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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의 파격 혹은 실험
2001-08-23

<오늘밤 좋은밤>의 ‘추억은 방울방울’

MBC 월요일 밤 10시55분

70년대 라디오 청취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지미 오스몬드의 ‘머더 오브 마인’(Mother of Mine)이 흘러나온다. 이 음악을 배경으로 화면에는 요즘 유행하는 복고풍을 상징하듯 검은 교복 차림을 한 개그맨들이 등장하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하다. 화면에 등장한 개그맨들은 아무 움직임 없이 조각처럼 굳어 있다. 인위적으로 움직임을 억제해 정지화면을 흉내낸 화면. 정지는 움직임보다 곱절은 힘들어 개그맨들의 몸은 가볍게 떨리고 얼굴에는 땀방울이 흐른다.

매주 월요일 밤 10시55분 MBC에서 방송하는 <오늘 밤 좋은 밤>(연출 이응주, 김정욱)의 한 코너 ‘추억은 방울방울’의 모습이다.외형적으로 <오늘 밤 좋은 밤>은 다른 코미디들과 마찬가지로 몇 가지 고정코너로 구성돼 있다. 그중에는 ‘월요 시사회’나 ‘우리시대 아버지’처럼 전형적인 코미디 포맷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코너도 있다. 하지만 나머지 세 코너, ‘2001 알까기 제왕전’, ‘총리일기’, ‘추억은 방울방울’은 모두 코미디의 관습적 웃음에서는 크게 벗어나 있다. 이중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세상의 주목을 받은 것은 ‘알까기 제왕전’이지만 파격적인 아이디어와 발상의 전환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할 만한 코너는 바로 ‘추억은 방울방울’이다.

다카하다 이사오의 애니메이션에서 제목을 따온 ‘추억은 방울방울’이 가장 앞세우는 것은 애니메이션과 마찬가지로 회고 정서이다. 2000년대 최고의 문화상품 코드인 복고정서, 그중에서도 영화 <친구>와 드라마를 통해 최근 신세대들에게 고감도로 감정이입된 70, 80년대의 교복 문화가 이 코너의 표면적인 컨셉이다.

소재로만 보면 그리 새로울 것이 없다. 코미디에서 교복문화의 추억을 이용한 아이디어는 이미 임하룡의 ‘다이아몬드 스텝’만큼이나 오래됐다. 보는 이를 경탄케 하는 것은 바로 이 회고정서를 불러일으키는 방법이다. 움직임이 없는 정지동작을 통한 개그. “새로운 아이디어가 없을까 끙끙거리다가 전에 본 만화책의 한 장면이 문뜩 떠올랐다. 사람을 정지시키면 어떨까?“ <오늘 밤 좋은 밤>의 연출자 이응주 PD는 그 발상을 ‘추억은 방울방울’에서 완성시켰다.

‘움직이는 개그에서 정지동작의 패러디로 바뀐 것이 그렇게 대단한가’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코미디는 시간의 패러다임 속에서 펼쳐지는 예술이다. 흔히 개그맨들이 ‘터졌다’고 표현하는 폭소 메커니즘의 핵심은 정교한 타이밍, 그리고 ‘시간차 플레이’이다. 아무리 기발한 아이디어의 개그라도 그것이 적절한 타이밍에 구사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썰렁한 농담’에 불과하다. 아무리 평범한 대화라도 0.1초 내지 그보다 더 세밀한 시차를 두고 빨리 벌어지거나 늦게 일어나는 절묘한 시간조절의 마술을 통해 사람들은 포복절도한다. 오죽하면 베테랑 개그맨 이홍렬마저 “마음먹고 던진 조크에 대해 객석의 반응이 나올 때까지 불과 1초도 안 되는 동안 머리 속으로 ‘내가 적절할 때 (조크를) 던졌을까’라는 반문을 수십번한다”라고 말할까?

‘추억은 방울방울’이 대단한 것은 그동안 코미디를 지배해왔던 이런 ‘시간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공간,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화면의 ‘미장센’을 통해 웃음을 유도한다는 점이다. 개그맨들이 경련까지 일으키며 구성한 화면은 마치 공들여 정교하게 조작한 세공품처럼 구석구석 기발한 모습들을 하고 있다.

흔히 기존의 방송 프로그램(드라마를 포함해서)들이 화면 중앙의 ‘주인공’에게만 초점을 맞추는 것과는 달리 이 코너에서는 오히려 화면 한 구석에 시치미 뚝 떼고 천연덕스럽게 자리잡은 인물의 모습이 더 기발한 반전의 묘미를 준다. 다른 프로그램이라면 ‘행인 1’이나 ‘학생 2’에 속할 인물에게 오히려 웃음의 포인트가 있는 것이다. 연속적으로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화면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이곳저곳 꼼꼼히 뜯어보면서 하나하나 웃음거리를 찾아내는 즐거움은 시청자에게 숨은 그림 찾기를 하는 듯한 재미를 준다. 그래서일까, 이응주 PD가 손꼽는 연기자도 서춘화이다. 그녀는 장면의 핵심인물이 아니다. 어떤 때는 선생, 어떤 때는 지나가는 행인이 되는 서춘화는 흔히 말해 어깨 너머의 움직이는 배경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매장면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면서 다양한 모습을 연출하는 그녀에게서 우리는 글의 행간을 읽듯, 아기자기한 화면구성의 잔재미를 발견한다.

‘추억은 방울방울’이 시도하는 웃음의 형태는 또 있다. 몇번의 시청을 통해 이 코너의 특성에 익숙해진 시청자들을 겨냥한 의표를 찌르는 상황 연출이다.

한 사람은 넘어지려 하고, 다른 사람은 그 위로 덮치려 하고…. 치밀하게 계산된 구도 속에 정지동작을 취한 한 무리의 사람들. 그런데 그 앞으로 누런 시골 개 한 마리. 분위기 모르고 천연덕스럽게 지나간다.

바로 인위적으로 구성한 ‘시간의 멈춤’ 위에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시간의 흐름’을 덧씌워 웃음을 유도하는 것. 뭐, 어렵게 설명했지만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기차역에서 뛰는 모습을 정지장면으로 연기하지만, 불어오는 바람이나 뛰어다니는 동네 강아지를 막을 수는 없는 것이다.

‘추억은 방울방울’은 정해진 틀 위에 안주하려던 기존의 코미디 프로에 새로운 자극이다. 물론 ‘그래봐야 코미디의 한 코너에 불과한데, 웬 호들갑이냐’라고 못마땅하게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참신한 감성으로 쓰여진 짧은 시가 대하소설 한편보다 더 깊은 감동을 주기도 한다. 웃음의 밀도에는 시간의 양이 중요한 변수는 아닌 것이다.

한마디 더 ‘추억은 방울방울’의 기발함은 일본까지 알려져 얼마 전에는 일본의 한 민방 제작진이 찾아와 제작현장을 견학하고 가기도 했다. 그동안 우리가 늘 모방의 대상으로 삼던 일본 코미디에서 거꾸로 배우러 온 셈이다. 코너의 아이디어에 대해 자신감을 얻은 이응주 PD는 얼마 전 ‘추억은 방울방울’의 아이디어로 실용신안특허를 신청하기도 했다.

김재범/ 스포츠투데이 기자 oldfield@sports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