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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륜도 살짝 구으면 로맨스가 된다, <주노명 베이커리>

“좋은 빵을 만드는 것은 좋은 사랑을 하는 것과 같다.” 영화 첫머리에 소개되는 주인공의 신조는 <주노명 베이커리>의 아이디어가 어디서 나왔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빵 배달을 갔던 주노명이 몰래 집에 들어가 잠든 아내의 몸을 더듬는 장면에선 보다 직접적으로 표현된다. 아내의 신음소리에 맞춰 수십겹의 페스츄리로 이뤄진 빵이 달콤하게 부풀어오른다. 점점 커지는 빵처럼 사랑은 만족감에 취한다. 그러나 행복이란 이런 것일까, 싶은 순간 주노명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결혼한 지 10년된 부부, 매일 빵집 카운터에 앉아 아파트로 둘러싸인 풍경만 바라보는 여자에게 늘 빵처럼 부풀어오르기를 요구할 순 없을 것이다.

<주노명 베이커리>는 주노명에게 닥친 위기에서 본격적인 드라마를 시작한다. 흔히 불륜이라고 또는 중년의 로맨스라고 말하는 그것을 주노명의 아내 역시 체험한다. 그 대상이 고릴라같은 남자 박무석이지만 이 남자는 보기보다 괜찮다. 아무도 몰라주는 주노명의 빵 만드는 솜씨를 박무석은 알아주지 않는가. 아내의 곁눈질에 마음 상하면서도 주노명은 이 남자가 밉지 않다. 아니, 오히려 고맙다. 박무석으로 인해 아내의 삶이 즐거워졌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눈치챘겠지만 <주노명 베이커리>는 현실에서 불가능한 판타지를 다룬 영화다. 자기 아내가 바람피는 걸 고마워하고 부추기는 남편이라니, 가당키나 한 일인가. <해피엔드>의 살인같은 극단적 방법을 쓰진 않더라도 질투심이 이성을 마비시키는 게 일반적일 텐데 이 영화의 각본을 쓰고 연출한 박헌수 감독은 아주 엉뚱한 방향으로 사건을 몰고간다.

‘불륜도 살짝 구으면 로맨스가 된다?’는 홍보문구처럼 그는 불륜에 드리운 위선, 타락, 욕정, 배신, 질투, 분노의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내고 희생과 헌신이라는 하얀 생크림을 입힌다. 이건 꽤 눈길을 끌만한 발상인데다 신선하고 따뜻해서 사람들 마음을 녹이는데는 그만이다. 게다가 사태는 점점 더 낭만적으로 발전한다. 아내의 외도를 위해 박무석의 아내를 만난 주노명이 그녀와 사랑에 빠지는 대목에서 박헌수 감독의 낙관주의는 정점에 이른다. 두 부부는 꿈을 꾼다. 서로 상대방 아내와 연애하면서 주노명과 박무석은 친구가 되고 넷이 함께 소풍을 가서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이것이 <주노명 베이커리>가 궁극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낭만적 환상의 실체다.

이런 류의 영화에서 성패를 좌우하는 관건은 그럴싸한 주인공이 있느냐다. 로베르토 베니니가 나오지 않는 <인생은 아름다워>를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짓기란 쉽지 않을 게다. <주노명 베이커리>에선 그 역을 최민수가 맡았다. 한 시대를 대표할만한 터프가이에게 대책없는 낭만파 남편을 맡기면서 감독은 감정이입의 기재로 내레이션을 택한다. 주노명의 사고방식과 소신이 아주 직접적인 독백으로 전달되는 것이다. 하지만 최민수가 연기하는 착하고 순박한 주인공 주노명은 모통신회사 CF에 등장했던 바보연기를 연상시켜 부담스럽다. 철학자처럼 기품있는 내레이션과 조금 모자라보일만큼 과장된 연기 사이의 불일치는 쉽게 메워지지 않는다. 두 부부로 이뤄진 사랑의 방정식을 푸는 방식도 사랑을 빵에 비유한 뛰어난 발상에는 못미친다. 최민수, 황신혜, 여균동, 이미연 등 중량감 있는 배우들로 구색을 갖췄건만 딱 떨어지는 궁합은 아니어서 그들이 느끼는 연애감정이 화면 밖까지 배어나오지는 않는다. 주노명의 빵에 관한 철학에 비유하자면 반죽이 익을 시간이 부족한데 충분히 부풀어오르지 않은 감정에다 ‘사랑’이라는 포장을 입힌 격이다.

<결혼이야기> <그남자 그여자>의 시나리오 작가로 출발한 박헌수 감독은 <구미호> <진짜 사나이>에 이어 이 영화가 세 번째 연출작. 기본적으로 풍성한 상상력에 기반한 이야기꾼인 그는 판타지를 통해 현실을 뒤집어보길 즐긴다. 소심한 사회 열등생이 악의 무리를 처단하는 영웅이 되는 <진짜 사나이>가 비굴함을 강요하는 현실을 비판하는 것처럼 <주노명 베이커리>는 아내의 행복을 위해 불륜도 참을수 있는 남자를 통해 결혼제도가 갈라놓는 인습의 벽을 무너뜨리려 한다. 그리고 두 가지 해결책을 제시한다. 하나는 결혼 50주년을 앞두고 5단짜리 케이크를 주문하는 노부부처럼 고락을 함께하며 끝까지 사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이 통하는 부부들끼리 남의 남편과 아내와 연애하는 걸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남에게 해가 되지 않을 착한 꿈이지만 최면을 거는 방법이 서투른 게 흠이다.

박헌수 감독 인터뷰

“<아이스 스톰>처럼 찍고 싶지는 않다”

-발상이 신선하다. 이야기를 구상한 계기는.

=음식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예전에 신씨네에서 <냉면전쟁>이라는 영화를 기획한 적도 있고. <음식남녀> <바베트의 만찬> 등 외국에선 음식과 인생을 연결시킨 영화들이 있는데 우리나라엔 없지 않나. 구체적으로는 아내가 제빵기술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데 제빵교본 타이핑하는 일을 도와주다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제빵교본에 나와있는 경구들이 부부생활 또는 우리 인생살이와 맞아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또다른 계기는 내가 <진짜 사나이> 실패하고 집에 틀어박혀 있을 때 아내가 한숨쉬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그게 꼭 생활고나 외로워서 그런 건 아닐거다. 그냥 30대 부부라면 숙명적으로 닥치는 한숨이 아닐까 싶었다. 그런 모티프들이 오락가락하면서 <주노명 베이커리>의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처음부터 주인공으로 최민수를 염두에 뒀나

=아니다. 오히려 우연히 시나리오를 본 최민수가 먼저 하고 싶다는 연락을 해왔다. 처음엔 최민수는 아니다 싶었다. 워낙 터프가이 이미지가 강해서 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직접 만나서 얘기하다 보니까 잘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본인 스스로 애착을 갖고 있는데다 시나리오에 대한 이해가 빨랐다. 최민수가 주노명 역을 해준 걸 고맙게 생각하고 연기에 만족한다.

-지나치게 과장하는 연기를 보여줬다는 생각은 안드나

=최민수 연기가 과장된 걸로 보였다면 그건 내 잘못이다. 내 입장에선 오히려 더 과장하고 싶었는데 못해서 아쉽다. 사실 내 연출스타일이 비현실적인 연기를 요구하는 편이라 연기자들이 힘들어했다.

-<진짜 사나이>도 그렇고 <주노명 베이커리>도 판타지에 가깝다

=내 영화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투영하는 영화는 아니다. 진실성을 갖고 출발하지만 그걸 한번 꼬거나 뛰어넘어 이야기하는 쪽이다. 영화가 현실을 100% 사실대로 재현한다고 해서 무슨 소용이 있는지 싶다. <아이스 스톰>같은 영화를 보면 사는 게 정말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난 그렇게 찍고 싶지는 않다. 부부싸움을 하고 나서 봤을 때 위로받을 수 있는 영화였으면 싶다.

-네 사람이 서로 엇갈리며 사랑하지만 그들의 감정이 잘 드러나진 않는데

=애당초 드라마를 따뜻하게 만드는데는 별 관심이 없었다. 상황을 만들고 그 안에 인물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중요했다. 바람피면서 더 관대해지고 열정적이게 되는 상황이 흥미로왔다.

-영화의 결말에 결혼 50주년이 된 노부부를 배치함으로써 결혼제도에 안주하는 듯한 느낌인데

=아니다. 이상적인 모습은 오히려 마지막에 두 쌍이 함께 어울리는 장면에 담겨있다. 뭐 꼭 정답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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