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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진한새 작가가 말하는 '글리치' 엔딩에 숨겨진 것들
김소미 사진 오계옥 2023-03-14

<글리치>. 사진제공 넷플릭스

읽히는 맛과 보이는 맛 사이에서

“잔소리 같은 지문이 많아요. 배우가 읽기 힘들까봐 걱정되고 줄여보려고도 하는데, 결국 덧붙이고 말죠.” 업계에 대본이 쏟아지면서 특히 신인 작가일수록 빠르게 술술 읽혀 우선 선택지 안에 드는 대본을 써야 한다는 압박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지만, 그는 “인물의 내면묘사에 공들이고 감정의 뉘앙스를 설명하는” 소설적 묘사를 고집한다. 쉽게 읽히는 맛 대신 꼼꼼한 지도가 되어주기로 선택한 것이다. 반면 장면이 ‘보이는’ 효과는 중시한다. “심리묘사는 집필 스타일에 따라 생략하는 작가도 많겠지만,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이 큰 오차 없이 한 가지 그림을 볼 수 있게끔 하는 시각적 설득력만큼은 갖춰야 해요.” 때로는 장면의 분위기를 직관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BGM 레퍼런스를 명시한다. “같은 액션 장면도 누구는 가볍게, 누구는 비정하고 끔찍하게 해석할 수 있잖아요. 음악을 예시로 들면 같은 그림을 바라보기가 수월해집니다.”

- 10대, 20대들의 거침없는 입말들을 잘 살리는 편인데요. 혼자 중얼거리며 대사를 쓰나요.

= 모니터 앞에서 늘 연기하고 있어요. (웃음) 제 입에 먼저 담지 않고는 못 쓰는 정도입니다. 그러다보니 대본에서도 대사만큼은 문법적 오류가 난무하더라도 최대한 입말을 구현하는 상태로 내버려둡니다. 드라마 캐릭터가 아니라 사람처럼 말하는 것, 그게 제가 생각하는 몰입의 요소인 것 같아요.

- 온라인 여론, 밈 등에서 사회현상을 읽어내는 과정에서 인터넷상 자료 선별은 어떻게 이루어지나요.

= 시시각각 바뀌는 인터넷 여론을 늘 주시하는데 우선은 그 안에 담긴 팩트들의 정확도에 신경 씁니다. 밈은 단순하기 때문에 강력하잖아요. 평균을 극대화한 거죠. 그래서 그걸 다시 복잡한 형태로 펼쳐보는 작업도 필수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갈등 현상만 보지 말고 그 이면에 자리한 대중심리를 공감하고 파악해보려 해요.

- 과거에 비해 드라마 또한 OTT 플랫폼을 통해 소비되는 비중이 높아지면서 엔딩 기술에 대한 작가들의 관심도 더 높아질 것 같습니다. 클리프행어 효과에 어떤 입장을 갖고 있나요.

= 더하는 문제가 아니라 끊어내는 문제로 접근하고 있어요. 엔딩에서 관객을 자극하기 위해 인위적인 설정을 만들어낸다기보다 어디에서 끊어야 가장 효과적인 맺음인지 찾는 거죠. 저는 이야기 전체를 3막 구조로 놓고 그 안에서 계속해서 마디를 쪼개면서 엔딩 포인트를 찾습니다.

- 3막 구조에 대한 선호는 습작 시절부터 생겨난 건가요.

= 저는 드라마 쓰기를 체계적으로 교육받은 작가가 아니고 워크숍에서 우선 쓰기를 시작했기 때문에 절박한 마음에 혼자 이것저것 책을 찾아보면서 저만의 가이드라인을 만들었어요. 내러티브 강의 등을 보면 3막 구조 같은 것을 따르지 말고 창의성만 강조하는 분들도 많아요. 저는 속으로 생각하죠. “당신은 천재군요. 안타깝지만 전 아닙니다. (웃음)” 여태 보통 회당 1시간짜리 드라마를 써왔지만 요즘 시청자들의 시청 패턴상 최소 30분 정도의 숏폼에는 익숙해질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에 미국 드라마 <배리>(약 25분 분량)의 비트시트(줄거리, 감정, 캐릭터를 장으로 구분해 기재하는 일종의 대본 로드맵)를 혼자 만들어보기도 했는데, “나는 한참 멀었구나!” 좌절하고 말았습니다.

- 앞으로의 작가적 과제가 있나요.

= 지금까지는 말하자면 한두명의 1인칭 시점 이야기에 끌렸습니다. 로컬한 영역을 설정해두고 그 안에서 제 또래의 이야기를 밀도 있게 다루는 것이 지금의 제 ‘깜냥’에 맞는 것 같아요. 저는 작은 이야기에서 감정을 확대하는 것이 좋아요. 처음에 소설에 빠져들었던 이유나 혹은 그 영향일지도 모르고요. 그래서 언젠가는 품을 넓혀 앙상블극에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미국 드라마 <스노우폴>이 큰 자극이 됐어요. 1980년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코카인이 퍼지기 시작한 실제 사건을 극화한 것인데, 작가가 수많은 주인공들의 시점을 한 손에 꽉 쥐고 있죠. 조금 더 방대한 인물이나 세계관을 장악하는 이야기를 쓰는 쾌감에 다가가보고 싶습니다.

<글리치>. 사진제공 넷플릭스

<글리치>의 엔딩에 숨겨진 것들

내 집 마련이 불가능한 세대. 드라마의 결말부에 이르러 지효는 아버지의 도움으로 안전한 자취방을 구해 독립하는 것으로 뒤늦은 방황기를 마무리한다. 그곳에서 두 여자 친구는 새 미래를 시작할 것이다. 결말에서까지 부모가 집을 구해주는 설정을 고수한 이유가 무엇일까. 진한새 작가는 그것이 “마땅히 변명할 거리가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받을 수 있는 것을 굳이 거부할 필요도, 가진 것을 배척할 필요도 없지 않을까요. 사실을 인정해야죠. 다만 그런 우리가 영웅이 되기는 어렵겠죠. 한편으론 모두가 영웅이 될 필요는 없으니 거기에 지나친 죄책감을 갖지는 말자고 희미한 위안을 전하고 싶었는지도 모르죠.”

에필로그

뉴질랜드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건축디자인을 공부하던 진한새는 23살 무렵 석사과정을 중단하고 어머니 송지나 작가가 운영하는 시민워크숍에 들어가 드라마를 쓰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추적 60분> <몽골리안 루트>를 만든 진기웅 PD(전 KBS PD)로 현재 제작자 대 작가로서 아들과 소통 중이다. 자신만만한 젊은 작가의 인상을 마음 한구석에 품고 찾아간 곳은 어느 평범한 가정집의 육아 현장이었다. 피곤을 추스르고 자리에 앉은 작가는 토끼 인형과 동화책을 배경으로 초심자의 두려움, 기대주의 부담감을 골고루 들려주었다. “글 쓰는 루틴이요? 엉망이죠.” 그는 밤새 대본을 쓰던 올빼미형 작가에서 아침형 작가로 생활의 틀을 재조립하는 과정 중에 있었다. 육아 대열에 합류해 자아실현과 부모되기의 어려운 양립을 저울질하는 밀레니얼의 이야기를 머지 않아 진한새 드라마로 보게 될 것 같다고 우스갯소리를 던졌더니 “실은 <글리치>를 쓸 때 만약 시즌2가 나온다면 육아하는 지효는 어떨지 던져보기도 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일찍 일어나 아이를 어린이집에 등원시키고 오후 4시에 돌아오기 전까지 빠르게 회의와 집필을 꾸준히 해나가고 싶어요.” 멋진 작업실도, 반짝이는 영감과 아이디어로 후루룩 써내려가는 ‘작가적’ 순간에도 그는 무심했다. “작가가 가만히 이야기를 생각하는 것과 손으로 우선 쓰는 것이 뇌과학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는 과정이라고 하더라고요. 오히려 무언가 계속해서 쓰는 것이 새로운 개념을 끌어오는 데 더 효과적이라고도 해요. 일단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 성실히 쓰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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