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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지옥' 연상호 작가, "이제 대중에겐 보편성이 존재하지 않는 시대"
조현나 사진 최성열 2023-03-13

<지옥>. 사진제공 넷플릭스

- 처음부터 계획된 바는 아니었지만 <서울역> <부산행> <반도>도 차츰 세계관이 확장된 사례죠. 이미 영화를 통해 경험해서 드라마에서도 더 수월하게 진행하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요.

= 여전히 어렵습니다. (웃음) <부산행>은 사실 확장하려는 의도를 가졌으면 더 보편적인 시도를 했을 것 같아요. <부산행>의 좀비는 속도가 빠르고, 말하자면 기차를 위한 좀비라 다른 공간으로 옮기는 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제목도 다르게 지었을 거고요. 그래도 많이들 ‘연니버스’라고 세계관을 엮어 봐주시니 감사하죠.

- <방법> <괴이> <선산>처럼 드라마 시나리오만 집필하는 경우엔 직접 연출할 작품의 각본을 쓸 때와 접근법이 다른가요.

= 그것도 경험해가는 중인데 글 자체가 달라지는 것 같진 않아요. 한 가지 원칙이 있다면 연출을 맡은 감독님의 방식에 개입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괴이> 현장도 한번도 안 갔고 <선산>도 한번 들렀어요. <선산> 연출하는 민홍남 감독이 <부산행> <염력> <반도>의 조감독이거든요. 제가 가 있으면 얼마나 부담스럽겠어요. (웃음) 현장에 2시간 정도만 있다 나왔습니다.

요즘 대중에겐 보편성이 존재하지 않아

- 20여년 가까이 계속 장르물을 제작해왔는데, 감독님은 장르물의 매력이 뭐라고 생각하나요.

= 공유할 수 있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게 제일 큰 매력이에요. 특정 장르에 빠지게 되는 이유는 무척 다양한데 SF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좀비물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좀비물 중에서도 서사 때문에, 혹은 비주얼 때문에 좋아할 수도 있어요. 그런 세세한 이유와 요소들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게 가장 좋은 점이죠.

-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과 대담을 진행했을 때 ‘작업할수록 장르물의 틀 안에서 계속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나가고 싶다는 열망이 있는데 그 시도를 장르물에서 어떻게 해나가고 계신가’라는 질문을 하셨죠. 같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새로운 돌파구를 어떻게 찾아가고 있나요.

= 장르에 충실하되 장르를 탈피하는 것, 그게 숙제인 것 같아요. 장르라는 건 아까 말했듯이 해당 장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공감대를 얻는 게 중요한데, 이들은 동시에 그 장르에서 탈피한 것들을 보고 싶어 해요. 그렇지만 그 틀을 너무 벗어나면 안되고 중간을 잘 맞춰야 해요. 정말 어렵죠. 어려운데 저는 그래도 계속 경험해보는 수밖에 없다고 봐요. 요즘 작품을 기획해서 대본을 쓰고 공개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최소 2년이거든요. 그사이에 세상이 너무 달라지니까 미래를 예측하고 큰 흐름을 읽는다는 게 쉽지 않아요. 그때 지지대가 되어주는 것이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축적한 데이터라고 생각해요. 게다가 요즘 대중에겐 보편성이 존재하지 않아요. 갈수록 그런 것 같아요. 여러 세대가 제각기 다른 작품을 보고 있고, 와중에 그들의 입맛도 계속 변화하죠. 그걸 작품을 통해 계속 감지해나가면서 나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 원래 <괴이>를 멜로물로 쓰고 싶었다는 인터뷰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앞으로 어떤 결의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은가요.

= 정말 많아요. 최근에 영화 <러브 레터>를 다시 봤는데 진짜 좋더라고요. 뇌가 정화되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웃음)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도 다시 봤는데 역시 좋았고, 언론계의 문제를 파헤치는 <엘피스 -희망, 혹은 재앙->이라는 드라마도 재밌게 봤어요. 좋은 표현이라 생각하진 않지만 소위 말하는 ‘막장 드라마’ 작풍을 띠는 것도 해보고 싶고. 다 제가 해보지 않은 장르와 형식의 작품들이죠. 하고 싶은 것과 잘하는 건 다르다고들 하지만, 그래도 기회가 온다면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연상호 감독이 말하는 ‘시나리오의 힘’

연상호 감독에게 시나리오의 중요성에 관해 묻자 “시나리오는 설계도”라는 답이 돌아왔다. “감독과 배우, 스탭까지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작업인데 최종적으로 작품이 어떻게 나올지 아무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요컨대 배우와 미술팀, 촬영팀, 심지어 연출을 맡은 감독까지 “모두가 하나의 그림을 그리며 나아갈 수 있게끔 하는 지표가 필요한데 그게 바로 시나리오”라는 것이다. “안전한 설계도와 다름없는 각본”의 중요성을 알기에, 연상호 감독은 매일같이 작업실 책상에 앉아 대본을 쓴다.

에필로그

연상호 감독과 인터뷰를 진행한 날은 마침 <씨네21> 마감일이었다. 마무리 짓지 못한 글을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면서 집을 나섰다. 그러나 연상호 감독의 작업실에 들어선 순간, 복잡하게 얽힌 고민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작업실 벽에 붙은 영화 <부산행> <염력> <반도>, 드라마 <지옥> 등의 포스터와 테이블마다 가득한 <다크 나이트> 시리즈의 배트맨, 조커, 캣우먼, 울트라맨과 고질라를 비롯한 괴수들, <슬램덩크>의 피규어들, 영화 DVD, 층층이 쌓인 건담 박스들까지. 사진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작업실 곳곳을 살피며 ‘여길 한 바퀴 돌며 대화를 나누다보면 감독의 필모그래피와 취향에 관해 끝도 없이 이야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대로, 연상호 감독이 “마치 직장인처럼 오전 9시에 출근해 오후 6시까지 시간을 보내는” 작업실에선 수많은 실험들이 이뤄지고 있었다. 그의 답변을 들으며 여러 이야기 조각들을 꿰매고 맞춰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내는 과정이 자연스레 연상됐다. 마감에 대한 걱정은 잠시 잊은 채, 한 창작자의 세계를 면면히 들여다본 귀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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