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네가 좋아. 근데 넌 그렇게 말할 수 있어?” 영화 안에서 가장 마음에 든 대사를 묻자 배우 정여희가 꼽은 말이다. 저 두 마디가 몹시 강인하지만 동시에 나약함을 드러내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덧붙였다. 자신이 무엇을 갈망하는지 명확히 알고 확신하는 것과 상대방도 나와 같길 바라며 공격적으로 의중을 살피는 치졸함 사이에 어떤 간극이 있는지 그는 정확히 알고 있다. 이렇게 영화에서 팅팅이 되기까지 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몇 가지 질문을 서면으로 건넸다. 그리고 빽빽하게 채워진 회신을 받았을 때 이 인터뷰가 두 사람을 향한 배우 정여희의 애틋한 서신이란 걸 알았다.
-작품에 합류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먼저 덩이한 감독님이 두 학생의 이야기를 섬세하고 진부하지 않게 풀어낸 점에 이끌렸다. 감독님은 관객이 예상할 수 있는 흔한 설정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배우들이 창의적인 환경에서 다양한 화학작용을 만들어내도록 노력하셨다. 또 나의 외모나 지금까지 연기해온 이력에 비출 때 이밍이란 캐릭터와 잘 어울리는 느낌이 들었다. 전체적인 스토리는 이밍(임진희)의 시선을 따라 흘러가지만 팅팅 또한 중심이 되어 극을 이끌어간다. 팅팅이란 캐릭터가 조금씩 선명해지면서 자연스레 매료됐다.
-<처음 꽃향기를 만난 순간>은 팅팅과 이밍의 10대 청소년 시절과 성인이 된 현재를 교차해 보여준다. 연령대 변화를 자연스레 보여주기 위해 어떤 점을 신경 썼나.
=청소년기에 겪는 연애 경험은 어른이 된 뒤에 사랑을 수용하는 관점에 큰 영향을 미친다. 팅팅에게 이밍은 첫사랑이다. 이밍의 마음을 얻기 위해 팅팅은 단순하지만 섬세한 방식으로 모든 노력을 다한다. 이밍과 가깝다는 사실로 팅팅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느끼기 때문에, 청소년 시기의 팅팅을 연기할 때에는 더 부드럽고 명랑하게, 하지만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연기했다. 팅팅의 모든 초점이 이밍에게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밍과 신체적 접촉을 더 보여주려 했다. 함께 책을 볼 때에도 몸을 낮춰서 이밍에게 최대한 밀착했다. 그 시퀀스 마지막에 이밍의 어깨에 기대어 책을 읽은 건 즉흥적인 연기였다. 그 장면으로 둘의 성격이나 관계성이 더 명확해졌다.
-어른이 된 뒤엔 어떤 차이를 드러냈나.
=수단이 더 많아졌다. 이밍에게 다가가기 전에 관찰부터 한다. 상대방의 현재 상태를 확인하고 어떤 방법으로 관심을 끌지 결정한다. 초반 대본에서 팅팅은 더 귀엽고 부드러운 성격에 가까웠다. 하지만 나는 팅팅이 강인하고 주체적인 인물로 존재하길 바랐다. 그래서 어른이 됐을 때 목소리를 낮추고 천천히 말했다. 이밍이 팅팅 곁에 있을 때에도 불안해하기보다는 편안해하는 모습을 보이려 했다. 팅팅과 이밍, 이밍의 남편이 모두 거실에 모여 있는 장면에서 나는 이밍과 눈도 더 자주 마주쳤다. 나를 더이상 숨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청소년 시기에 사랑에 외면당해본 사람이라면 어른이 되면 쉽게 약해지지 않는다.
-이밍은 팅팅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난 내가 뭘 원하는지 몰랐어. 그래서 네가 부러웠어. 넌 자유롭고 단순하게 살잖아.” 배우 정여희의 눈으로 바라본 팅팅은 어떤 인물인가.
=영화는 이밍이 곁에 없을 때 팅팅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지 않는다. 이밍의 관점으로 영화가 흘러가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팅팅은 용감하고 헌신적이고 친절한 사람으로 보이지만, 선한 사람도 외롭다. 그래서 팅팅에게 자기만의 비밀이 있다는 설정이 마음에 든다. 더 인간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팅팅은 모순적인 사람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에게 따뜻함을 베풀면서도 자신의 어두운 곳은 숨겨버리는, 용감하면서 나약한 인물이다.
-영화는 레즈비언 결혼식이 거행되던 한 결혼식장에서 이밍과 팅팅이 우연히 만나면서 시작한다. 이밍과 팅팅이 어른이 된 이후인 2019년, 대만에서 아시아 최초로 동성결혼을 합법화했다. 여기서 상상을 해보자. 혹시 이들이 지금의 제도적·법적 환경 속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면 이야기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이밍과 팅팅이 느낀 두려움이 오직 제도적 문제에서만 발생했다고 볼 수 있을까. 가정교육이나 살아온 환경, 지식 차이 등 복잡한 요소가 모여 사람들은 각기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학창 시절에는 내가 날 바라보는 것보다 다른 사람이 날 바라보는 것에 더 신경 쓴다. 그러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마음 상태는 무시하고 다른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는 데 급급해진다. 이밍과 팅팅의 마음은 시대와 별개로 여전히 복잡할 것 같다. 다만 너무 소중했고 아쉽게 흘러간 시간은 영영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밍을 맡은 임진희 배우와 함께 극을 이끌어간다. 두 배우가 호흡을 맞춘 과정은 어땠나.
=사실 처음에는 걱정이 앞섰다. 임진희 배우가 막 그렇게 친근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웃음) 게다가 촬영 기간도 11일밖에 되지 않았다. 짧은 기간 동안 다양한 나이대와 복잡한 감정을 연기해야 했다. 친하지 않으면 촬영이 어려울 것 같더라. 그래서 대본을 읽을 때부터 임진희 배우를 알려고 애썼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임진희 배우가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와 실제 성격에 차이가 크단 걸 알게 됐다. 굉장히 다정하고 섬세한 배우다. 하루는 이밍이 대학 댄스 동아리 공연을 끝내고서 나와 골목에서 다투는 장면을 찍어야 했다. 처음에 없던 눈물 신이 생겨났는데 임진희 배우가 “이따가 울 수 있겠어?”하고 물었다. 하지만 확신이 잘 안 섰다. 워낙 골목이 좁아서 단독으로 나눠 찍어야 했고 임진희 배우가 걸어나가는 걸 먼저 촬영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본 순간 갑자기 감정이 밀려오면서 눈물이 났다. 그때 알았다. 임진희 배우가 나의 감정 몰입을 도와주기 위해 자신이 걸어나가는 것부터 먼저 촬영했던 것이다. 그 순간적인 감정이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아는 배우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임진희 배우와 함께 촬영에 관한 의견을 적극적으로 어필하기도 했다고.
=육교에서 이밍과 팅팅이 서로의 마음을 쏟아내는 마지막 장면도 둘이서 의견을 내 바꾼 장면이다. 원래 대본에는 그렇게 대사가 많지 않았다. 가장 마지막 신이니까 이밍과 팅팅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을 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각자 할 말을 생각한 뒤 촬영 현장에서 대사를 맞췄다. 그게 딱 촬영 2시간 전 즈음이었다. 우리가 그렇게 큰 대목을 창작할 수 있던 건 모두 덩이한 감독님 덕이다.
-덩이한 감독과 두 배우의 관계가 무척 돈독해 보인다. 덩이한 감독이기에 가능한 부분이 있었다면.
=소통의 의지가 강한 감독이다. 배우의 생각을 기꺼이 수용하면서 융합해주신다. 극중에 베드신이 있는데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호텔에 가서 리허설을 맞춰봤다. 두 사람이 아주 오랜만에 만났을 때 무슨 말을 하고 싶을지, 뭘 물어보고 싶을지 생각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임진희 배우와 함께 침대에 누워 두 시간 내내 이야기를 나눴다. 덩이한 감독님은 그날 우리가 나눈 대화의 일부를 시나리오에 차용하셨다. 나는 이렇게 함께 작업한다는 느낌이 너무 좋다. 다 같이 퍼즐을 찬찬히 맞춰가는 것만 같다.
-<처음 꽃향기를 만난 순간>은 다양한 형태의 사랑, 다양한 이야기 변주, 다양한 결말을 보여준다. 이러한 다양성을 갖춘 작품이 늘어날 때 관객은 어떤 영향을 받을 수 있을까.
=예전 수업 시간에 로맨스영화에 몇 가지 공식이 있다고 들은 적이 있다. 그 공식을 보면 과거 여성은 선택권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여자주인공이 사랑이 찾아오기만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걸 로맨스라고 여기지 않는다. 이렇게 다양한 문제, 삶의 방식, 딜레마를 보여주면서 대중은 자기 인생을 다시 생각하고 돌아보게 된다. 영화를 본다는 건 핑크빛 허상에 머무는 게 아니라, 작품과 더불어 반성하고 성장하는 시간에 가깝다. 한국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도 다양한 계층의 문제를 따뜻한 시선으로 보여주면서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지 않나. 그런 힘이 중요하다.
-시리즈 <처음 꽃향기를 만난 순간>은 대만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금종상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는데, 정여희 배우에게 <처음 꽃향기를 만난 순간>은 어떤 의미를 지니나.
=이렇게 훌륭한 팀과 함께 작업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행운이다. 어떤 작품이 성공한다는 건 모두 팀원들의 노력 덕분이다. 삶의 다양한 수업을 들으며 배우로서 면모를 갖추려고 노력한다. <처음 꽃향기를 만난 순간>에서도 많은 것을 배웠다. 그냥 미완성의 체크리스트를 채우는 과정이 아니었다. 몸소 경험하고 체험하면서 내 삶의 자양분을 쌓아올린 잊지 못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