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한국독립영화협회에서 진행한 ‘독립영화 쇼케이스’에 비평으로 참여한 나는 <괴인> 안에 한국영화 속 인물들이 관류한다고 평하며 명장들의 영화와 연결지었다. 특히 이창동의 <버닝>과 봉준호의 <기생충>을 결합한 형태처럼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유는 인물 구성과 특정 세대의 감각 그리고 건축의 형태와 계급성이 <괴인>의 구성 요소이기 때문이다. 또한 웃음을 유발하는 특정 상황과 대화에서 홍상수의 영화 같다고 두루뭉술하게 이야기했는데 이후에 <괴인>에 대해 곱씹을수록 그 인상은 사라졌고 구체적으로 단 하나의 작품만이 떠올랐다. 그것은 홍상수의 데뷔작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다. 따라서 <괴인>을 두고 “계보를 찾을 수 없는 새로운 영화”라고 평한 것은 반 정도 맞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계보학적으로 추적이 가능하지만, 그것이 눈에 띄지 않는 새로운 영화다.
불안이 건져올린 비일상성
다시 돌아와 <괴인>의 유니크한 엔딩에서 시작해보자. 침대에 누운 기홍(박기홍)이 눈을 붙인다. 부감숏으로 찍은 그의 얼굴을 엔딩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의 얼굴 다음으로 몽타주하는 흰색 이미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기 전까지 그 짧은 시간에 사고는 정지한다. “뇌는 스크린”이란 말처럼 우리는 잠시나마 새하얗게 질린 한 남자의 머릿속과 동기화된다. 긍정적인 의미에서 모든 것이 펼쳐질 것만 같은 가능성을 지닌 흰색 스크린은 결코 아니다. 여백 없이 오만가지 생각으로 꽉 찬 이 흰색 스크린에서 도망칠 곳은 딱히 없어 보인다. 최악의 수는 다름 아닌 ‘죽음’이다. 바로 여기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엔딩과 연결된다. 영화상에 명시하진 않았으나 보경(이응경)이 새벽녘에 배달된 신문에서 확인했을 법한 살인 사건 기사와 베란다 문을 열고 자살을 암시하는 몸짓에 짙게 깔린 서늘함은 <괴인>과 공유하는 정서다. 차이점은 <괴인>은 세대의 감각을 끌어들인다는 점이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역시 거슬러 올라가면 에드워드 양의 <공포분자>가 기다리고 있다. 두 영화 각각 타이베이와 서울이란 도시를 배경으로 인간의 불안, 고독, 권태, 공허 등을 그린다. 두 영화의 유사성은 급격한 도시화로 인한 사회적 진통에서 기인하기에 후기 자본주의사회가 창안할 수 있는 보편적인 서사라 볼 수 있다. <괴인>도 얼핏 보면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관계없는 사람들이 모이고 마지막엔 죽음을 상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앞서 언급한 두 영화와 결이 같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도시는 중요한 배경이 아니며 여러 인물의 삶 또한 비추지 않는다. 영화는 기홍의 시선으로 괴상하게 되어버린 세계(혹은 대한민국)를 바라보며 물음표를 짓는다. 이 의문은 우연한 사건에 의해 촉발한다. 사건은 주차된 기홍의 차 위로 누군가가 뛰어내려 차 지붕이 찌그러진 것이다. 범인을 우연히 발견한 기홍은 그를 용서한다. 집주인 정환(안주민)의 아이디어로 범인인 하나(이기쁨)가 집에 초대되고 모든 인물이 한자리에 모인다. <괴인>은 표면적으로 의문의 사건을 파헤치는 스릴러 장르를 표방한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재미를 주지만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3040세대가 처한 내면화된 불안이 존재한다. <괴인>은 이 세대가 처한 불안의 원인을 파헤치고 이를 해결하는 보통의 서사를 택하지 않고, 불안을 감각적으로 형상화하며 일상에 가려진 비일상성을 드러내는 세련된 영화적 연출을 선보인다.
기홍의 방이 의미하는 것
<괴인>은 불안을 ‘방’이라는 축소된 공간에 담아낸다. 영화에서 방은 일종의 정신이다. 그렇다고 기홍이 세 들어 사는 방의 모습이 많이 나오진 않는다. 오히려 그것의 변주된 공간들이 중요한데 기홍의 차와 공사 현장이 바로 그것이다. 찌그러진 그의 차는 프레임을 다 들어내는 대공사가 필요하다는 견적을 받는다. 이때 기홍이 카센터 아저씨와 나눈 대화를 통해 대한민국의 특수한 시대적 맥락이 영화에 기입된다. 아저씨는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를 보고 자란 3040세대에 대해 한탄한다. 아저씨가 한숨 쉬는 포인트는 부풀려진 희망과 그것을 지탱할 기반이 부재한 세대의 감각이라고 정리할 수 있는데 그것은 기홍의 차로 형상화된다. 여기에 공사 현장에서 천장에 석고보드를 붙일 때 요령 없이 연신 쏘는 타카총의 대비를 통해 이 세대가 처한 곤경과 불안을 여실히 드러낸다. 주목할 것은 공간 내부다. 그의 차 안에는 무리해서 사놓은 장비들과 제때 버리지 못한 쓰레기들로 꽉 차 있다. 꽉 차 있으나 빈 상태로 그곳을 채운 것은 다름 아닌 기홍의 허세다. 기홍은 그 기세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지 모른다. 다른 공사 현장에는 목재가 썩어 바퀴벌레가 나온다. 안이 텅 비다 못해 썩어가고 있는 그의 정신 상태는 다름 아닌 공허다. 하지만 돌이킬 수 없다. 기홍은 익숙해지는 법을 택한 것 같다. 그가 멍이 든 것처럼 액정의 한 부분이 동그랗게 검게 죽은 스마트폰을 쉽게 바꾸지 못하고 계속 사용하고 있듯이 말이다.
한편 집주인 정환도 기홍처럼 공허하다. 그의 공허함을 형상화한 공간은 바로 기홍이 세 들어 사는 방이다. 정환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세를 놓았다는 부인 현정(전길)의 말이 무섭게 다가오는 이유다. 기홍의 허세를 충족시키는 정환의 집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유혹의 장소다. 정환은 사소했던 사건을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만든 장본인이다. 기홍은 정환의 자장 안에서 이리저리 휘둘릴 뿐이다. 따라서 엔딩에서 봤던 흰색 이미지는 기홍의 얼굴에 파묻혀버린 거대한 눈덩이기도 하다. 영화의 시작도 흰색 이미지였다. 이것은 누구의 머릿속일까? 어쩌면 정환의 머릿속인지도 모른다. 이 스크린에 정환의 공허함을 채우는 셋방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영사될 것이다. 이 방은 무너지지 않는 하나의 영화관이다. 같은 방식으로 <버닝>의 벤은 자신의 공허함을 여자들의 이야기로 채웠고 지겨워질 때쯤 하품을 하고 비닐하우스와 함께 태우기를 반복해왔다. <기생충>에선 인간은 벌레로 격하되었고 <괴인>에선 기홍은 정환의 애완용 개 신세를 면치 못한다. 근래의 영화 속에서 이른바 청년 세대의 위상은 인간이 아닌 사물 혹은 비인간 취급을 받아왔다. 이들이 처한 불행은 한낱 구경거리가 돼버린 것은 아닐까? 실존적 위기라는 비상사태지만 기홍은 밀려오는 잠을 막을 수가 없다. 개집에 불과한 그의 방에도 볕 들 날이 올까?
기홍의 야외 테이블에 놓여 있던 물에 젖은 책 <니체의 말>에 “인생을 살아갈 때의 난간”이란 제목의 글이 있다. 낙상 사고를 막기 위해 난간이 있듯이, 특히 젊은 사람에게는 의지할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니체는 말한다. 이유는 이들이 스스로 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더욱더 잘 살기 위해서다. 기홍 역시 난간 없는 곳에서 추락을 버티고 서 있다. <괴인>을 포함해 근래의 한국영화에서 아득한 절망이 앞에 놓인 홀로 된 젊은 남성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엔딩의 흰색 이미지는 어쩌면 한국영화가 지금 ‘난간’을 상상할 때라고 알려주는 섬광탄은 아닌지 문득 생각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