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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고한 이미지에 기댄 감동의 공허함, <머나먼 사랑>

겉은 구호활동에 헌신하는 이들의 비극적인 사랑. 속은 자비심까지 가진 자신이 너무 예쁜 공주병 환자가 꿈꾸는 공허한 로맨틱 어드벤처 판타지.

전쟁과 질병, 기아에 허덕이는 곳을 찾아다니며 난민들을 구호하는 영국인 의사. 그리고 런던 상류 가정의 미모의 유부녀(직업은 화랑 큐레이터이다). 이 둘의 사랑 이야기라면 어떤 영화일지 짐작이 갈 것이다. <머나먼 사랑>은 대의명분까지 갖춘, 그러나 그 대의명분 때문에 이뤄지기는 힘든, 그래서 더 마음 깊이 고결하게 새겨지는 로맨스에 어드벤처를 곁들인 감동의 드라마가 되기를 의도한다. 그러나 의도에 멈춘다. 극적인 로맨스를 만들기 위해 가난하고 힘든 도처의 나라에서 불필요한 악인들이 만들어지고, 의사 남자의 동기도 모호해진다. 이쯤 되면 구호활동이라는 대의명분은 공주병 환자의 장신구로 전락하는 느낌이다. 진짜로 구호활동에 전념하는 사람들이 보면 짜증이 많이 날 것 같다.

남자 의사는 닉(클라이브 오언)이고 큐레이터 유부녀는 조르단(안젤리나 졸리)이다. 조르단이 닉을 처음 본 건 런던의 한 자선단체 파티장이다. 에티오피아에서 구호활동을 하던 닉이 이 파티장에 나타난 건 구호기금을 줄이기로 한 자선단체의 결정에 항의하기 위해서다. 정의감 강하고 다혈질로 보이는 닉이, 턱시도 빼입고 폼만 잡는 신사들에게 일갈하며 파티장을 깽판놓는 건 그래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닉은 그 자리에 에티오피아의 깡마른 어린이 한명을 데리고 왔다. 기아에 허덕이는 그곳의 현실이 이렇다며 “이 아이를 봐라!”고 외친다. 일종의 충격요법을 의도했을 텐데 누더기 같은 옷을 걸친 그 어린이는 부끄러움이 없을까. 이렇게 행동하는 구호활동가가 있을까.

파티장 한구석에 앉아 있는 조르단이 닉을 보며, 닉의 말을 들으며 눈물을 흘린다. 이것도 이해할 수 있다. 사랑은 그렇게, 자기의 마음을 끈 게 정작 무언지 모호한 채로 감동하며 시작할 수 있다. 기부금을 챙겨들고 에티오피아로 직접 찾아온, 하얀 옷의 천사 같은 조르단에게 닉이 마음이 끌리는 것도 문제될 게 없다. 문제는 영화다. 그 사랑을 치장해주기 위해 에티오피아, 타이, 체첸 난민들의 비참한 이미지, 그곳의 ‘폭도’들의 잔혹한 횡포를 쉴새없이 끼어넣는다. 급기야 자선기금이 끊긴 닉이, CIA와 손을 잡기까지 한다. CIA의 문건 같은 걸 ‘반군’한테 건네주고서 구호물자를 받는다. 그 구체적인 거래 내역은 잘 드러나지 않지만 이쯤 되면 닉이라는 인물이 제정신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영화는 의심하지 않는다. CIA의 공작을 그리 나쁘게 보지 않는 시선이 깔려 있지 않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할리우드영화에서 그런 게 한두편이겠냐마는, 이 영화에서 사랑의 질감은 캐릭터나 남녀 사이의 갈등없이 전적으로 구호활동의 숭고한 이미지에 기대고 있다. 그 이미지가 왜곡되는 마당에, 사랑엔들 남는 게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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