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연/ 문화평론가·문화개혁시민연대 사무차장
지난 8월30일 헌법재판소가 ‘영상물등급위원회’(이하 등급위)의 등급보류를 정당화했던 ‘영화진흥법’ 21조4항을 위헌으로 판정함으로써, 이제 본격적인 완전등급제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최초의 등급기관인 66년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가 생긴 이래 40여년 가까이, 더 멀리는 일제의 흥행 및 취체에 관한 법률 이후 80년 가까이 이어져온 검열의 아픈 역사가 ‘치유를 위한 유산’으로 사라지기에 헌법재판소의 위헌판결 사유는 너무나 간단 명료했다.
등급분류는 엄연히 등급을 전제로 한 행정적 결정인 바, 등급을 보류하는 행위는 특정한 사상과 표현을 사전에 억제, 금지하는 검열에 해당되어 헌법 21조에 위반된다는 것이다. 대단히 상식적인 논리가 법적 정당성을 갖기까지는 많은 세월의 이해가 필요했던 셈이다.
등급보류 위헌판정이 앞으로 우리 영화시장의 관리시스템과 영화를 관람하는 문화환경에 어떤 파급효과를 끼칠까?
먼저, 이번 등급보류 위헌판정은 등급심의의 관행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가능케 했다. 이제 모든 영상물들이 등급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현재의 등급심의 기준은 상향조정되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 영화 등급심의에서 가장 큰 문제는 영화적 맥락의 상실에 있다.
특정한 장면이 영화 전체의 맥락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따져보기 전에, 그 장면이 즉물적으로 표상하는 바의 ‘시각적 불쾌감’에 심의의 촉수가 곤두서지 않았나 싶다.
요컨대 18세 관람가와 등급보류 사이의 심의경계 논쟁은 이제 15세 관람가와 18세 관람가의 경계논쟁으로 이행될 수 있다는 점이고, 이 과정에서 성기 중심적인 심의의 관행들은 문화적 판단이란 맥락하에서 해체되어야 하는 과제를 남겨놓고 있다. 가령 올 부천영화제에 소개되었던 일본영화 <비지터 Q>가 근친상간과 부모학대, 시간(屍姦)과 같은 극단적 표현을 담고 있었음에도 일본에서 15세 이상 등급판정을 받은 것은 영화의 문맥에 대한 고려 때문이었다.
물론 15∼18세 관람가의 경계논쟁은 그 자체로 등급 세분화의 문제와 등급위원들 구성의 문제를 함께 함축하고 있다.
그런데 모든 영상물은 등급을 받아야 하는가? 등급보류라는 제도는 알게 모르게 창작자들에게 문화적 표현과 그것의 사회적 정당성에 있어 자기검열을 강요해왔다. 등급보류는 반드시 등급을 받아야 된다는 것을 자명하게 받아들이게 하는 ‘안전핀’이자, 등급과 검열의 순종의식에 대한 일종의 확인사살과도 같은 것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다면 등급을 거부하는 영상물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러한 요구가 표현의 자유라는 기본 명제하에 받아들여질 수 있다면, 결국 등급을 거부한 작품에 대한 수용의 문제로 이월될 수 있다. 등급심의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면, 그 작품들을 볼 수 있는 권리도 있기 때문이다.
아직 요원하긴 하지만, ‘등급’과 ‘등급보류’라는 싸움의 대당은 이제 ‘등급’과 ‘등급거부’라는 대당으로 이행할 여지를 남겨놓은 것이다. 등급거부가 단순히 대안없는 급진주의나 상업적 불법제작의 의미가 아니고 스스로 창작물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주장하는 것이라면, 오히려 완전등급제의 시대에서 상대적으로 허용할 수 있는 가능한 대안이라고 본다.
요컨대 등급거부에 대한 권리를 상대적으로 허용하는 대신에 상영공간을 극히 제한함으로써 창작자와 수용자가 스스로 결정하게 하는 사회적 관리가 필요하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등급외전용관의 가능성에 대한 문제이며, 적어도 성표현물에 관한한 최초의 소프트코어 포르노 전용관의 허용과도 연관되어 있다.
완전등급제에서 등급외전용관은 이제 필수적이게 되었다. 그런데 등급외전용관이 성인용 제한상영관의 기능을 하면서, 요컨대 <거짓말> <노랑머리>와 같은 포르노적이지 않은 성표현물을 상영하는 장소가 된다면, 오히려 영화시장과 수용의 환경에 후퇴를 가져올 것이다. 그런 점에서 등급외전용관은 어정쩡한 성인전용관보다는 포르노전용관으로의 성격규정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 주장은 앞으로 많은 논쟁과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어쨌든 등급보류 위헌판정이 그 본래의 취지에 값할 수 있도록 좀더 급진적인 주장이 지금 긴요할 때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