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 두달차,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관객수 19만명을 넘어서며 예상치 못한 호응을 얻고 있다. 홀로코스트라는 주제의 무게와 영화의 비상업적 화법을 떠올리면 이례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평단만이 아니라 대중 또한 이 작품이 전위적인 형식으로 압도적인 체험에 이르게 하며, 무엇보다 그 과정이 ‘윤리적’이라는 견해를 공유한다. 망설임 없는 호평의 물결 속에서 이 영화에 대한 이견을 제기하려고 한다.
홀로코스트 영화로서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형식적 야심은 이미지와 사운드를 재현하는 두 가지 선택에서 빚어진다. 우선 이 영화는 아우슈비츠수용소 바로 옆에 긴 담장을 치고 사는 나치 가족에 초점을 두는데, 한자리에서 움직임을 자제하는 카메라가 이들의 모습을 담는다. 반면, 담장 건너 수용소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이미지가 아닌 사운드로만 나치 가정의 장면을 부유한다. 요약하자면, 프레임 내부의 이미지와 외부의 사운드가 접촉하며 일으킨 불쾌한 긴장이 이 영화의 도전적인 시도로, 관객들이 받은 충격적인 감응의 근거로 회자된다. 그러나 관람자 대다수가 <존 오브 인터레스트> 감상 후기에 동원하는 ‘악의 평범성’이나 ‘재현 불가능성’처럼, 상투적으로 남용되기 쉬운 개념의 모호하고 과장된 기운을 걷어내면 이러한 형식이 의도하는 바는 다소 도식적으로 읽힌다.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에게 시선의 방향을 옮겼다고 해도, 이 작품이 기존 홀로코스트 영화들보다 급진적인 층위에서 질문의 틀을 전복한다고 보긴 어렵다. 그렇다면,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평이한 문제의식을 과도한 형식으로 치장한 영화에 불과하다고 말해야 할까. 간단하게 판단할 일은 아닌 것 같다. 이 영화로 들어가는 문을 달리 찾아야 할 것이다. 형식이 꾀한 윤리를 성급하게 단정하기 전에, 형식에 잠재된 욕망을 면밀하게 살펴보는 일이 시급해 보인다.
“어떤 묘사나 장면도 그들의 진면모, 끊임없이 밀려드는 그 공포를 담아낼 수는 없다.”(<밤과 안개>, 1955) 강제수용소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알랭 레네의 기념비적인 다큐멘터리 이래, 홀로코스트 영화들은 절멸의 역사를 영화 안으로 불러내 되살리는 과업과 대면해 왔다. 상업적인 문법으로 단순하게 극화하는 사례를 제외한다면, 이들은 어떤 형식으로도 그 역사에 제대로 닿을 수 없다는 자각과, 재현된 이미지가 선정적으로 대상화될 위험에 처한다는 각성 사이에서 분투한다. 앞서 말했듯,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나치 사령관 루돌프 회스의 집 너머, 수용소의 사건들을 오직 소리로 영화에 입히는 방식도 그런 고민의 극단적인 결론일 것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한계는 명백하다. 육체성을 삭제하고 고통과 폭력과 죽음을 집단화함으로써 관람자의 즉물적인 체험을 유도하는 사운드의 효과를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사운드로 한 세계의 존재를 각인하는 방식은 <존 오브 인터레스트>와 함께 자주 언급되는 <사울의 아들>(슬로 네메시, 2015)에서 이미 수행되었고, 청각의 물질성이 시각의 외설성에 대한 온전한 대안이 되기 어렵다는 점 또한 일깨웠다. 다만, 두 영화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존재한다.
<사울의 아들>이 수용소 내 시체처리반에 소속된 사울의 행로에 시야를 한정하며 그를 둘러싼 죽음을 흐릿한 이미지나 프레임 밖 아우성으로 지시할 때, 화면 안과 바깥은 죽음의 장소 내부에서 서사적 연속성을 지닌다. 여기에는 카메라가 고개만 살짝 움직여도 죽음의 이미지가 금세 화면 안으로 쏟아져 들어올 거라는 가정, 달리 말해, 사울이 보는 것을 영화가 우리에게는 보여주지 않는다는 사실이 전제된다. 이 영화가 재차 강조하는 재현의 태도는 그러나 이내 난관에 부딪힌다. 수용소 한가운데서 죽음에 뒤엉킨 이야기를 추동하면서도 죽음의 이미지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는 설정의 맹목성이 오히려 어느새 장르적 서스펜스를 불러들이고 마는 것이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다르다. 여기에는 수용소와 나치 가족의 집을 가르는 공고한 담장이 있다. 조너선 글레이저는 회스 가족의 집과 수용소를 “보는 영화”와 “듣는 영화”로 나누길 주저하지 않고(<씨네21>, 1460호), 이미지 대 사운드, 평온한 일상 대 학살 현장으로 성질을 명확히 구분한다. 많은 이들은 이 영화의 고유한 밀도를 둘의 어긋남에서 찾으며, 그 감각에서 반성적 성찰이 시작된다고 여기지만, 이는 오인에 근거한다. 이러한 설계의 핵심은 이미지와 사운드의 충돌이기보다는 둘의 일시성이기 때문이다.
나치의 집과 강제수용소의 물리적 거리, 두 세계의 속성적 간격, 이미지와 사운드의 형식적 간극을 매개 없이 접합한 영화의 시도가 논의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나치 가정의 풍경과 수용소의 참상을 서사 내적 계기 없이 단번에 겹쳐둔다. 둘을 영화 안에서 뒤섞지 않고도 동시에 작동하는 한몸으로 만드는 일은 홀로코스트 영화로서 이 작품이 내세우는 당위다. 그 당위를 행여 초과할지도 모를 서사의 활동은 제한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수용소를 환기하는 사운드는 영화 안에서 딱히 서사의 기틀을 요청하지 않는 무조건적인 영역이다. 회스의 집 안팎으로 펼쳐지는 이미지는 10대의 카메라가 피사체와의 거리를 고수한 채 추출한 동선의 나열이자 서로에게 무감한 숏의 연쇄다.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사울의 아들>처럼 자신의 자리를 찾아 위태롭게 혹은 논쟁적으로 요동할 필요가 없다. 이곳은 애초 카메라의 위치를 고심하지 않아도 되는, 시점과 시선이 제거된 지평(수용소)이자, 여러 대의 카메라가 단 하나의 임무, 움직임이 금지된 눈에만 복무하는 장소(나치의 집)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서사의 층위를 봉쇄하는 전략을 취한 이유는 짐작할 만하다. 이는 이야기가 자칫 가해자의 내면에 닿아 동요할 사태, 일말의 면죄부로 기능할 가능성을 차단하는 시도이자, 홀로코스트가 섣부른 내러티브 안에서 감상적으로 소비되고 시각의 포르노그피가 될 위험을 방어하는 선택일 것이다. 표면적으로 이는 비극과 재난을 서사화하는 예술의 오랜 자문을 계승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가 착각하는 것이 있다. 요컨대, 우리는 <히로시마 내 사랑>(알랭 레네, 1959)이 제2차 세계대전의 상흔을 끌어안고 “당신은 히로시마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라는 말을 축으로 과거와 현재, 역사와 사랑, 현실과 허구의 숏을 서로에게 날 세워 반응하는 이미지로 배열할 때, 이 영화가 내러티브를 해체하며 망각에 저항한다고 받아들인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는 내러티브의 관습을 부수지 않는다. 대신, 서사에서 깊이와 입체성을 지워버린다. 서사의 평면성은 많은 이들이 이 영화의 화두로 끌어오는 ‘악의 평범성’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이와 관련해서 잠시 짚고 넘어갈 문제가 있다. 해나 아렌트가 거론한 ‘악의 평범성’은 타인의 관점에서 사유할 능력이 전무한 나치 부역자의 악행이 병리학적으로나 이데올로기적으로 특별한 근원을 갖지 않음에 주목하기 위한 것이지, 그들의 욕망이 평범하다는 주장은 아니다. 감독과 관람자들은 회스 가족의 장면들을 이 개념과 뭉뚱그려 결부시키며 ‘평범성’을 미화하거나 오용하고 손쉽게 보편화하는 것 같다. 우리가 각자의 평범한 욕망을 추구할 때, 그것이 타인의 고통과 연동될 수 있음을 깨우치려는 의도가 이들의 견해에 담긴다고 해도 여전히 의아함은 남는다. 아렌트의 맥락을 거두고 솔직하게 물어보자. 코앞에 죽음의 담장을 두고 자신을 ‘아우슈비츠의 여왕’이라 자처하는 자, 수용소에서 더 많은 사람을 살해할 방법을 고심하는 자가 영위하려는 일상을 그저 인간의 평범한 욕망으로 수평화해서 말해도 될 것인가. 회스 가족의 나날을 떠받치며 생존하는 노동자들과 루돌프의 아내 헤트비히가 수용소에 갇힌 유대인들의 물품을 나눠 가질 때, 이들의 욕망은 똑같이 평범한가. 더욱이 영화는 더없이 성의 없는 묘사와 설정이긴 해도, 이 가족의 평범함이 아닌 사악함을 부각하는 인위적인 에피소드와 순간을 곳곳에 심어두고 이들을 도덕적으로 논평하려는 욕심도 부린다. ‘악의 평범성’은 적어도 이 영화에 적용될 수사는 아닌 것 같다.
서사의 입체성을 억누르며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구현한 것은 ‘악의 평범성’이 아닌 ‘악의 평면성’이다. 영화는 나치 가족을 이미지로 전면화하면서도 그들과 자신 사이에 보이지 않는 바리케이드를 치고 그 선을 넘지 않는다. 여러 대의 카메라가 서 있는 곳은 이 가족의 구체적인 세부가 보이지 않는(실은 보지 않아도 되는) 위치, 담장 건너의 무수한 죽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안위에 몰두하는 이들의 풍경만 피상적으로 스케치되는 지점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동요 없는 중립지대, 객관적 목격자의 자리를 자신에게 허락한다. 감독은 이 가족에게 중심을 맞춘 이유로 “우리에게 내재된 가해자와의 유사성을 보는 시도”라고 말하지만, 정작 영화는 가해자의 서사와 분리된 곳에서 피를 묻히지도, 벌벌 떨지도 않는 기계적인 눈으로 그 세계를 그저 쳐다본다. 이 영화는 비인간성을 현시한다는 미명으로, 자신이 빚은 인간의 개별성을 들여다볼 엄두를 내지 않는다. 가해자의 서사에 연루되지 않기 위해서 서사 자체를 무력화한다. 그 태도는 비겁하다.
시종일관 운동을 경계하며 나치 가족에 다가서지도, 수용소 담을 넘지도 않던 카메라가 일시적으로 움직임을 선보일 때, 그건 영화의 자의식이 담긴 발언일 것이다. 초반, 마당에서 회스 가족의 화목한 광경이 펼쳐진 뒤, 수레를 끄는 인부가 등장하는 대목이 그렇다. 담장을 중심으로 후경에는 강제수용소 지붕이, 전경에는 마당에 널린 하얀 빨래가 보인다. 두 세계를 나눈 담장을 따라 인부가 집쪽으로 향하는 동안, 카메라도 그에 맞춰 이동한다. 그의 수레에 담긴 천들이 유대인에게 몰수한 옷가지라는 사실은 다음 장면에서 드러난다. 카메라의 이러한 운동은 유사한 배경과 상황에서 몇 차례 더 출현한다. 이를테면, 헤트비히가 모친에게 자신이 일군 텃밭을 뿌듯하게 소개하며 정원을 산책하는 장면에서도 카메라의 시선은 담장 옆을 걷는 모녀를 따라간다. 역시나 담 뒤로는 수용소가, 앞으로는 푸르른 정원이 놓인다. 헤트비히가 루돌프의 전출 통보를 접하고 분노하며 집 밖으로 나가 수용소 담장을 지나는 장면에서도 카메라는 그의 다급한 발걸음에 동행한다. 말하자면, 영화에서 이처럼 도드라진 카메라의 활동은 ‘아우슈비츠 담벼락 트래킹’으로 부를 만한 것이다.
담장이 자극한 카메라의 수평적 운동은 세계를 두 부분으로 대비한다. 나치와 유대인, 가해자와 피해자, 일상과 죽음, 무엇보다도 원인과 결과. 둘은 마치 숏과 이에 자동으로 따라오는 리버스숏, 액션과 그것이 관습적으로 낳은 리액션처럼 담장을 사이에 둔 채, 한 화면에 압축적으로 공존한다. 영화는 정확하게 이분화된 이미지의 관계로 홀로코스트라는 총체를 구축한다. 이 장면을 이루는 구도와 요소들은 너무도 선명하게 그 함의를 확신한다(트래킹숏과 떨어져 있지만 밤마다 노역장에 사과를 묻어두는 소녀의 이미지는 그 총체를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 조각이다. 감독은 그 장면들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과 반대되는 에너지, 인간의 선함”이라고 규정한다. 영화 안에서 열화상카메라로 찍힌 ‘선’의 지대는 악의 장면과 완전히 구분되는 질감을 지닌다). 카메라의 움직임이 담장의 경계를 반복해서 강조하는 동안, 역사의 불가해한 심연, 명멸하는 기억의 파편이 들어설 틈은 닫힌다. 갈등과 혼돈의 지대는 여기 존재하지 않는다.
<사울의 아들>에서 전쟁영화의 리듬으로 지각변동을 일으키며 무너지는 후반부와 내내 우왕좌왕하던 핸드헬드 숏들은 형식의 실패만이 아니라, 영화가 놓인 불안정한 토대 또한 노출하는 것이었다. 가스실의 유대인과 시체처리반 ‘존더코만도’ 사이, 볼 것과 보지 않을 것 사이, 죽음의 서사와 재현의 형식 사이에서 덜컹대던 영화가 마주한 곤경의 결과로 이해되기도 하는 것이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트래킹숏에는 흔들림이 없다. 영화가 아우슈비츠수용소의 시각적 묘사에 반대한다고 강변하면서, 매끄럽게 조율되고 통제된 트래킹숏으로 훑는 저 담장의 이미지는 그렇다면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이 트래킹숏에는 담장 뒤편의 죽음을 스펙터클로 그리지 않는다는 자부심이 배어나지만, 시각적으로 물신화된 담장의 이미지는 어쩌면 그보다 교만하게 외설적이다. 강제수용소와 나치의 장소를 인과의 이미지로 의미화하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의 트래킹숏은 과거와 현재를 종결되지 않는 역사로 교차시키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밤과 안개>의 트래킹숏을 욕되게 왜곡한다.
시각성에 대한 이 영화의 태도는 다분히 이중적이다. 검은 화면으로 지속되는 도입부만이 아니라, 연기에 뒤덮인 루돌프의 얼굴 클로즈업이 수용소에 이른 유대인들의 울부짖음에 휩싸이다 불현듯 하얀 화면으로 전환되는 장면이 그 예다. 이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가 이미지 세부를 말살하는 방식으로 시각화에 저항하는 의지를 표명하는 화법일 것이다. 그러나 그 의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검고 하얀 화면은 아이러니하게도 시각성에 대한 거부로 읽히기 전에, 몽타주가 배제된 이미지의 자기동일성을 향한 미학적 욕망으로 먼저 체감된다. 이 모순은 어쩌면 필연적인 것이다. 영화는 이미지를 어둠으로 잠식하고 하얗게 날릴 때조차 여전히, 이미지로 남는다. 무지(無地)의 화면은 시각성의 부정이 아니라, 절대화에 더 가깝다. 회스 가족과 카메라 사이의 거리를 좁히지 않던 영화가 예외적으로 허용한 익스트림 클로즈업도 그런 맥락에 놓인다. 수용소 바로 옆, 정원에 핀 빨간 꽃이 화면 가득 담길 때 수치심을 모르는 아름다움, 만개한 생명력은 추하고 징그럽다. 꽃의 형상이 번져 화면 전체를 피의 색으로 완전히 적실 때, 영화는 시각성에 대한 불신과 미학에 대한 혐오와 공포를 앞세운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영화가 익스트림 클로즈업과 무지의 화면을 기괴하고 위악적인 음향과 접속시켜 생성하는 건 혐오와 공포의 이미지에 대한 매혹이자 그것의 신비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시각의 위력에 도취된 상태로 시각의 활기를 강제하려 든다.
<존 오브 인터레스트>, 이것은 가해자의 악몽일까. 한가롭게 몸을 담그고 낚시하던 강에 흘러온 망자의 뼈, 몸에 들러붙은 검은 재, 이런 것이 나치 부역자의 나쁜 꿈일까. 경직된 이미지의 프레임에 형체 없는 비명으로 끈질기게 돌아오는 유령은 홀로코스트 영화의 트라우마일까. 그것이 결국 가장된 악몽이라는 의심을 영화 후반부는 가중한다. 루돌프는 중령으로 진급하고 아내의 바람처럼 아우슈비츠에 머물 수 있게 된다. 나치의 연회 장면이 이해할 수 없는 길이로 늘어진 다음, 사령부 계단을 내려가던 그가 느닷없이 구역질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영화는 그 행위를 한번 더 반복한다. 인물의 내면성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던 영화가 이 순간 목표한 것은 무엇일까. 루돌프는 무엇을 토해낸 것일까. 그의 갑작스러운 구역질이 영화의 시공간적 비약을 예비하는 제스처임은 이내 밝혀진다. 루돌프가 인적 없는 복도를 두리번거리자, 신묘한 빛이 새어나오는 검은 화면이 열리며 영화는 놀랍게도 당당히 현재의 아우슈비츠 박물관에 이른다. 현실의 노동자들이 쓸고 닦는 적막한 박물관 내부에 희생자들의 흔적이 있다. 시간을 건너뛰어, 허구 바깥으로 나온 영화 화면에 그간 소리로만 휘몰아치던 죽음의 잔해가 맺힌다. 영화가 기어이 루돌프 장면으로 다시 돌아오면, 이제 그는 어둠 속에 얼어붙은 자세로 무언가를 응시하고 있다.
가해자의 무의식이 뱉어낸 육체적, 정신적 반응이 그의 시선을 멈춰 세우고 비로소 학살을 증언하는 미래의 장소와 마주하게 한다는 말인가. 미래의 결과가 과거의 원인을 이렇듯 예기치 않게 차가운 얼굴로 덮친다는 것인가. 영화는 가해자의 증상과 시선에 과거와 현재, 영화 안과 바깥을 오가는 힘을 부여하고 역사의 통로로 삼는다. 여기 어떤 균열도 보이지 않는다. 시공간적 이행과 전환을 거리낌 없이 용인한 이 대목은 얄팍한 역사 인식과 형식의 만용을 과시적으로 전시할 뿐, 아무런 의의도 생성하지 못한다. 도덕을 시늉하는 구역질이 박물관 유리 벽 안에서 여전히 신음하는 해어진 신발 무덤에, 말문을 막는 존재의 무더기에, 끝나지 않은 파멸의 시간에 닿을 수 있다고 믿는 영화. 정녕, 그래도 되는 것인가. 나는 <존 오브 인터레스트>에 동의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