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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의 비릿함에 중독되다, <중독>의 이병헌

이병헌이 어딘가 낯익은 위험한 사랑에 조금씩 빠져들고 있다. 그가 1년 반 동안의 휴식을 접고 선택, 촬영중인 새 영화 <중독>은 그의 전작 <번지점프를 하다>를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많다. 지난번이 ‘환생’을 코드로 하는 사랑이었다면 이번에는 ‘빙의’라는보다 섬뜩한 현상을 모티브로 삼은 사랑이다.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죽은 애인의 환생인 남자 제자와 사랑에 빠지는 교사를 연기했던 그가, 새 영화 <중독>에서 식물인간이 된 형의 영혼이 빙의된 채 형수에 대한 연모를 앓는 카레이서 ‘대진’을 연기하고 있다. 그것은, <번지점프를 하다>의 경우보다 어려우면 어려웠지 쉽지 않아 보인다.

<중독>의 이야기는 이렇다. 카레이서인 동생 대진은 가구공예가인 형 호진(이얼), 그리고 형수(이미연)와 한집에 살고 있다. 어느 날 카레이싱 도중에 대진은 큰 사고를 당하고 같은 순간 형 호진도 빗길에 택시사고를 당해 둘 다 혼수상태에 빠진다. 대진 혼자 정신을 되찾지만, 어쩌면 깨어난 건 대진이 아니라 호진이다. 대진에게 호진의 영혼이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이후, 사고 이전부터 왠지 형수에게 연정을 가진 듯했던 대진은 형수와 이상한 방식으로 사랑을 하게 된다. “연기자에게는 경험이 중요하죠. 한번 해본 것은 연기하기가 훨씬 수월하거든요. 그런데 빙의라는 것은 일상생활에서 접하기 힘든 것이잖아요. (웃음) 뭐, 거의 SF 연기를 하는 기분이에요.”

그래도 이병헌이 뭔가 대진에 대해 일상에서 비슷한 연결고리를 찾아낸 게 “마니아”라는 것이다. 형수와의 위험한 사랑에 빠져드는 시동생을, 그는 빙의라는 기현상을 떠나 한명의 ‘마니아’로 해석한다. “대진은 모든 게 마니아인 친구예요. 대학 때는 사진에, 직업적으로는 카레이싱에…. 사랑도 사실 중독의 일종이죠. 주변 제 친구들 중에 마니아적인 친구들을 보면 거의 다 몸이 말랐더라구요. 그래서 저도 6kg이나 체중을 줄였어요. 왠지 그런 사람은 담배도 독한 걸 피울 것 같아 독한 담배도 준비하고…. 근데 살을 빼고 나니 예상치 못하게 조금 어려 보이는 분위기가 생긴 것도 같네요.”

다른 사람의 영혼이 씌운 사람의 섬뜩한 눈빛, 비정상적인 광기의 비릿한 냄새와 더불어 체중감량으로 어딘지 앳된 얼굴표정까지 갖게 된 이병헌은, 그러나 영화 <중독>에서 <그들만의 세상>(1996) 이후 거의 보이지 않았던 섹스신을 소화해야 한다. 상대는, 1998년작 <내 마음의 풍금>에서 시골학교의 동료교사로 공연했던 형수 역의 이미연. 조금은 긴장될 만도 한데, 이병헌은 “보여주냐 안 보여주냐의 차이일 뿐, 전체적으로는 <번지점프를 하다>와 대동소이한 분위기의 영화예요”라며 여유를 보인다. 지금 <중독>은 촬영이 60% 정도 진행된 상태. 1년 반을 쉰 뒤 오랜만에 영화촬영장에 섰을 때의 긴장에 비하면, 지금은 많은 게 편안해진 듯하다. “아휴, 처음 촬영장에 나가는데 어찌나 긴장돼던지요.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져서, 내가 과연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아닌지도 모르겠더라구요.” (웃음)

애니메이션 <마리이야기>의 목소리 연기를 하기는 했지만, <번지점프를 하다> 이후 이병헌은 드라마 <아름다운 날들>과 여러 편의 CF에만 모습을 드러내고 언론과의 인터뷰도 거의 하지 않아왔다. 휴식기라면 휴식기라고 할 수 있던 시간들. 그가 긴 ‘안식년’을 가졌던 이유는 무엇일까 궁금하다.

“급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어요. 배우들이 한참 작품할 때 보면 일하는 게 좋아서가 아니라 불안감 때문인 경우가 많아요. 쉬면 뭔가 내 입지를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저도 사실 그런 불안감이 있는 배우에 속하거든요. 그것을 이겨보고 싶었어요. 박찬욱 감독이 저한테 그랬듯이, ‘어차피 평생 할 것’이니까요.”

거의 SF적인 특이한 사랑 이외에, <중독>에서 이병헌이 마니아 대진이 되어 독기를 내뿜는 또 하나의 무대는 카레이싱 트랙이다. 아마추어 차량기종으로는 레이싱을 해봤지만 본격적인 레이싱은 해본 적이 없었던 그는, 촬영 전 사흘 동안 아무도 없는 트랙에서 카레이싱을 연습했고, 지금은 면허를 취득할 수준까지 올랐다고 한다. 최고속도는 얼마까지 내봤냐고 물으니, “그게, 생각보다 많이 안 나오더라구요. 속도를 많이 낸 것 같아도 시속 140km밖에 안 되더라구요. (웃음) 트랙이 곡면인데다가 커브가 많아서 속도를 더 내면 꼭 밖으로 튕겨나갈 것 같았어요”라고 쑥스러워하며 말한다.

<누가 나를 미치게 하는가>(1995)로 영화데뷔한 이후 8번째 영화를 찍고 있는 이병헌은 이제 드라마 데뷔까지 치면 경력 10년의 서른세살 먹은 베테랑 배우다. <공동경비구역 JSA>와 <번지점프를 하다>로 특유의 뺀질하면서도 울림있는, 독특한 연기의 질감을 체득해온 그는 <중독>으로 비뚤어진 광기라는 새로운 토핑을 한겹 더 얹게 됐다. 트랙에서 튕겨져 나가는 것과 트랙을 감고 도는 것 사이 경계에만 존재하는 최적 최상의 속도. 이병헌이 1년 반만의 새로운 레이스에서 그 아슬아슬한 경계선상의 속도로 내처 치달을 수 있을지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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