다. 차라리 일반 관객이 PC통신에 올린 감상문들이 훨씬 낫다”며 “감독 자신이 이건 이거라고 규정짓고 만든 게 아닌데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평자들은 자기 잣대대로 판단해버리고 만다”고 지적한다. 최근 대거 쏟아져나온 젊은 신인 감독들은 비평이 관객 수준을 못 쫓아오고 있다는 말을 자주 한다. 단적인 예로 <주유소 습격사건>처럼 좋은 평을 받지 못한 영화가 서울에서만 100여만명 관객을 동원한 사실에 대해 제대로 분석한 글이 있냐는 것이다. 실제로 <접속> <편지> <약속> <쉬리> <텔미썸딩> 등 흥행영화들 가운데 평단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은 경우는 드물다. 때문에 상업영화 노선이 확고한 감독일수록 흥행결과를 무시하는 비평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낸다. 평론가들의 취향이 대부분 과거 지향적이라는 것도 대표적인 불만사항 중 하나. 영화가 변하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 채 옛날 이야기만 하고 학교 강의와 영화상 심사 같은 보수적인 작업에 안주한다는 비판이다.
“딸기농사나 지어라” vs 12번 항의전화
감독과 평론가 사이의 편치 않은 관계가 새삼스런 얘기는 아니다. 충무로에서 감독과 평론가 사이의 설전은 자주 안줏거리가 됐다. 영화평론가 박평식씨는 92년 <영화소식>에 실은 영화평 때문에 몇주간 피곤한 생활을 했다. 당시 유행하던 벗기기 영화들 중 제목에 ‘산딸기’가 들어간 어떤 영화를 비판하면서 “이런 영화를 만들 바에 농촌에 내려가 딸기농사나 지어라”고 쓴 게 감독을 자극했는데 밤새 12번씩 전화해서 항의하고 다음날 부인 직장에까지 전화를 걸었다. 극단적이긴 해도 악평의 대가로 ‘도끼’니 ‘식칼’이니 하는 험한 말을 들은 평론가가 박평식씨 혼자만은 아니다.
충무로에서 유명한 사건 중 하나는 하길종 감독의 격렬하고 과감한 영화평 때문에 빚어지기도 했다. 데뷔를 하고 나서도 <뿌리깊은 나무>에 영화평을 계속 썼던 하길종 감독은 동료 감독에 대해서도 가차없는 비판을 하곤 했는데 한번은 <병태와 영자> 작업중인 편집실로 하길종 감독의 악평에 단단히 화가 난 한 감독이 찾아왔다. 편집에 열중하던 하길종 감독은 멱살을 잡혔고 주먹다짐을 하고서야 이날 사건이 끝났다.
94년 <한겨레신문> 영화관람석란에 실린 영화평론가 정성일씨의 <너에게 나를 보낸다> 영화평도 감독을 흥분시킨 사례다. “걸개그림을 춘화로 만들고, 광주를 변태적인 성행위가 벌어지는 창 밖의 풍경으로 지켜보고, 운동문건을 역전 도색소설과 뒤섞는 일은 지나칠 정도로 심술궂고 오만하다”는 정성일씨의 평에 대해 장선우 감독은 “광주를 그런 식으로 언급한 것은 용납할 수 없다”며 격노했다.
영화평론가 이정하씨가 96년 <런어웨이> 영화평을 쓴 뒤 절필한 사건은 감독과 평론가의 싸움이 지면에 공개된 드문 사례 중 하나. 당시 <씨네21> 영화평에 이정하씨가 쓴 “왜 영화감독은 자살하지 않는 것일까. 저렇게 가객들은 죽어가고 있는데”라는 문구가 <런어웨이>의 김성수 감독과 가까운 사이인 이현승 감독을 자극했다. 이현승 감독은 이정하씨의 글이 “이제 막 데뷔한 신인 감독을 만신창이로 만드는 무책임한 평”이라고 반박했고 이정하씨는 “나는 영화평론가 이정하가 싫다”며 평론을 그만두고 말았다.
최근에 이런 수준까지 불거진 사건은 없지만 <처녀들의 저녁식사>의 임상수 감독은 지난해 <처녀들의 저녁식사>가 여성평론가와 기자가 선정한 올해 최고의 영화로 꼽히자 “별 두개반을 주면서 모욕을 줄 때는 언제고 갑자기 최고의 영화라니 우습다”며 평단에 대한 불신을 드러냈다. 논쟁적 영화를 만드는 데 머물지 않고 게으른 평단을 질책하길 꺼리지 않는 임상수 감독은 “감독이 영화를 만들어 던져놓으면 평론가들은 논쟁을 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도 논쟁을 안 했다. 직무유기다”라며 평단의 태도를 비판했다.
트뤼포 vs 뒤비비에, 화해는 없다
개별적인 경우마다 논점이 다르지만 창작과 비평 사이의 깊은 골은 외국이라고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98년 <타이타닉> 감독 제임스 카메론이 <LA타임스>의 평론가 케네스 튜란을 비판한 사건은 대표적인 사례다. “어리석기 짝이 없는 <타이타닉>의 각본은 옛날 할리우드 로맨스영화의 틀을 엉성하게 빌려온 것이며 최소한의 재능도 보이지 않는다”는 튜란의 평에 대해 카메론은 “튜란은 일부 영화만 혐오하는 게 아니다. 그는 모든 영화를 싫어한다. 그는 해가 거듭될수록 더욱 단순과격한, 영화보는 즐거움을 뺏어가는 평론을 써서 명성을 얻었다”고 비판했다. 사건은 두 사람 모두 더이상 논평하지 않음으로 일단락됐지만 영화사에 이런 식의 스캔들은 결코 드물지 않다.
가장 유명한 사건은 1954년 <카이에 뒤 시네마>에 프랑수아 트뤼포의 ‘프랑스영화의 어떤 경향’이 실린 다음 벌어진 일이다. 거칠 것 없는 22살의 젊은 평론가 트뤼포는 장 들라노이, 줄리앙 뒤비비에, 르네 클레망 등 당시 프랑스에서 존경받는 감독들의 영화를 평가절하하고 로베르 브레송, 장 콕도, 자크 타티, 막스 오필스 등 대중적 관심을 얻지 못한 감독들을 추앙했다. 프랑스영화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트뤼포의 평문은 이후 ‘작가주의’라 불리며 <카이에 뒤 시네마>의 공식입장이 됐지만 당시 트뤼포에게 공격받은 감독들은 평생 그 상처를 잊기 힘들었다. 일례로 트뤼포가 데뷔작 <400번의 구타>를 찍은 직후 임종을 앞둔 줄리앙 뒤비비에를 만났을 때 그는 트뤼포가 건네는 화해의 악수를 거부했다. 줄리앙 뒤비비에에게 “당신은 대단한 성취를 한 감독이며 만족할 만한 경력을 쌓았다”고 말하는 트뤼포에게 줄리앙 뒤비비에는 “만약 어떤 비평도 없었다면 지금 행복하다고 느꼈을 것”이라고 대꾸했다.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값비싼 신기루?
사실 영화사를 돌이켜보면 당대 비평가들이 걸작과 졸작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다. 1940년에서 1967년까지 <뉴욕타임스>에 영화평을 썼던 평론가 보슬리 크로더는 아서 펜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가 나왔을 때 세번이나 부정적인 평을 썼다. “잔인한 살인으로 뒤범벅된 이 영화는 아무런 맛도 없고 초점도 없다”는 그의 평은 엄청난 항의를 들어야 했고 보슬리 크로더는 이후 평단을 떠났다. 프랑스의 작가주의를 수입, 미국 영화감독의 서열을 매긴 <빌리지 보이스>의 평론가 앤드루 새리스가 데이비드 린의 <아라비아의 로렌스>에 대해 평한 내용도 합리적이지 않아 보인다. 그는 이 영화를 “멍청하고 지나치게 긴, 값비싼 신기루”라고 말했는데 오늘날 <아라비아의 로렌스>에 대해 이런 식으로 말하는 평자를 보긴 힘들다. <뉴요커>의 평론가 폴린 카엘은 스탠리 큐브릭의 <시계태엽장치 오렌지>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시계태엽장치 오렌지>를 악한 영화라고 판단한 폴린 카엘은 관객에게 흉악범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감독을 비난했다.
하지만 거꾸로 평론가가 창작자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가 된 경우도 무수히 많다. 보슬리 크로더는 미국의 기독교 단체가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기적>을 성모 마리아의 처녀수태에 대한 모욕이라고 규탄했을 때 로셀리니 편에 서서 싸웠다. 폴린 카엘은 발표 당시 포르노로 매도되던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가 1972년 뉴욕영화제 전야제에 상영되자 이날 밤을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이 초연된 밤에 비교하면서 베르톨루치를 옹호했다. 프랑수아 트뤼포가 앨프리드 히치콕을 지지하기 위해 미국에 건너가 장시간 인터뷰를 한 뒤 <히치콕과의 대화>라는 책을 펴낸 사실은 창작과 비평이 조화를 이룬 가장 아름다운 순간 중 하나일 것이다. 트뤼포와 그의 동료들은 미국에서 그저그런 상업영화감독으로 대접받던 히치콕을 새로운 영화언어를 만들어낸 위대한 감독으로 재평가하게 만들었다. 트뤼포의 정신적 아버지이자 바람직한 영화평론가의 모범으로 첫손 꼽히는 앙드레 바쟁 역시 미장센, 딥포커스, 롱테이크 등을 발견함으로써 오슨 웰스, 장 르누아르, 로베르토 로셀리니, 비토리오 데 시카 등을 주목하게 만들었다. 평론이 잘못된 판단을 내릴 가능성이 있음에도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데 있을 것이다. 트뤼포는 75년에 쓴 <평론가는 무엇에 대해 꿈꾸는가?>라는 글에서 “예술가는 자기 자신을 창조하고 스스로를 흥미롭게 만들어서 자신을 전시한다. 이건 대단한 특권이지만 이런 특권을 누리자면 그에 따른 위험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자신을 연구하고, 분석하고, 판단하고, 비판하고, 동의하지 않아도 용납해야 하는 위험이다”라고 말했다.
서로의 불만을 털어놓는 용기가 필요한 때
오늘날 비평은 영화가 소비되는 속도와 규모에 비례해 과거보다 빨리,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안 될 입장에 처해 있지만 그 입지는 과거보다 불안해보인다. 특히 당장 개봉하는 영화에 대해 어떤 말을 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종종 평론가를 고민에 빠뜨린다. 제임스 카메론으로부터 신랄한 비난을 받은 평론가 케네스 튜란은 “영화평은 관객과 평론가 사이의 대화일 뿐이며 감독은 자신이 원하는 한에서 그걸 엿듣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신념만으로 감독들이 느끼는 불만이 해소되진 않겠지만 영화비평의 존재의의를 전면부정하지 않는 한 튜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미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비평의 역사가 일천한 국내 상황은 감독과 평론가, 양자에게 더 많은 숙제를 남겨놓았다. 특히 합리적인 논쟁의 역사가 없다는 사실은 평단의 게으름을 질책하기에 충분한 조건이다. 영화평론가 강한섭씨는 “평론가들의 문제의식이 치열하지 않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말하면서 “작품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나올 수 있고 극찬과 악평이 공존할 수 있다는 걸 유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환경이 돼야 한다”고 말한다. 아마 그러기 위해서라도 지금 절실한 것은 서로의 불만을 있는 그대로 털어놓는 용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