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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제국에 뜬 광기어린 달
2001-08-22

스필버그 대신 팀 버튼이 만들었다면?

● 로빈 우드는 사람들이 간절히 염원하는 퇴행의 형식에 따라 정서적으로 몰입하도록 만드는 것에서 스필버그의 순수함이 드러난다고 지적했다. 즉, 스필버그의 영화는 구제받을 수 없을 만큼 타락했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최소한 문제가 많다고 인식되는 성인세계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유아적인 특성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피터팬 증후군’이다. <A.I.> 는 언뜻 보기에 위와 같은 로빈 우드의 지적에 대한 완벽한 예증으로 받아들여진다. 타락한 성인세계에 대한 유아기적 환상을 집약시켜놓은 듯한 몇몇 영화적 공간- 광란의 폐기물 축제, 악의 도시 루즈 시티 등- 을 경유하는 주인공이 모종의 오이디푸스적 궤적을 그리며 어머니의 품에 안착한다는 스토리. 그리하여 <쉰들러 리스트> <아미스타드>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만들었던 스필버그가 결국 <후크>의 감성으로 퇴행했다고 말하고나면 더이상의 언급은 필요없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스필버그의 가장 내밀한 고백

한데 과연 그러한가? 일단, <A.I.> 의 로봇 소년 데이빗은 성인이 ‘되고 싶어하지 않는’ 아이가 아닌 성인이 ‘될 수 없는’ 아이이다. 그의 (육체적, 정신적) 성장은 자의에 의해 멈춘 것이 아니다. 그는 성장이 불가능하게끔 프로그램되어 있다. 이 사소하지만 미묘한 설정이 <A.I.> 를 다분히 자기반영적이면서 동시에 풍부한 함의를 지닌 텍스트로 만드는 것이다. 스필버그는 <A.I.> 를 영화적 테크닉에는 정통하면서도 그에 걸맞은 작가적 사색의 능력은 지니지 못한 것으로 치부되곤 하던 그 자신에 대한 반영처럼 만들어냈다. 게다가 이를 다시 인간 전 존재에 대한 반영으로 전환시킴으로써 <A.I.> 를 동화버전으로 만든 존재론적 SF의 자리에 위치시키고 있다. <A.I.> 는 적어도 스필버그 자신이 만든 영화들과 경쟁하는 한에서는 충분히 최고의 작품으로 꼽힐 만한 영화다. <A.I.> 는 스필버그적 요소들의 총합으로 이루어져 있는 동시에 그러한 요소들이 영화 속에서 기능할 수 있게 만들었던 전제들에 의문을 던지는 형식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스필버그는 분명 우리 시대의 작가이다. 하지만 스스로를 작가이게끔 하는 특성들에서 의식적으로 벗어나고자 한다는 점에서 기이한 존재이다. 그는 언제나 아이들- 특히 사내아이들- 의 공포를 다룬다. 불가해하고 상상적인 것들- 외계인, 식인동물, 공룡, 유령, 저주 등- 에 대한 유년의 공포로 가득 채워진 영화적 공간을 누비는 주인공들의 모험담이야말로 우리가 ‘스필버그적’이라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모험의 목적은 불가해하고 혼란스러운 공포를 길들여 즐길 만한 판타지로 전환시키는 것이다(이런 면에서 <쥬라기 공원>의 공룡 테마파크는 스필버그 자신의 영화적 세계에 대한 적절한 비유로서 읽힌다). 여기가 스필버그의 동화가 <피위의 대모험> <비틀주스> <가위손> 그리고 <슬리피 할로우> 등의 팀 버튼식 동화와 갈리는 지점이다. 팀 버튼의 인물들 또한 유년기적 공포와 환상의 대상들에 사로잡혀 있지만 그들은 이 대상들을 길들이는 대신 대상들과 더불어 유희하고자 한다. 게다가 우리에게도 같이 어울려 즐길 것을 끊임없이 권유한다.

도식적으로 말해본다면 <가위손>이 ‘성인용’ 동화작가 팀 버튼의 가장 내밀한 고백이었던 것처럼 <A.I.> 는 ‘아동용’ 동화작가 스티븐 스필버그의 가장 내밀한 고백담인 셈이다. 스필버그는 이 영화에서 자신의 욕망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스스로의 작가적 흔적들로부터 탈피하고자 하는 일말의 시도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A.I.> 가 이전의 스필버그 영화들과 다른 위치에 놓일 수 있는 것은 그가 이 영화에 비로소 소멸에 대한 감각과 스스로에 대한 반영적 시선을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가령, 곰돌이 테디에게서 우리는 <E.T.> 의 귀여운 외계인의 모습을 다시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그 위에 중첩되는 것은 <블레이드 러너>의 세바스찬이 만들어낸 난쟁이 인조인간들의 영상이다. 세바스찬은 그들을 ‘친구’라 부르지만 사실상 그들은 다른 복제인간들에게 꼭두각시 장난감 인형 같은 자신의 존재를 절실히 깨닫게 하는 조롱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A.I.> 의 로봇 소년 데이빗에게 테디는 ‘전자제품’이 아닌 ‘엄마의 아들’로서 자신을 규정짓기 위한 타자인 동시에 ‘전자제품’에 불과할 뿐인 자신- 코마에서 깨어난 마틴은 데이빗을 테디보다 나은 새로운 장난감으로 간주한다- 을 지속적으로 상기시키는 존재이기도 하다. 영화 중반의 폐기물 축제는 데이빗 또한 기능을 다하면 결국 고철덩어리로 화할 뿐인 기계에 불과하다는 엄연한 사실을 환기시킨다. 데이빗은 아이의 정신을 가진 성인으로 치부되곤 하던 스필버그 자신의 우울한 반영이기도 하다. 성숙한 거장의 사유에 이르고자 하는 열망과 유년기적 환상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스필버그의 처지는 (성장이 가능한) ‘진짜’ 인간이자 엄마의 아들인 마틴과 곰돌이 테디 사이에 놓인 로봇 소년 데이빗을 통해 극명하게 표현되고 있다.

신탁은 거짓, 마법의 세계는 없다

<A.I.> 는 존재하지 않는 욕망의 대상에 대한 이야기이며 자아 인식이 불가능한 주체를 통해 바라보는 자아 인식의 비극이다. 영화의 동화적인 외양은 이러한 독해가 과연 가능한 것인가, 하는 의문을 던지게 만들지만 기억에 남는 동화는 으레 낭만적인 외피 속에 비극을 감춰두는 법이다(가령, <인어공주>나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 등을 떠올려보라. 혹은 흡사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를 연상시키는 모험소설인 <동굴의 여왕>은 또 어떤가). 어머니의 사랑을 받는 것과 인간이 되는 것은 충족이 불가능한 욕망이다. 이 상이한 두 욕망은 아무런 연관관계도 없지만 데이빗은 그 둘을 무리하게 연관짓는다. 어머니의 사랑을 받기 위해 그는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푸른 요정’을 만나 소원을 빌어야 한다는 데이빗의 믿음은 충족 불가능한 욕망을 성취시키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 수단을 찾아나서는 기이한 여정을 만들어낸다. 은총과 정화를 연결짓고 그 귀결로서 성배를 찾아나서는 인간들의 행보를 ‘로봇’ 데이빗이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스필버그의 동화엔 마법의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A.I.> 의 영화적 세계는 나쁜 마녀도 착한 마녀도 없으며 오직 가짜 마법사- 하비 박사- 만이 존재할 뿐인 오즈와도 같다. 도로시는 빨간 구두마저 잃어버렸다. 게다가 신탁- 루즈 시티의 ‘닥터 노’가 들려주는 말들- 은 모두 함정에 불과하다. 인간들은 모두 사라지고 온통 얼음으로 가득한 지구, <미지와의 조우>에 나온 외계인들을 닮은 로봇들이 나타나 데이빗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은 결코 해피엔딩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들과 달리 영혼을 지닌 존재이며 따라서 존재의 비밀을 쥐고 있을 것이라는 로봇들의 말은 그들 또한 데이빗처럼 인간에 의해 프로그램된 환상에서 자유롭지 못한 존재들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에 불과하다, 고 말하는 것이 과장이라고 생각되는가? 하지만 왜 외계인이 아니고 로봇이란 말인가? 이러한 전환으로 인해 <A.I.> 의 마지막 장면은 죽어버린 신의 시체를 싸안고 인간이 벌이는 망상의 향연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혹은 스필버그식 동화가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와 살짝 조우하는 순간이다. 분명 이는 <미지와의 조우>에 대한 현재 스필버그 자신의 영화적 답변이다. 이 마지막 장면을 통해 그는 당연히 쏟아질 비웃음- 사실 <A.I.> 는 진정 평가절하된 걸작 <미션 투 마스> 이래 관객을 가장 황당하게 만드는 라스트신을 가진 SF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극장 안에서 터지는 그 웃음이라니!- 을 무시하면서 자신이 만든 환상 하나를 뒤틀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 장면이 큐브릭의 것이 아닌 온전히 스필버그의 창안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타당하다. 왜냐하면 큐브릭은 스필버그처럼 환상의 제국을 창출하는 감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큐브릭의 영화에서라면 <A.I.> 의 마지막 장면은 우스운 사족이 되었겠지만 스필버그의 영화 속에서 이 장면은 나름의 존재 이유를 가진다.

무모한 해피엔딩

<A.I.> 의 ‘로봇들’은 끝내 인간이 심어놓은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니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 내가 앞에서 <A.I.> 가 자아 인식이 불가능한 주체를 통해 바라보는 자아 인식의 비극이라고 불렀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결국 이 영화는 우리 해석자의 비극이 된다. 하지만 스필버그가 역시 스필버그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는 것도 바로 그 지점에서다. 데이빗은 ‘차이’에 집착하지만 그 ‘차이’들 너머에 감춰진 운명의 손길은 헤아릴 줄 모른다. <A.I.> 는 <바이센테니얼 맨>보다 멀리 나아간 영화임이 분명하지만 결코 <블레이드 러너>의 사유에 이르지 못한다(하물며 에까지 이르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 ‘로봇들’의 입장에서라면 이 영화는 명백히 무모한 해피엔딩의 외양을 취하게 된다.

절망한 오이디푸스는 말한다. “그는 아폴론, 바로 아폴론이다, 친구여. 이 쓰라리기 짝이 없는 불행과 슬픔을 내게 가져다준 이는. 하지만 내 눈을 찌른 것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바로 나의 손이다.” 오이디푸스의 혹은 키릴로프의 인간적인 도전을 <A.I.> 에서 바라는 것은 헛된 일이다. <A.I.> 를 통해 스필버그는 비로소 아이로 머물기를 그만두었지만 아직 어른이 된 것은 아니라 말해야 할까? 하지만 나로서는 스필버그가 자신이 세운 환상 밖에 서서 본디 그 속에 깃들여 있던 광기를 응시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E.T.> 의 커다란 달이 산 너머로 떠오를 때, 그건 이미 예전의 동화적 세계 속에 속해 있던 그 달이 아니다. 그것은 이제 ‘광기를 머금은’(lunatic) 낯선 대상이 된다.

큐브릭의 <A.I.> 를 볼 수 없다는 데에 대한 아쉬움은 그리 크지 않다. 그저 <A.I.> 에서 가장 매력없는 캐릭터 중 하나인 지골로 조를 <시계장치의 오렌지>의 말콤 맥도웰로 바꾸어놓고 혼자 상상해보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캐릭터는 스필버그에겐 영 낯선, 요령부득의 존재였을 것이다. 오히려 스필버그가 아닌 팀 버튼이 <A.I.> 를 만들었더라면 어땠을까를 생각해본다. 그럼 우리는 진짜 오즈 혹은 원더랜드를 횡단하는 장난꾸러기 피노키오-에드워드의 모험을 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스필버그의 <A.I.> 보다 나은 영화가 되었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확실히 ‘다른’ 영화가 되었을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유운성/ 영화평론가 akeldama@netia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