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영화읽기 > 영화읽기
무한한 자기긍정? 엇나간 과잉해석! <달콤, 살벌한 연인>
이종도 2006-04-26

548호 황진미의 <달콤, 살벌한 연인> 평에 대한 반론

“과거의 그녀는 일찌감치 섹스를 하게 된 여자였지, 성적으로 자유로운 여자는 아니었다. 외부적으로는 남자친구에 의해 교환 양도되기도 하고, 스스로도 이긴 남자와 섹스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길 만큼(“니가 이겼다며?”) 남성 중심의 성관계를 내면화한다.”

황진미에게 영화의 질은, 영화 속 대사의 정치성과 겉으로 보이는 성적 자기결정권의 주체적 행사 여부에 따라 좌우되는 것 같다. 위의 구절은 황진미가 <여교수의 은밀한 매력>을 비판한 논지 가운데 하나다. 황진미가 세운 영화의 척도가 문제가 아니라, 척도 따로 영화 속 현실 따로라는 게 문제다. ‘그녀’는 이긴 남자와 섹스하는 게 아니라, ‘니가 이겼다며?’라는 진위가 확인되지 않는(영화는 ‘누가 이겼는지’ 확인해주지 않는다. 그걸 여전히 확인하고 싶다면 아직 성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말로 자고 싶은 남자를 고르는, 현실과 자유를 중재할 줄 아는, 남성 중심 성관계를 역이용하는 영리한 여자다.

<달콤, 살벌한 연인> 영화읽기에서도 황진미는 그녀(이미나)의 주체적인 성적 자기결정권 행사에 주목하며, 죄의식도 모성애도 없는 여성킬러 출현에 열광한다. 그런데 여기서 성적 자기결정권 행사나 죄의식없는 살인은, 사소하고 장식적인 장치이자 트렌디한 장르적 실천으로 보는 게 온당하다.

황진미는 이 영화의 진정한 특이점이 여성살인자를 ‘그리는’ 방식이라고 한다. ‘이 영화가 남성 중심 이데올로기를 얼마나 위협하는지’라고도 말하는데 우발적인 살인사건에 대한 과잉의 해석이다. 이어서 황진미는 ‘흔히 폭력은 남성의 것으로 성별화되며, 여성은 ‘피해자다움’의 성역할로 고정된다’는 견해를 제출한다. 그렇다면 <복수의 립스틱>이나, <성냥공장 소녀> <망종> 같은 영화는 너무 유별난 것이란 말인가. ‘여성 연속살인자를 재현하는 허용된 방식’이 따로 있다니 <성냥공장 소녀>나 <복수의 립스틱>은 너무 벗어난 것 같다. 엄격하게 전제를 달고 시작하니 <몬스터>에 대해서, ‘그녀를 하소연이나 늘어놓는 멍청하고 추한 ‘몬스터’로 그렸다’는 과격한 결론이 나온다.

<달콤, 살벌한 연인>에서 그녀가 4명의 남자를 죽인 건 영화상 매우 미미하다. 오히려 주목하게 되는 건 배우 박용우가 만들어가는 신경질적이고 괴팍스럽고 고고하며 허약한 남자다. 이미나의 살인자라는 전력이 중요하지 이미나의 살인의 윤리가 중요한 건 아니다. 그녀 자신의 입이나 심부름센터 직원을 통해 듣게 되는 매우 짤막한 전언이 살인 묘사의 전부이고, 누가 현장에 있더라도 똑같은 실수를 저지를 수 있는 정당방위의 순간이 전부인데 살인의 윤리를 말한다는 건 어울리지 않는다. <망종>이나 <복수의 립스틱>처럼 어떻게 한 여성이 테러리스트가 되는가에 대한 과정을 ‘보여주어야’ 여성 살인자를 ‘그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쥐 앞에서 벌벌 떨던 여자가 결혼식 하객을 쥐약으로 몰살시키기까지의 기나긴 과정을 보았는가? 그게 바로 ‘그리는’ 거다. 대사로는 뭘 못하겠는가. 아마 그녀는 울트라 마초들을 12명도 더 죽이고 토막살인이며 성기 절단도 할 수 있었을 텐데.

괴팍하고 신경질적이며 연애 한번 못해본 남자가 어떻게 살인자와 연애를 하는가라는 영리한 상황설정이 <달콤, 살벌한 연인>의 매력이다. 이미나는, 황진미가 말한 대로 죄의식도 모성애도 없이 라스콜리니코프의 관념을 실천적으로 선취하는 여주인공과는 거리가 멀다. 낯설고 예외적인 상황, 그 상황을 별난 그와 그녀가 어떻게 풀어가는가가 이 영화의 관심이다.

‘데이트, 키스, 동침 제안에도 훨씬 능동적’이다 못해 본명도 사연도 다 숨기며 오로지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태도가 ‘현실적’이라고 한다면 수긍할 수 있지만 ‘자기 긍정’이라 치켜세우는 건 지나치다. 이미나가 니체적으로 자신의 존재와 삶을 긍정했단 말인가? 살인과 사체유기의 책임으로부터 도망쳐 자기를 보호하겠다는 생각이 자기 긍정인가? 그녀가 살인하게 되는 배경도 라스콜리니코프적 상황과는 전혀 연관이 없다. 그녀가 남성 중심 이데올로기를 해체하고 어지럽히기 위해 다 알고서 저지른 일처럼 과도한 사후 해석을 하고 있는데, 물론 테러리스트에게도 철학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죄의식과 책임감이 없다는 것과, 철학이 있다는 건 별개의 문제다.

물론 ‘‘도덕’과 ‘금기’를 뽑아 줄넘기를 할 발칙한 영화’일 수도 있겠다. 자칫 그 맥거핀에만 골몰한다면 말이다. 도덕도 금기도 줄도 없는 데서, 지금 누군가가 혼자 줄넘기를 하고 있다. 줄도 없는 데 줄넘기를 하는 재주. 알코올 없는 위스키, 니코틴 없는 담배, 그리고 잘 닦은 깨끗한 가습기에서 썩은 냄새를 맡는 그녀의 환후(幻嗅).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