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비라 나바로 지음 엄지영 옮김 비채 펴냄
결혼을 원하지 않는 남자 이스마엘과 결혼을 원하는 여자 ‘나’가 결혼을 더이상 언급하지 않기 위해 결혼한 척하기로 한다. 가짜 결혼식을 핑계 삼아 “섬에 가서 모래사장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해변가에서 보낸 첫 나흘 동안은 시간이 녹아 흘러내리듯 흐른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이스마엘의 통증이 시작된다. 음식 찌꺼기가 잔뜩 낀 잇몸이 부어올랐지만 식욕은 여전히 왕성한 이스마엘의 모습을 보며 ‘나’는, 삿갓조개 껍데기가 이스마엘의 잇몸을 관통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가짜 남편의 입냄새는 점점 더 심해져 간다. 이스마엘은 갑작스레 고백한다. “사실 나, 벌레로 변하고 있어.” 이즈음에서 카프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겠지만, 단편소설 <잇몸>은 결혼과 불운이라는 테마로 이 이야기를 끌어들인다. 표제작 <토끼들의 섬>에서도 악취가 중요하다. 강에서 시체를 발견한 남자는 한 섬에 텐트를 치고 살아보기로 한다. 섬 전체가 새 둥지와 배설물로 가득 차 있음에 분노한 그는 섬에 토끼를 풀어 새를 쫓자는 아이디어를 생각해낸다. 빠르게 번식하는 토끼 스무 마리를 풀어두면 먹이가 곧 부족해질 테고, 그러면 새 둥지를 공격하리라는 계산이었다. 그 계산은 맞아떨어져, 토끼들은 처음에는 알을, 다음으로 새끼 새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심지어 토끼들은 자신의 새끼도 먹어치운다.
엘비라 나바로의 단편집 <토끼들의 섬>에 수록된 작품들은 순수한 악몽 모음집 같은 인상을 준다. 평범해 보이는 도입부는 분위기를 한순간 바꾸어버리며 때로는 으스스하게 때로는 음산하게 이야기를 진전시킨다. 인물들은 어떤 행동을 하기보다는 멈추어버리며, 그 결과 독자는 오도 가도 못하고 이야기가 만들어낸 이미지에 갇혀버린다. 밤마다 호텔 옆방에서 들리는 이상한 이야기 <꼭대기 방>, 새끼 염소 고기를 좋아하는 손님이 “절대 새끼 염소가 아니에요”라며 항의하며 시작되는 <미오트라구스> 등 책에 수록된 총 11편의 단편들은 기이하고 불편한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스페인 소설가인 엘비라 나바로는 스페인어권 작가들의 등용문인 하엔 소설상을 수상했고, 2010년에는 영국 문예지 <그랜타>에서 선정한 ‘35살 이하 최고의 스페인어권 작가 22인’에도 올랐다. 이번에 소개되는 <토끼들의 섬>은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소설집으로, 2021년 전미도서상 번역문학부문 후보에 올랐다.
그날 밤, 하늘에 별 하나 없이 으스스할 정도로 어두컴컴한 가운데 그는 다시 천장 등에서 누군가를 보았다. 큰형이었다. 큰형은 얼굴 근육 하나 움직이지 않은 채 굳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 <지옥의 건축학을 위한 기록> 중에서, 15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