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 셰리던은 말하자면 인파이터 복서다. 딱히 기교라 부를 것 없는 영화 스타일은 정치적 소재는 논쟁적으로, 연애담은 멜로드라마로, 서글픈 현실은 비극으로 다루는 정면승부를 꺼리지 않는다. 평론가들이 그를 ‘배우의 감독’이라 부르는 것도 이처럼 곁눈질하지 않는 스타일과 관련있다. 아일랜드 더블린 출신으로 뉴욕에서 극작가 겸 연극연출가로 활동했던 짐 셰리던은 영화를 통해 시공간의 제약없이 자유자재로 옮겨다닐 수 있는 무대를 얻었지만 그 무대에 올려야할 대상이 인간이라는 점을 잊지 않는다. 렌즈를 통과한 빛의 환영이 한순간 배우의 영혼을 스크린 위에 새겨넣을 수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에둘러 표현하지 않는 짐 셰리던의 특징을 드러낸다.
셰리던 영화의 중심에 놓인 것은 고난에 맞서는 주인공이며 그 역은 3번이나 다니엘 데이 루이스에게 맡겨졌다. <나의 왼발> <아버지의 이름으로>에 이은 <더 복서>의 주인공 대니는 IRA 테러사건에 연루, 14년을 감옥에서 썩어야 했던 권투선수다. <아버지의 이름으로>에서 영국 사법부의 명예를 땅바닥에 처박은 ‘길포드 4인조 사건’을 다뤘던 짐 셰리던은 <더 복서>에서 아일랜드 문제에 더 깊숙이 개입한다. <더 복서>가 주목하는 것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아일랜드의 현실 정치상황이고, 셰리던은 영국과 IRA간 평화회담의 진전에도 낙관하기 힘든 미래를 염려한다. 하지만 그것이 냉소적인 저널리스트의 태도처럼 겉치레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쉽사리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는 영국 정부를 비판하거나 IRA 과격파의 극단적 테러리즘을 공격하는 대신 그는 벨파스트의 하늘을 잿빛으로 내리누르는 미래에 대한 불안을 드러낸다. 사태의 정점이 유혈극이 됐든 정치적 타협에 이르든, 유형의 땅이 된 아일랜드의 현실은 한두번의 수술로 아물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겼고 거기엔 인간의 좀더 원초적인 감정과 인습이 자리하고 있다. 예를 들어 주인공의 사랑은 잃어버린 14년 세월이 켜켜이 쌓아놓은 장벽에 가로막힌다. 그래서 대니가 매기(에밀리 왓슨)를 안을 수 있는 공간은 벨파스트를 가로지른 신구교간 바리케이드 건너편이다. 청춘을 저당잡힌 연인에게 인습의 굴레를 쳐놓는 두터운 벽은 이웃에게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내는 소년의 아직 때묻지 않은 마음에도 깊은 골을 파놓는다. 14년 전 대니의 과거가 매기의 아들인 소년의 현재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은 은밀하지만 뚜렷하게 드러난다. 아마 대니 역시 매기의 아들처럼 어른들이 만든 잣대대로 행동했고 그 대가를 감옥에서 치렀을 것이다. 앞으로 14년 뒤 소년이 맞닥뜨릴 현실이 대니의 현재와 다른 모습일 수 있을까? “그만 집으로 돌아가자”는 희망섞인 마지막 대사에도 불구하고, 하늘에서 벨파스트 시내를 내려다보는 카메라는 여전히 이곳이 24시간 감시 아래 놓인 분쟁지역임을 상기시킨다.
<더 복서>는 아일랜드 문제에 대해 직접적이고 정치적인 발언을 하는 드문 영화지만 그 표면 아래로 뒤틀린 역사에 가위눌리며 번민하는 실존의 무거움을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점점 더 희귀해져가는 예스런 옷이지만,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에밀리 왓슨 같은 배우가 걸치면 우아하고 품위있어 보인다. 유행에 떠밀리지 않은 짐 셰리던 스타일은 <아버지의 이름으로>보다 <더 복서>에서 훨씬 매력적이다.
IRA에 대한 애증
짐 셰리던 감독 인터뷰
-<더 복서>는 반(反)IRA 영화인가, 아니면 IRA 내부의 자아비판격인 영화인가.
=후자쪽이겠지. 심리학적 측면에서, 스스로를 비판할 수 있다는 건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니까. 이 영화는 또 명확하게 ‘친IRA 영화’라고도 할 수 있는데, 런던의 호화 클럽 장면이 특히 그렇다. 군주제를 추종하고 엘리트주의에다, 우월감에 사로잡힌 영국적 전통을 지적하려는 의도였다. 영국사회는 법부터가 당파적이다. 아무도 지적하지 않지만, 예를 들어 찰스 왕세자는 가톨릭 교도와는 결혼할 수 없게 되어 있질 않나.
-클럽 장면은 이 영화에서도 특히 흥미로운 대목의 하나이다. 상징이 아주 노골적이어서 유난히 튀더라. 근거가 될 만한 어떤 실제사건이 있었나.
=맞다. 1983년에 배리 멕기건이라는 자가 런던의 한 클럽에서 ‘젊은 알리’라는 한 나이지리아 선수와 싸우던 중에, 젊은 알리가 사망한 사건을 바탕으로 한 거다. 그때 들것이 없어서 그를 테이블보에 담아 링에서 테이블 위로 옮겨놓았는데, 테이블에는 샴페인병이 그대로 놓인 채였다는 거다. 그러니 영화의 그 장면은 그리 비약이 아닌 셈이다. 아니, 사실은 약간 톤을 죽여야 했을 정도였다. 그렇긴 하지만 누군가 말했다시피, 난 그에 앞서 이미 IRA를 공격했고, 급진파에 욕을 퍼부은 뒤였다. 그러고나서 영화 끝나기 직전에, “잠깐 실례. 물러나기 전에 한 가지만 더 말할 게 있는데” 하고 끼어든 거지.(웃음) 내 기본생각은 영국사람들은 개조가 필요한데 그들 스스로는 그걸 못한다는 거다. 우리만이 거울에 비친 그들의 진짜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다. 영국사람들은 아무리 거울을 봐도 자기들 사회가 완벽해 보일 뿐이다. 왜냐하면 자기들한텐 아일랜드가 있어 “세상에, 저 동네에서 벌어지는 저 난리굿 좀 봐” 하고 잘난 척할 수 있으니까.
-영화에서 급진파에 대한 당신의 비난은, 주로 해리라는 인물에 집중되고 있다. 그는 IRA의 대의에 너무 감정적으로 매몰된 나머지, 어떠한 정치적 타협도 용납하지 못한다. 그건 이제까지의 희생을 모두 무위로 돌리는 일일 테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정치에는 반드시 타협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한다면, 새로운 아일랜드라는 비전을 위해서는 구교와 신교의 모종의 화해조처가 필요하다는 데 동의한다면, 해리 같은 극단주의자가 정치판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있는 건가.
=정치에는 비전을 품을 수 있는 능력과, 그 비전을 타협할 수 있는 능력이 동시에 요구된다고 말하고 싶다. 타협을 하더라도 여전히 비전을 성취할 수 있지만, 그 비전에는 상대편을 위한 포용책이 포함돼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는 전제 아래 말이다. 만약 신교쪽을 포용하지 않는다면, 제거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IRA의 문제는 그들이 영국사람들이나 신교도들을 제거하고자 한다는 데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영국사람들을 제거하려고 들면, 영국사람들은 신교도들을 버려두고 떠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신교도들을 자동적으로 제거하는 셈이라고 믿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건- 폭력이 아니라 정치적인 측면에서- 신교도들을 제거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따위를 비전으로 가질 수는 없질 않나!
-영화는 그런 딜레마를 다루고 있다. 조 해밀이라는 인물은, 정치협상에 참여했다가 극단주의적 전술이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 게리 애덤스형 인물로 좀더 온건한 입장을 대표하고 있는데.
=잠깐만. 사실을 바로잡고 넘어가자. 대체 한번이라도 극단주의적 전술이 통한 적이 있었다는 말인가.
-이런, 내 말을 오해하다니. 테러리즘을 지지하자는 게 아니다.
=극단주의는 영국이 행할 때는 주효했지만, 아일랜드사람들이 그 약효를 본 경우는 한번도 없었다. 그 뭐냐, 적어도 그 사람들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낸 마이클 콜린즈를 지지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가 묻고 싶었던 건, 해리가 살해당하는 장면에 대한 거다. 미국 관객 대부분은 그 장면을 기본적으로 멜로드라마적인 플롯의 반전으로 받아들일 거다.
-하지만 아일랜드 관객, 특히 북아일랜드 관객은 훨씬 더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을까 싶다. 물론 해리가 암살된 덕분에 대니가 목숨을 구하지만, 본질적으로는 평화협상을 구하기 위한 살인 아닌가.
=그렇다. 이 영화에서 아주 무거운 대목인데, 아일랜드사람들은 다르게 받아들일 거다. 과연 그런 사람들과 마주앉아 협상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 모종의 논리적인 결론을 유도하기 때문에, 그곳에선 훨씬 더 논란을 불러일으키거나,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할 수 있다.
-영화는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는데.
=내 머리에 총구를 들이대는 사람과 협상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해결책치곤 거칠다.
=영화 속에서 구현할 수 있는 유일한 극적인 해결책이지. 그렇다고 현실 속에서 그런 상황이 벌어질 때 그게 올바른 해결책이란 얘기는 아니다.
-IRA는 밀고 혐의자들을 제거했는데, 이런 종류의 살인은 얘기를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몰고간다.
=옳은 말씀. IRA 내부에 그런 정치적 요소들이 있기 때문에 어렵다. 우리가 말하고자 했던 건 IRA가 세상 밖으로 나올 때가 됐다는 거다. 더이상 은밀하고 비밀스럽게 굴 이유가 없다. 아무리 엄청난 장애물과 맞닥뜨리더라도, 심지어는 은밀하고 교묘하게 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적과 맞서더라도, 극중 배역인 조이스가 말한 대로 ‘침묵, 책략, 그리고 망명’은 내겐 한번도 선전가치가 있는 캐릭터적 특질로 생각된 적이 없다. 이런 전략은 더이상 필요없다. 뿐만 아니라 그래봐야 결국엔 상대방을 위한 비전을 갖지 않으면 안 되는 시점이 찾아온다. 그땐 질적 도약을 통해 뭐가 더 나은 길인가 결단을 내려야 한다. 영광스럽게 실패와 더불어 사라질 것인가, 내일 또 싸우기 위해 살아남을 것인가를. 그게 아일랜드의 역사다.
-당신 영화들 상당수가 과거 역사에 의해 지배되는 아일랜드 정치의 딜레마를 다루고 있다. 농담에서도, “아일랜드에서는 맑게 갠 날이면 태고 적의 역사까지 다 보인다”고 하지 않는가.
=과거는 미래의 행동방향을 제시해줄 때만 유용할 뿐이다. 다시 말해 영국의 제도를 사랑해야 하고, 영국이 아주 독립적이고, 아주 충성스럽고, 아주 철저한 섬나라라는 사실을 사랑해야 한다는 거다. 아일랜드는 영국에서 좋은 점을 보고 그 특질들을 받아들인 다음 그것을 개혁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영국의 분신인데 바로 그 사실에서 이 분쟁이 비롯된 것이다. 종교분쟁이기 때문에 아무도 승자가 될 수 없는, 심지어 셰익스피어까지 언급한 이 분쟁 말이다.
-IRA는 감당할 수 없는 적과 맞서서 언제나 스스로를 희생자라고 여기는 완전히 거의 광적으로 감정적이 된 집단이다. 우리 아일랜드사람들이 이런 난국에 봉착한 이유 중 하나는 마틴 루터 킹 목사를 보고 “그래, 우리도 바로 저런 처지야. 우리도 인권을 위한 운동에 나서야겠어”라고 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는 권리장전도 없는 나라고, 따라서 그건 개념상의 모순이다. 그들은 마틴 루터 킹의 차원에 이르지 못했고 그들의 정치운동은 프로테스탄트라는 복음적 전통에서 비롯되지도 않았다. 그러니 결국 두개의 이데올로기를 떠안고 만 셈이다. 공화주의 운동은 프랑스 것이고, 가톨릭은 로마 것이다. 따라서 영적인 중심은 실제로는 정치적 중심에 위치해 있지 않으며, 정치에는 영성이란 게 없다. 사실 정치의 정신성이라는 건 완전하게 불모일 따름이다. IRA는 아마 교회를 증오할 거다.
=알다시피 아일랜드 역사는 유럽 역사 속에 포함돼 있다. 지금과 같은 휴전이 필요한 이유는, 내 생각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과 관계가 있다. IRA는 더이상 마르크시즘을 견지할 수가 없게 됐는데, 그렇다고 스스로의 조직을 떠받치기 위한 두뇌도 갖고 있지 않다. 아일랜드 역사는 기본적으로 유럽 사상의 종말처리장이다. 우린 누구보다도 늦게 그 사상을 받아들이고, 그 사상들은 유럽에서 자기 수명을 다한 다음 우리 땅에 와서는, 때로는 전쟁이라는 양태로, 판을 치는 거다. 여러분은 지금 유럽의 분쟁, 즉 종교개혁에서 비롯된 분쟁의 종말을 아일랜드에서 지켜보고 있는 거다. 종교개혁은 사회에서 두 가지 사상으로 전개됐다. 하나는 미국 땅으로 건너간 개인주의, 프로테스탄티즘이고 다른 하나는 당파제도인 가톨리시즘인데, 후자는 미국에도 존재하다시피, 시실리(마피아) 체제처럼 반동적 성격으로 변한 것처럼 보인다. 나는 당파의 내부에 있는 탓에 IRA 운동에 대한 영화를 만들 때마다 이러한 모순에 봉착하게 된다. 하지만 영화에 극적인 요소를 불어넣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인물들을 설정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대니를 새로운 행동방식의 모델로 제시하는 건가.
=맞다. 그는 자기 세계 안에서 싸운다.
-게다가 당파의 조직에 따르지 않는, 책임감 있는 개인이기도 하다.
=대니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얼마간 유리된 인물이며 제 두발로 홀로 설 줄 아는 개인이며, 그런 의미에서 신교도적 인간이다.
-하지만 가톨릭이기도 하지 않은가.
=그렇다. 어느 정도까지는.
-<더 복서>는 보기 드문 러브스토리다. 대개의 할리우드영화들에서, 정치사회적인 요소들은 아예 없거나, 만약 있다 하더라도 그저 사랑이야기의 양념일 뿐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러브스토리가 주로 정치·사회적 쟁점들의 검증수단으로 사용된다. 둘의 애정관계는 그들이 처한 사회적 환경에 의해 좌절당하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해변에 단 둘이 있을 때의 첫 포옹장면에서조차도, 아무런 관능적 교감을 찾아볼 수 없는 건 왜인가.
=그 이유의 하나는, 대니로서는 매기가 유부녀이기 때문에 그녀를 노골적으로 관능적으로 대할 수 없다는 거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은 어떤 의미에서 정치를 반영하고 있다는 게 더 본질적인 설명이 될 거다. 예를 들어 몰리 블룸이 연기한 조이스라는 인물조차도 적과 동침한다. 왜냐 독립적이지 않은 나라에서 독립적으로 행동하기란 그토록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능이 없는 거다. 사람들이 상호의존적이기 때문에 관능성을 갖기가 어렵고 따라서 이 영화는 함께 할 수 없는 이유가 수천 가지나 되는 진짜 독립적인 두 정신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니까 이른 봄, 땅 위로 겨우 고개를 내민 새싹들의 겨우 보일까말까 한 러브스토리라고나 할까.
-지난 30년 동안 북아일랜드에서 벌어진 치열한 분쟁을 감안할 때, 관객 다수는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비당파적인 복싱 클럽을 나이브하고 그저 희망사항에 불과한 얘기로 파악할 것 같다. 이런 종류의 비당파적인 문화 및 교육운동이 어떤 성공을 거두었나.
=복싱은 그런 비당파적 운동이 성공을 거둔 몇 안 되는 분야 중 하나다. 복싱은 함께 섞이는 게 가능한, 노동계급의 문화다. 이상하게 축구에도 당파적인 대립이 있는데, 복싱엔 그게 없다. 그럴 수 있는 유일한 스포츠다. 왜 그렇게 됐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아마 너무 공개적인 의식이 돼버린 덕분이 아닐까. 두 종족의 대표가 싸움에 나서고, 누가 이기든 해당종족이 이긴 것으로 받아들이는 식으로 발전해온 거겠지 싶다. 이건 거의 서구역사 이전까지 거슬러올라가는 얘기다.
현실이 아니라 영화적 언어로 생각하면, 이건 같은 사람의 두 부분이 싸우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면 “이봐, 내 말 좀 들어봐. 우린 싸울 필요도 없어. 그냥 날 제물로 삼으라구” 하는 한 선수의 대사가 나온다. 이게 종교다. 하지만 이런 종교 이전에, 그 원시적인 버전이 있다. 복싱은 종교의 이 원시적인 버전과 같은 거다. 복싱은 분쟁과 합일을 동시에 원하는 사람들의 원시적인 부분에 소구하고 있는 거다.
-이 영화의 일부 영상, 즉 IRA 지도자가 결혼피로연이 열리는 술집에 들어갈 때 택하는 비밀스러운 방식이나, 언제나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경호원들의 비밀주의적 행동은 마피아의 이미지를 유발하기 위해선가.
=아니. 그냥 서로 비슷할 뿐이지. 시실리 사람들과 아일랜드사람들은 둘 다 감당할 수 없는 적과 맞서 있다. 이탈리아 본토의 법은 늘 바뀌지만 시실리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따라서 시실리 사람들은 법에 대한 존경심을 잃고 자신들만의 조직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 비밀스러운 조직들은 사회의 붕괴를 뜻한다. 비록 범죄자들은 아니지만 IRA도 마피아와 비슷할 수 있다는 건 그런 의미에서다.
-관객은 대체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공연히 낙관적인 척하는 탓에 왠지 불만족스럽다고 느낄 것 같다. 극적인 측면에서도 현실적인 측면에서도. 해리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대니와 매기의 문제를 풀기에는 아직도 첩첩산중이라는 게 분명하니까. 혹시 당신과 테리가 영화를 다르게 끝내는 문제에 대해 얘기해본 적은 없나.
=물론 있고말고. 두 사람이 영국행 배에 오르는 엔딩을 생각해본 적도 있다. 한데 그건 진짜 할리우드적인 엔딩이다. 재미있는 건, 미국사람들은 두 사람이 그런 행동을 해도 개의치 않을 거라는 거다. 미국사람들은 원래 그러니까. 미국사회는 행동, 즉 어딘가를 떠나 이곳으로 오는 행동에 기반한 사회다. “맙소사, 포기할래” 하는 생각 따위는 물론 안 하지. 아일랜드사람들도 포기하지 않지만, 차라리 배와 함께 수장되는 편을 택한다. 아일랜드사람들이 베트남에 갔다면, 대사관을 지키다가, 베트콩에 의해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몰살당할 때까지 죽자하고 싸웠을 거다.
-이 영화를 본 관객이 어떤 생각을 갖고 극장문을 나서기를 바라는가.
=이런 종류의 폭력은 이제 졸업해야 한다는 생각만 해준다면, 뭘 더 바라겠나.
-<아버지의 이름으로>를 둘러싼 논란이 이 영화에 도움이 됐다고 보나, 그 반대라고 보나.
=영국과 아일랜드 밖에서는 아마 도움이 안 됐을 거다. 영국사람들은 그 영화를 선전선동물로 규정하려 들었고, 얼마간 성공하기도 했지만, 우리가 영화를 미국에서 먼저 개봉하는 바람에 선수를 빼앗겼지. 재미있는 건 영국사람들이 늘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감방에 있지 않았다”면서 투덜댄다는 거다. 그리고 우리가 사실을 왜곡했다는 게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됐다. 결말 부분에 그들이 대중에게 진실을 알리고 싶지 않아서 은폐한 모든 증거를 제시한 법정 장면을 다룬 사실이나, 그 밖에 그 사람들이 주장하는 다른 사소한 사실관계 부분이 아니라 말이다. 영국인들이 지적하는 사실 왜곡은 언제나 그 얘기다. 그러면 난 이렇게 말해준다. “그들은 실제로 잠깐 동안 같은 감방에 있었으며, 난 그 기간을 좀 늘렸을 뿐이다. 하지만 더 재미있는 건, 문제를 제기하는 시각 아니겠는가. 먼저, 그들이 같은 감방에 있는 게 더 인간적인가 아닌가? 아버지와 아들이 감옥에 있다면, 그들이 같은 감방에 있는 게 더 인간적이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만약 그게 더 인간적이라면, 왜 당신네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나? 그리고 당신네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왜 내가 그렇게 했다고 해서 무의식적으로 화를 내는 건가? 당신네들이 화를 내는 이유는, 바로 당신네들이 그 가족을 갈라놓고자 하기 때문이다. 당신네들은 아버지의 권위로부터 아들을 떼어놓고자 하는 거다. 왜냐하면 그게 한 사회를 파괴하는 기초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내 영화 대부분은 바로 이 대목에 관한 얘기다. 아버지를 존경할 수 없는 아들과, 권위있는 존재가 되지 못하는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 내 영화들은 뼛속 깊이 책임감에 차 있는 작품들이다. 내 영화들의 목표는 영국인들을 공격하는 데 있지 않다. 하지만 <아버지의 이름으로>가 실존인물들에 대한 영화이며 누구도 우리를 고소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우린 고소당하지 않을 거다. 왜냐하면 자기들도 자기들이 한 짓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영국-아일랜드 관계에 대한 대중적 토론의 매개체가 됐다.
=게리 애덤스가 겪은 일들이 가장 주목할 만한데, 그 사람은 처음 아일랜드 밖으로 여행을 떠나면서, 사람들이 ‘에니스킬렌’ 사건이나 그 밖의 잔혹행위에 대한 책임을 물으면서 자기한테 덤벼들지 않을까 걱정했다. IRA가 폭발물을 터뜨린 에니스킬렌 사건에서 열한명이 목숨을 잃질 않았나. 그런데 영국이나 아일랜드 밖에서는 너나 할 것 없이 그 사람한테 영화 <아버지의 이름으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는 거다. 그들은 IRA의 잔혹행위에 개의치 않았다. 마치 영화가 그런 심리틀을 만들어낸 것 같았다.
-이제까지 당신은 여섯편 정도의 영화를 직접 연출하거나 각본을 써왔다. 세계 관객에게 아일랜드 이야기를 들려주려 했던 당신 노력의 성과를 어떻게 평가하나.
=성공 그 이상이었다고 본다. 네다섯편의 영화가 모두 세계에 개봉됐다. 그 영화들이 개봉됐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누군가 아일랜드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 미국 관객이 보게 했다는 것도 기적이다. 그리고 그 영화들이 흥행에 성공했다는 건 더 큰 기적이다. 그리고 그들 중의 일부가 대박을 터뜨렸다는 건 엄청난 기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