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당신을 만지고 싶었던 게 아니야! 잠자리를 하자고 한 게 아니야! 사랑하자고 한 거야! 외로우니까. 위로하자고 한 것뿐이야!… 사람이 사람을 위로할 수 없다면 이 힘든 세상 어떻게 살아.’ 남자란 이유로 사랑했던 게 아닌 사람들에게 남자라는 이유로 상처받은 준영의 영혼과 세상에서 설 자리를 서서히 잃어가는 문기의 영혼이 입을 맞춘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눈물이 떨어지고 실루엣으로 처리된 그들의 얼굴이 서서히 포개지면서 암전. 그리고 그 위에 내레이션이 흐른다. ‘그 밤, 그 포옹을 누구는 욕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터진 그 아이의 입술에서 내가 받은 건 위로였다. 가엾은 서로에 대한, 안스러운 위로.’
KBS에 동성애 소재 드라마?
남자는 염색해도 안 되고 밀어도 안 되고 귀걸이 해도 안 되는 KBS에서 내놓은 세기말 특집극 <슬픈 유혹>(KBS2, 12월26일 일요일 밤 10시10분)의 소재는 동성애다. 영화에서는 원조교제, 모럴 헤저드, 치정극 운운하고, TV에서는 남자끼리 키스하고, 이거 정말 세기말이군! 하는 사람들도 있으리라.
이 세기말의 이야기 속에는 고독을 안고 살아가는 세 사람이 있다. 한평생 성공을 위해서 일했지만 이제 ‘밀림’을 당하는 위태로운 40대 서문기(김갑수)의 외로움은 자신의 상황을 절대 가족에게 말할 수 없고 혼자 안고 가야 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누가 봐도 당당하고 패기있어 보이는 20대의 신준영(주진모)에게는 이성애자들이 대부분인 사회 속에서 동성애자로 살아 이해받기 힘든 데서 오는 외로움이 있다. 서문기의 아내로 결혼생활 20년을 그저 남편의 등만 바라보고 살아가야 했던 서정혜(김미숙)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부부로 하나가 된 것이 아니라, 남편으로 아내로 단절되어 있는 건 아닐까?’. 문기는 준영에게서 그리운 자신의 젊은날을 보고 준영은 문기에게서 사업 실패 이후 여지없이 무너졌던 형의 쓸쓸한 뒷모습을 발견한다. 사랑이었든 연민이었든 간에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 속에 메마르고 단절된 문기의 삶 속에 뛰어든 준영은 그를 사랑하게 된다. 문기 역시 스스로 인정할 수 없는 감정에 괴로워하면서도 어느 날 준영의 집앞을 서성거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정혜는 회사 외에는 어떤 것에도 관심없어하던 남편이 어느 날부터인지 입에 올린 이름 ‘준영’에 대해 궁금해하고 집으로 찾아온 그의 모습에서 20년 전 남편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렇게 이야기는 세 사람을 중심으로 진행되면서 계속해서 우리에게 ‘이야기할 것’을 강조한다. 혼자 끙끙 앓는 것이 아니라 함께 풀어나가길 말이다. 돌려서 혹은 좀더 좋은 표현을 사용해서가 아니라 “왜 말하지 않지! 창피해?”라고 직접적으로 묻는다.
“21세기는 소수층과 소통하는 시대”
“민주주의가 이 세계의 대다수를 지배한 지난 천년이 다수가 소수를 지배하는 사회였다면 다가오는 세기는 다수가 소수를 이해하고 그 사이의 단절을 넘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세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드라마를 기획했다. 그리고 그중 가장 단절되고 이해받지 못하는 소수층을 찾다보니 ‘동성애’라는 소재에 다다르게 되었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동성애’가 아니다. 그것을 아우르는 ‘인간애’에 대한 이야기이며 인간과 인간 간의 원활한 소통을 꿈꾸는 드라마이다”라고 이 작품을 연출한 표민수 PD는 말한다.
노희경 작가와 표민수 PD가 <거짓말>을 끝낸 지난 98년에 이미 기획에 들어간 <슬픈 유혹>은 워낙 파격적인 소재이다 보니까 캐스팅도 만만치 않았고 배우들이 감정을 극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문기와 준영의 키스신을 찍기 전에는 모든 스탭들이 잠시 휴식을 취해야 했다. 그런데 촬영 전 ‘이마나 볼에 살짝하면 안 될까?’ 하며 걱정하던 배우들이 막상 큐 사인이 떨어지자 그 감정에 취해 자연스럽게 연기가 이루어졌다. 또한 짧지 않은 시간을 준비한 노력이 극 중간중간에 묻어난다. 문기와 준영이 손을 잡고 걸어가는 서삼능 종마 목장길을 뒤덮으며 영화의 긴 엔딩을 장식한 노란 은행잎은 지난 10월에 미리 사뒀다가 스탭들이 일일이 깔아서 만든길이라고.
MBC <사랑> 이후 오랜만에 TV에서 만나는 김미숙의 더욱더 원숙해진 연기와 요사이 한꺼번에 개봉된 각기 다른 영화의 주인공인 김갑수와 주진모를 한 드라마에서 만날 수 있다.
노희경 작가+표민수 PD
직설적인 글과 잔잔한 연출
노희경 작가와 표민수 PD의 인연은 벌써 세번째다. 사실 횟수로는 그닥 많은 것처럼 들리지 않지만 그 경력에 비추어본다면 심상치 않은 숫자다. 96년 MBC 제4회 베스트극장 공모에서 <세리 아줌마와 수지>로 입선하면서 드라마계에 데뷔한 노희경 작가는 같은해 AIDS문제를 다룬 <아직은 사랑할 시간>이라는 단막극으로 표민수 PD와 첫 인연을 맺는다. 당시 표민수 PD 역시 단막극을 제외하고는 큰 작품을 맡아본 적 없는 새내기 PD였지만 두 사람은 집요함과 끈기로 신인으로서는 쉽지 않은 소재를 힘있게 끌고나갔다. 이후 노희경 작가는 친정인 MBC에서 96년 창사 특집극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97년 <내가 사는 이유>를 집필했다. 98년 3월, 다시 그들의 두 번째 만남이 이어진다. PC통신만 보고 시청률 1위라는 오해가 들 만큼 광적인 팬들을 만들어낸 ‘컬트 드라마’ <거짓말>을 생산해내게 된 것이다. 평균 시청률은 고작 12∼13% 정도에 그쳤지만 <거짓말>에 ‘미친’ 시청자들은 급기야 각종 통신에 <거짓말> 모임방을 결성하기에 이르렀고 그들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준희’의 떨리는 손에 가슴 아파하고 ‘은수’의 소금 같고 빛 같은 모습을 사랑하며 ‘성우’의 선인장을 그리워한다. 그뒤 노희경 작가는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MBC)로 표민수 PD는 일일 연속극 <사람의 집>(KBS) 연출로 잠시 이별을 고했지만, 99년 말 <슬픈 유혹>으로 그 세 번째 만남을 가지게 된다.
PD와 작가의 만남. 보통 작가의 글발에 PD가 휘둘리거나 혹은 PD의 영향력에 꼼짝없이 글을 쓰는 작가가 대부분인 방송가에서 이들은 사이좋은 오누이 같기도 하고 함께 공부해 나가는 학우 같기도 하다. 그리고 강한 남자에 세심한 여자라는 성역할이 보통인데, 강하고 직설적인 어조의 노희경 작가의 글과 섬세하고 잔잔한 표민수 PD의 연출은 참으로 새로운 세기에 적합한 조합같다. 이들은 내년엔 도시의 빌딩 숲 사이에서 살아가는, 가난하지만 마음은 황제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