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BIFF Daily > 27회(2022) > 2022 부산국제영화제
#BIFF 3호 [인터뷰] '페이퍼맨' 기모태 감독, “낀 세대의 설움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우빈 사진 박종덕 2022-10-08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페이퍼맨> 기모태 감독 인터뷰

<페이퍼맨>은 재밌다. 그래서 이상하다. 갈 곳 없이 굴다리 아래에 모여 사는 이들의 이야기인데도 슬픔보단 웃음의 정취가 가득하다. 만약 이런 <페이퍼맨>의 모순을 느꼈다면 영화의 의도는 완벽히 성공이다. 기모태 감독은 온갖 아이러니를 다룬다. 열심히 살면 실패하고, 착하게 굴면 피해보고, 돈을 벌지만 돈을 잃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다. 다만 이런 아이러니는 단지 영화 속의 일들이 아니다. 기모태 감독이 늘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현실의 문제들이다. 커다란 제스처에 호방한 어투로 사회 문제, 영화 연출에 대한 섬세한 고민을 내뱉는 그의 모습까지도 <페이퍼맨>이 지닌 아이러니의 연장처럼 느껴진다.

- 가족 없는 소녀, 지적장애 청년, 노숙하는 노인 등 주변 인물과 소재가 무거운 편이다. 하지만 영화의 분위기는 대체로 희극적이다.

= 첫째로는 연출 목표와 관련이 있다. 진지한 예술을 하고 싶어서 영화를 만들진 않는다. 대신 주변인들의 문화생활을 풍족하게 해주고 싶다는 욕심이 있다. 나이 드신 아버지가 봐도 재밌고, 영화와 무관한 일을 하는 친구가 봐도 재밌는 영화를 만들고 싶은 바람이다. 영화를 가벼운 마음으로 보려는 대중 관객들에게도 쉽게 다가가고 싶다. 무거운 소재를 다루는 독립 영화가 어둡고, 어렵고, 이해하기 힘들 것 같다는 편견이 가끔 있는데 그걸 깨고 싶다. 또 시나리오 스승에게 배웠던 시나리오 작법론을 지키려는 이유도 있다. 서사를 만들 때 사회적으로 어두운 분위기를 다룰 거면 주인공이 희극적인 인물이어야 하고, 반대로 주인공이 어두운 분위기면 주변을 희극으로 끌고 가는 게 좋다고 배웠다. 스승의 가르침을 실천하려고 노력 중이다.

- 가출 청소년을 이용한 노동 착취 및 성매매 알선, 상자로 집을 만드는 노숙인의 일상처럼 사회 사각지대의 현실이 상세히 그려진다.

= <페이퍼맨>만을 위해서 심혈을 기울여 공부하거나 조사한 것들은 아니다. 평소에도 인터넷으로 뉴스를 보면서 사회에서 어려움을 겪는 여러 부류 사람들의 현실을 눈여겨본다. 어떤 주제에 관해서 궁금한 게 생기면 계속 관련 자료를 보고 공부하는 편이다. 그렇게 늘 고민하던 생각들이 있다 보니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작품을 쓸 수 있었다.

- 그중에서도 폐지를 줍는 40대 남성이 주인공인 이유는?

= 개인적이고 사소한 경험에서부터 시작됐다. 영화에서 기동 역을 맡은 장현준 배우와 수영 시장에서 국밥을 먹고 나오는 길이었다. 무심코 골목길을 봤는데 폐지 담긴 리어카가 덩그러니 놓여있고 가로등이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있더라. 한창 장편영화를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던 시기라서 저런 그림만 1시간 동안 찍어내도 재밌겠다고 얘기를 나눴다. 원래 어떤 이미지에서 영화를 시작하는 편이 아닌데, 이상하게도 리어카의 이미지가 잊히질 않아서 써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어떤 주인공이 저 리어카를 움직여야 가장 극적이고 아이러니한 분위기를 만들 수 있을지 고민했다. 여러 조사를 하다 보니 낀 세대(기성세대와 신세대 사이에 있는 세대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의 현실이 참 안타깝더라. 보통 경제적으로 여유롭고 안정된 세대라고들 생각하지만 한 번 실패하면 사회에서 재기하기가 무척 힘들다고 한다. 시나리오 공부를 할 때부터 영화의 주인공은 아이러니한 위치에 있어야 한다고 배웠다. 상황이든, 성격이든 어디 한 쪽에 치우친 게 아니라 어느 중간에 어중간하게 끼어있어야 한다는 거다. 마침 찾은 낀 세대의 설움이 영화에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했고 44세쯤의 주인공 고인목을 떠올리게 됐다.

- 고인목과 주변 인물이 사는 곳은 왜 다리 밑인가?

= 일단 그늘막이 있으니까 살기 좋다. (웃음) 의미적으로는 건물 셋방에서 강제 퇴거당한 고인목이 지하 세계로 내려간다는 생각에서다. 다만 다리 밑은 완전히 폐쇄된 공간이 아니고 외부에 거의 개방돼있다. 그래서 실제로는 노숙인이 많이 사는 곳도 아니다. 아마 고인목은 말로는 인생이 끝났다고 얘기할지라도 내심 아직은 삶을 놓지 않았고, 세상과 섞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다리 아래의 하천 옆이라는 공간이 물과 육지의 어중간한 곳이라서 낀 세대의 처지와도 잘 어울린다고 판단했다.

- 고인목은 레슬링으로 아시안 게임 금메달을 딸 정도로 끈기 있고, 중국어도 잘하고, 일머리도 꽤 좋아 보인다. 그런데 왜 이렇게 어려운 삶을 살게 됐나?

= 앞서 말한 것처럼 낀 세대에 대한 사회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젊은 세대가 흔히 낀 세대를 사회경제적으로 특혜 받은 편이라고 생각하지만, 조사해보면 실제로 그렇지 않다. 오히려 사회정치적인 분위기에 휩쓸려서 많은 비리나 불공정에 시달린 세대기도 하다. 인목도 성실하고 정직하게 운동선수 생활을 했지만 한 비리 검사의 사주 때문에 선수 생활을 접어야 했고, 크게 허리를 다치게 됐다. 정상적인 회사 생활을 할 수 없을 만큼 건강이 좋지 않고, 재취업하기에 좋은 사회 구조도 아니다 보니 생활에 악순환이 있었다. 영화에서도 나오지만 배달 일을 성실히 해보려고 해도 하루 만에 몸져눕곤 한다.

- 고인목 배역을 맡은 곽진 배우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제작에도 참여했던데 개인적인 인연인가?

= 연극 활동을 하다가 알게 됐다. 곽진 배우가 연출, 각본을 맡은 작품이었고 난 배우로 참여했다. 단 하루만 같이 무대에서 연기했는데 둘 사이에 정말 엄청난 기운을 느꼈다. 주변 배우들이 우리를 반 바퀴 돌아서 나가야 하는 장면인데 긴장감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다고 가만히 서 있을 정도였다. (웃음) 이때부터 서로를 좋아하고 신뢰하게 됐다. <페이퍼맨> 시나리오를 보여주니 기존 스케줄을 다 미루고 흔쾌히 섭외에 응해줬다. 그리고 문제였던 예산 측면에까지 도움을 줬다. 촬영 초반엔 인물에 대한 해석 차이도 있었지만, 덕분에 더 활발히 의견을 나눴다. 워낙 연기 기본기가 좋아서 현장에서 나온 피드백을 정말 순발력 있게 처리해주더라. 후회 없이 좋은 캐스팅이 됐다.

- 연극에 오래 몸담았고 연출 경험도 있다. 영화 연출의 계기, 연극 연출과의 차이는?

= 연극도 공동 연출은 몇 번 해봤지만 단독 연출은 한 편이다. 그 한 편을 연출해본 후에 영화를 해야겠다고 강하게 맘먹었다. 아무래도 연극은 무대 위의 시간에 집중해서 모든 걸 다 쏟아내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공을 들여서 연출한 결과물이 더 오래 남았으면 하는 마음이 생겼고 자연스레 영화에 관심을 가졌다. 연극은 확실히 배우의 연기에만 주로 신경을 쓰면 된다. 그런데 영화 연출은 종합적으로 고려할 사항이 너무 많아 참 어렵다. 아직은 적응 중이다.

- 연출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엑스’란 주요 역할로 출연까지 했다. 앞으로도 연출과 연기를 겸할 계획인가?

= 그렇다. 연극을 하면서 연출뿐 아니라 다른 역할까지 도맡다 보니 연기에 대한 욕심이 점점 사라지는 걸 느꼈다. 그래서 영화를 통해 연기 욕심을 되살리고 동기부여 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다만 연출과 동시에 연기를 하려면 제약이 없잖아 있더라. 내 연기에 만족을 못 했더라도 스태프들이 고생하는 걸 생각하면 웬만해선 OK를 외치게 된다. 성향이 잘 맞는 연출자가 내가 쓴 각본을 맡아주면 연기에만 집중해보고도 싶다. 아직 정말 좋은 연기, 감탄하게 만드는 연기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나도 그런 배우들의 연기를 보면서 놀랄 뿐이다. 막연한 부분을 점점 알아가는 재미가 있는 것 같다.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