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부는 스크린쿼터를 줄이면서 영화산업을 불안정하게 하는 위험을 선택했다. 이 위험 감수가 강력한 파트너인 미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것을 세심히 계산했겠지만 말이다. 엄밀한 경제적 관점에서, <올드보이>가 한해 자동차 수출과 맞서 대표하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다른 한편으로 어떤 자료들은 통계적 분석을 전적으로 벗어나는 만큼, 필자는 한국 영화인들의 수량화되지 못한 작업들이 낳는 몇 가지 이익을 상기시키고자 한다.
‘메이드 인 코리아’가 알려지며, 한국은 “아시아의 용”, 떠오르는 강력한 신흥 경제국가 중 하나로 세계에 알려졌다. 한편 한국 문화의 가치를 외국에 알리려는 광범위한 캠페인이 벌어졌고, 영화 외에 노벨 문학상 수상과 같은 다른 것들과 함께 자리매김했다. 영화는 대부분의 시도들이 실패한 지점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나는 대사관이 초청한 사람들로 가득 찬 홀에서 공연된 민속춤, 꽹과리, 민요 등 다양한 볼거리를 선사하는 공연을 봤다. 또한 프랑스 출판사가 번역 출간한 한국 소설도 읽어보았는데, 이 소설들은 전적으로 한국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아 번역이 이루어졌고 서점에서는 거의 팔리지 않는다. 여러 해 동안 언론의 칭찬 기사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문학이나 공연·예술 분야를 통해 구별되는 자기 정체성을 버리는 데 이르진 못했다. 그러다가 영화가 나타났고, 임권택 감독을 필두로 홍상수, 김기덕, 박찬욱, 임상수 감독 등이 뒤를 이으며 모든 것이 바뀌었다. 한국은 오로지 영화만을 통해 자국을 외국에 알린 거의 유일한 나라가 아닌가 싶다.
우선 명백한 측면을 보자. <춘향뎐>은 판소리를 널리 알렸는데, 그 어떤 판소리 공연도 영화 이전에는 그렇게 해내지 못했고, 그 어떤 문학 작품의 번역도 <춘향전>을 더 잘 알리진 못했다. 조금 덜 드러나는 측면으로는, 장선우 감독의 <거짓말> 그리고 박찬욱 감독이나 김기덕 감독의 작품은 오직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충동적이고 거친 아름다움의 문화에 대해 서구 관객의 관심을 이끌어왔다. 이 작품들은 틀림없이 길잡이 역할을 했고, 이어 지금까지는 관객이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한국의 춤과 민요를 좀더 잘 이해하게끔 하는 데 역할이 컸을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의 중소도시 시네클럽들이 주최한 많은 작은 페스티벌은 한국을 테마로 선보였다. 매번 영화는 다른 문화 행사들 가운데에서도 도약판의 구실을 했다. 그 결과 서점에서는 한국 작품을 전시하며 한국 역사에 대한 강연회와 한국 음식 시식회를 열고, 수업 시간에 학생들은 선생님과 함께 그것에 관해 토론하고, 태권도 시범은 그 무술의 유래를 상기시키기도 하고, 디자인학교 학생들은 한복을 주제로 한 응용 작품을 선보인다. 심지어 기업도 대중과 접촉하기 위해 이런 것들을 활용한다. 물론, 지역 언론만이 이런 행사를 소개할 뿐이다. 그렇지만 이런 행사들은 괄목할 만한 효과를 보여준다. 이런 식으로 영화가 한국의 존재를 해외에 알리는 데 한몫하는 것이다.
한국 축구의 선전이 일으킨 반향이 더 화려할지도 모르지만, 한국영화가 불러일으키는 효과보다 더 지속적이고 심층적이지는 못할 것이다. 조립 생산국의 이미지로 한정된 한국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뜨린 것이 바로 한국의 영화인들이다. 영화산업은 쿼터문제 때문에 좋은 국제 관계를 갖는 데 장애가 될지도 모르지만, 동시에 국제무대에서 이전엔 결코 없었던 한국의 목소리가 되어주기도 하는 것이다.
Les benefices indirects du cinema coreen.
En abaissant les quotas, le gouvernement a pris le risque de destabiliser l’industrie cinematographique du pays. Il a du calculer que ce risque etait necessaire pour conserver de bonnes relations avec son puissant partenaire americain. D’un strict point de vue economique, que represente ≪ Old Boy ≫ face a une annee d’exportation de voitures ? Cependant, certaines donnees echappent a une analyse strictement statistique et je voudrais evoquer quelques benefices non chiffres du travail des cineastes coreens.
A l’epoque du Made in Korea, la Coree etait aux yeux du monde une super PME, puissance economique emergeante, assimilee aux ≪ Dragons d’Asie ≫. On lanca alors une vaste campagne de valorisation de la culture coreenne a l’etranger dans laquelle s’inscrivait le cinema mais aussi, entre autres, l’obtention d’un prix Nobel de litterature. Le cinema a reussi la ou la plupart de ces entreprises ont echoue. J’ai vu bien des spectacles presentant des patchworks folkloriques de danses, percussions et chants coreens joues devant des salles remplies… d’invites de l’ambassade. J’ai lu bien des traductions de romans coreens editees dans des maisons francaises… mais entierement financees par des aides coreennes et a peine vendues en librairie. Pendant toutes ces annees, malgre des articles de presse elogieux, la Coree n’est pas parvenue a se forger une identite distincte par la scene ou les lettres. Et puis il y eut le cinema, Im Kwon-taek en tete, suivi de Hong Sang-soo, Kim Ki-duk, Park Chan-wook, Im Sang-soo… et tout a change. La Coree est peut-etre le seul pays au monde a s’etre fait connaitre a l’etranger presque uniquement par le cinema. De facon evidente tout d’abord : ≪ Le Chant de la fidele Chunhyang ≫ popularisa le pansori, comme aucun spectacle de pansori n’etait parvenu a le faire avant lui, et le recit de Chunhyang mieux qu’aucune traduction. De facon plus sous-jacente, Jang Sun Woo avec ≪ Fantasmes ≫, puis Park Chan-wook ou Kim Ki-duk ont sensibilise les spectateurs a cette culture du spontane, a cette beaute brutale qui n’appartient qu’a la Coree. Ces films ont sans doute servi de guide, ils ont permis ensuite de mieux comprendre ces danses, ces chants qui avaient jusqu’a present laisse les spectateurs indifferents. En outre, de nombreux petits festivals organises par des cine-clubs proposent des thematiques coreennes dans des villes petites ou moyennes. A chaque fois, le cinema se fait le tremplin d’autres manifestations : la librairie expose des titres coreens, on organise un buffet coreen et des conferences sur l’histoire, les classes en discutent avec leurs professeurs, l’equipe de Taekwondo rappelle lors d’une demonstration d’ou vient la discipline, une ecole de design tente quelques variations autour du hanbok. Il arrive meme que des entreprises en profitent pour nouer des contacts. Bien entendu, seule la presse locale rapporte ces evenements. Ils sont pourtant d’une efficacite considerable. Ainsi, tous les jours, le cinema fait exister la Coree hors de ses frontieres. Les repercutions des exploits footballistiques coreens furent plus spectaculaires mais moins durables et moins profonds que ceux du nouveau cinema coreen. Ce sont bien les cineastes qui ont efface le cliche d’une Coree reduite a une chaine d’assemblage. L’industrie du cinema represente peut-etre un obstacle a de bonnes relations internationales a cause des quotas, mais elle dote aussi la voix coreenne d’une presence sur la scene mondiale qu’elle n’avait jamais eue auparav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