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래쉬>는 ‘인종간의 갈등과 화해를 보여주는 영화’로 국내외 관객의 찬사를 받고 있다. 그러나 <크래쉬>에는 중대한 문제점이 있다. 첫째, ‘신의 관점’에서 인종간의 충돌을 조감하면서, 인종문제를 마치 타인종에게 혐오를 느끼는 인간본성의 문제로 그린다는 점, 둘째, 편견을 없애고 ‘신의 사랑’ 안에서 화해를 간구하자는 해결책 속에, 그 ‘신’이 다름 아닌 ‘백인-남성-기독교인의 신’임이 은폐된다는 점이다. 다시말해 인종문제를 탈역사적이고 탈정치적인 문제, 즉 본질론적이며 종교적인 문제로 위장하면서, ‘백인 > 흑인 > 아시아인’의 위계와 편견을 반복할 뿐 아니라, 여성에 대한 남성의 우위, 배타적인 기독교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답습한다. 이를 <히든>과 비교하면 더욱 명료해진다. <히든>은 철저하게 백인 남성 지식인의 시점으로 영화를 전개하며, 인종문제가 역사적 연원과 정치경제학적 이해(利害)를 지닌 문제이며, 이는 필연적으로 기득권을 지닌 인종의 분열적 자의식과 공포로 남아, 가해를 반복 재생산하게 된다는 놀라운 각성을 보여준다.
1. 종교영화 <크래쉬>
<오감도>(烏瞰圖)는 13인의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들이 막다른 골목을 질주하거나, 뚫린 골목을 질주한다는 시(詩)이다. <크래쉬>는 무섭거나 무서워하는 흑인, 백인, 히스패닉, 아랍인, 아시안들에게 충돌의 막힌 도로를 질주케 하거나, 화해의 뚫린 길을 선사하면서, 그 광경을 조감한다. 그러나 ‘신의 자리’에 놓인 새의 눈은 정치적 맹목(盲目)이다. <크래쉬>는 여러 명의 인물들이 얽히는 (로버트 알트먼식) 다중플롯을 지닌다. 이런 영화들은 주로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을 취하게 된다. 카메라 부감숏이 많아진다는 뜻이 아니라, 인물들 개개인은 극히 일부분만을 겪을 뿐이요, 전체를 아는 것은 관객일 뿐이라는 뜻이다. 이런 영화들은 필연적으로 종교적 색채를 띠게 되는데, 이는 전지적 관객의 자리가 바로 신의 자리를 임차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매그놀리아>에서 개구리비가 내리든,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에서 수녀의 기도가 이뤄지든 별로 이상할 게 없다.
<크래쉬>의 갈등과 화해의 방식 역시 종교적이다. 그들은 증오심과 공포심으로 인해 서로에게 폭력을 가한다. 흑백간의 사회적 차별이 문제가 아니고, 각 인종 서로가 타자에 대한 이해를 결여하고 있다. 이는 사회적 문제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인 양 보인다. 반면 화해는 믿음의 소녀에게서 보듯이 기적적으로 찾아온다. 그리고 인종차별주의자처럼 보이던 백인경찰이 흑인여성을 구하고, 착해 보이던 백인경찰이 흑인청년을 쏘는 상황에서 보듯이, 정치적 올바름이나 윤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신의 은총이다. 그러니 인간은 자신의 도덕을 뽐내지 말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기도를 하는 편이 현명해 보인다. 그런데 이 영화의 문제는 단지 종교적이라는 것뿐이 아니라, 인종/성/종교에 대한 지독한 편견을 답습하는 데 있다.
<크래쉬>의 백인-남성-기독교인의 신
인종: 영화 속 흑인은 세 가지 계급에 속한다. 양아치, 경찰, PD이다. 양아치들은 푸대접받았다고 투덜대지만, 팁을 안 줄 것이란 ‘편견’은 편견이 아니라 사실이며, 그들을 보고 겁먹은 백인여성의 오해는 오해가 아니라 선견지명이 된다. 그들은 ‘흑인=범죄자’라는 편견이 부당하다 말하지만, 편견에 합당하게 행동하며, 다른 흑인에게 도둑놈이라 한다. 흑인경찰은 세명인데, 백인경찰 총에 죽은 흑인경찰은 실제로 비리경찰이었고, 그레이엄 형사는 백인형사의 무고함을 알면서도 흑인에 대한 떡고물을 받아먹는다. 그 과정에서 “이유야 어쨌든 흑인 범죄율은 백인의 8배”라는 말이 나온다. 흑인상급자는 파트너가 인종차별주의자란 백인형사에게 “나한테 똥물 튀기지 말고 조용히 넘어가라”고 말한다. 흑인경찰들은 비리경찰이거나 기회주의자이거나 이기적인 셈이다. 흑인PD는 사회적으로 성공했지만, 자신이 흑인이라는 것을 상기하거나 인종문제를 야기하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 아내가 성추행을 당해도, 흑인이 표준 영어를 구사하는 게 이상하다며 연출권을 침해당해도 조용히 참는다. 자신이 흑인임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 그에겐 자의식의 분열이 있다. 그 분열이 정당한 항변이 아닌 자살적 객기로 분출된다. 영화가 말하는 흑인은, 하층민은 범죄자가 맞고, 중간층은 기회주의자이며, 상류층은 자기부정에 빠져 있다. 그들은 콤플렉스로 가득 차 있으며, 인종차별에 대한 올바른 문제제기를 하지 못한다.
백인은 어떤가. 하층 백인은 흑인을 고용하는 사업체를 운영했음에도 법적인 역차별을 받아 궁핍해졌으며, 백인경찰은 비리흑인경찰을 쏘았음에도 중벌을 받게 되었다. 인종차별주의자로 보이는 백인경찰이 “경찰생활 더 해봐라, 넌 아직 멀었다”고 확언할 만큼 그의 행동들은 다 경험에서 우러난 것들이며, 곧이어 목숨을 걸고 흑인여자를 구함으로써 의로움을 증명한다. 또 한명의 백인경찰은 관대함을 발휘해 흑인PD를 살려준다. 백인 상류층 여자는 강도를 당해 ‘이유있는’ 불안감으로 신경질을 내지만, 곧 ‘선한 사마리아인’인 가정부의 품에 어린 양처럼 안긴다. 백인검사는 여론을 의식하여 이라크인이 아닌 흑인에게 상을 준다. 그는 인종에 대한 특별한 감정없이, 인종을 둘러싼 여론을 조정/중재한다. 정리하자면, 법적/정치적으로 흑인에게 역차별적 특혜가 주어지고 있으며, 백인이 흑인에 대해 갖는 부정적 인식은 다 이유가 있고, 백인은 용기와 관용으로 흑인을 구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생사여탈권을 누가 쥐는가가 중요하다. 흑인경찰은 백인경찰에게 죽고, 흑인청년은 백인경찰에게 죽으며, 흑인PD 부부는 각각 백인경찰들에 의해 산다. 백인은 흑인을 죽이거나 살릴 수 있다. 반면 흑인은 백인의 운명에 개입할 수 없고, 다만 충직함으로 (가정부는) 백인을 도울 수 있다. 한편 흑인은 아시아인을 살려준다. 조진구와 동남아인들을 두번의 선택의 기로에서 모두 살려준다. 아랍인은 히스패닉을 죽이거나 살릴 수 없으며, 오직 기적만이 그를 살린다. 정리하면 ‘백인 > 흑인 > 아시아인’이라는 위계(位階)가 도출된다.
성차: 흑인청년들은 깜둥이 계집애들이 더 재수없다 말한다. 하층민 남성들이 자신들의 열등감을 성차적 약자에게 투사하는 방식이다. 백인여성은 안정적인 남편과 달리 유색인종에 대한 불안감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아시아 여성은 길바닥에서 고래고래 소리치고, 흑인 여사무원은 마치 개인적 감정 때문에 일처리를 해주지 않는 것처럼 그려진다. 여성은 감정적이며 공적 생활에 부적합하다는 편견을 재생산하고 있다. 흑인여성은 백인남성의 화풀이 대상으로 성추행당하고, 모욕감을 남편에게 호소하지만 외면당한다. 결국 끔찍한 백인경찰의 손에 목숨을 구하는데, 그녀가 하필 그에게 구조되는 것을 화해라 칭한다면, 이는 남성 중심의 화해일 뿐이다. 흑인여성을 주물럭거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사과도 회개도 없었다)에게 목숨을 구하게 함으로써, 백인남성의 우월적 지위를 승인케 하는 것 아닌가?
종교: <크래쉬>는 종교 일반의 심성이 아닌 특정종교 기독교를 표방한다. 영화의 배경은 크리스마스이며, 중요장면 곳곳에 기독교의 도상들이 배치/전시된다. 조진구를 응급실 앞에 내려놓을 때 성가족상이 놓여 있고, PD가 흑인청년의 습격을 받아 돌변하는 곳엔 교회벽화가 있으며, 백인경찰의 관용으로 목숨을 구할 때 산타클로스상의 배웅을 받는다. 아랍인의 총구로부터 소녀를 지켜준 것은 믿음이며, 소녀의 집에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트리는 은총을 예감케 한다. 이교도로부터 어린양을 지켜주신 것이다. 화해가 봇물처럼 터지는 이 와중에도 예기치 못한 총질이 있었으니, 평소 착해 보이던 백인경찰이 평소 덜 불량스럽던 흑인청년을 쏜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들 모두 부두교 우상을 가지고 있었고, 우상을 총으로 오인한 것. 과연 우상숭배는 웬만한 세속의 죄보다 중죄이다.
<크래쉬>가 전하는 화해의 메시지는 LA 백인교회 목사의 설교와 흡사하다. 인종간 다툼이 백인들이 유색인들에게 가한 폭력과 차별의 역사로부터 기인되었음을 생략한 채, 인간본질의 문제로 돌리고, 엄존하는 백인중심주의와 인종간 불평등을 도외시한 채 다만 돌고 도는 편견의 제로섬 게임으로 위장하며, 인종과 성에 대한 보수적 편견을 재생산한다.
<히든> 속 백인 남성 지식인의 공포
독특한 첫 장면이 예시하듯이, <히든>의 시점은 거의 1인칭이다. 주인공이 본 것, 떠오른 것, 꿈꾼 것을 따라 진행된다. 그는 테이프를 보고 누구 짓일까 불안해한다. 그림을 보고 과거지사를 떠올리는데, 이 영화에서 중요한 건 ‘누가 보냈는가’가 아니라, 과거지사와 현재의 시선에 대한 주체의 반응이다. 알제리인 형을 받아들이기 싫었던 그가 취한 모략은 ‘나를 위협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과거를 기억해내지만, 반성하지 않는다. 성인이 된 그의 행동도 과거와 같다. 알제리인이 자신을 협박한다는 혐의를 너무 쉽게 만든다. 자신의 무례함과 알제리인의 억울함이 고스란히 담긴 테이프를 보고도 그는 성찰하지 못한다. 오히려 “테이프만 보면 내가 더 과격한 것 같다”고 말한다. 알제리인의 억울함이 묻어나는 장면은 더 보지 않으며, 그의 심정은 생각지 않는다. 두번이나 모함을 받은 그가 눈앞에서 죽어도, “끔찍한 일을 겪었다”고 말하며 극장에 가서 기억을 씻어낸다. 찾아온 그의 아들에게도 위협을 느낄 뿐 사죄하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 위로 자막이 올라가면 관객은 이 영화 전체가 관객에게 전달된 ‘몰카 테이프’임을 깨닫게 된다. 흔히 알제리 사건을 ‘프랑스 지식인들의 트라우마’라고 말한다. 알제리인들이 아닌 프랑스 지식인들의 트라우마라니, 얼마나 백인 중심적인 언사인가? <히든>은 남의 죽음을 기껏 자신의 트라우마라 여기는 백인 지식인의 가증스러운 자기 중심성을 보여주며, 백인이 유색인에게 위협감을 느끼는 이유가 다름 아닌 과거사를 반성치 못하고 타자에게 혐의를 덮어씌우기 때문이라는 진실을 말한다. 인종간 갈등이 역사적 연원과 정치적 역관계로부터 도출된 것이며, 가해자의 죄의식이 오히려 피해자에 대한 공포와 가해를 재생산하고 있다는 <히든>의 인식은 몰역사적이고 몰정치적인 <크래쉬>의 인식에 비해 훨씬 해결의 실마리를 내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