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 속 코미디의 왕, 영화과의 현대미술가, 지독한 취향의 배우
- 28주년 창간기념 특별호로 만났으니 잠시 1990년대 후반으로 돌아가보자. 어떤 세기말을 보냈나.
= 반 아이들을 웃기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인기 자체는 호불호가 분명했던 고등학생? 그때 여러 개그적 시도들을 통해 미리 광대의 희로애락을 맛봤다. 사람들 앞에서 나서고 까부는 것을 좋아하는 만큼 혼자만의 영역과 충전할 시간을 필요로 하는 성향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다. 영화배우라는 개념을 내 안에 쉽게 들이지는 못했지만 대신 감정을 전달하는 사람, 모르는 사람과도 교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건 분명하다. TV를 끼고 살면서 그 시절의 우상들 -듀스, 서태지, 현진영-이라면 빠짐없이 좋아했다. 이런 면이 <기생수: 더 그레이> 촬영장에서 연상호 감독님과 잘 통했다. 배우 여러 명이 한 프레임에 나오는 장면에서 갑자기 혼성그룹 잼의 <난 멈추지 않는다>를 얘기하는 식인데, 서로 ‘내가 이만큼 알고 있다’고 경쟁적으로 과시하곤 했다. (웃음) 아, 덧붙이자면 지금 과거의 유행이 돌아오고 있는 패션 트렌드도 마음에 든다. 어릴 때 <신디더퍼키> <쎄씨>에서 봤지만 따라할 수 없었던 것들을 드디어 시도해볼 수 있게 됐다.
-돌이켜보면 구교환의 단편영화들도 일관된 아날로그 정서가 있다.
=어떤 느낌인지 알겠다. 스마트폰 없는 시대의 영화들을 사랑한다. 그래서 더 애타고 엇갈리고 안타까운 요소들이 발생되니까. 사실 나는 아직도 그 시간 속에 살고 있다. 얼마 전엔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코미디의 왕>을 봤다. 영화는 시간을 이기는 매체같다. 과거에 느꼈던 걸 지금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는 것에 놀라곤 한다.
- 서울예술대학교 영화과 재학 시절엔 어떤 학생이었나. 자기주도학습에 능한 부류가 아니었을까.
= 전공 수업 외의 다양한 수업들에 심취해 있었다. 약간 이마트 문화센터 다니듯… (웃음) 연기·영화와 관련 없는 수업을 들으면서 나 자신에게 집중한 시기였다. 어떤 분야를 지망한다고 해서 그곳에만 머무르면 좁은 곳에 갇혀버릴까 봐 불안했다. 그런 면에서 공방조형실습 수업이 내 인생에 끼친 영향이 크다. 데미언 허스트를 보면서 예술가의 기획자적 자질 같은 것에 감탄했고, 나는 넥타이에 시계를 달았다. 현대인의 바쁜 일상을 표현한 매우 촌스러운 현대미술 되시겠다!
- 유튜브 채널에 단편영화 작업을 꾸준히 공개하고 있고 관객과의 대화에도 곧잘 얼굴을 내비치곤 하지만 프레임 밖으로 나가면 조용한 생활에 익숙한 부류의 배우다. SNS 활동도 현재는 일절 하지 않고 있다.
= 교감하되, 함께 좋아하는 무언가를 매개로 두고 연결되는 것이 좋다. 그런 관심사가 내게는 영화, 그리고 드라마다. 이건 사람 구교환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 같다. 열렬한 동료이면서 한편 서로 무던히 공존하는 관계가 좋다. 2X9(함께 영화를 만드는 이옥섭, 구교환의 콤비 정체성)로서 유튜브에 올리는 콘텐츠에 팬들의 피드백을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이유도 그것이 일종의 대화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다.
- 폼 잡지 않는 태도를 좋아하는 이들도 많다. 톱 배우로 수십년을 살았지만 카메라 밖에선 여전히 소탈한 대표적인 인물로 양조위 같은 이름도 떠오른다.
= 세상에! (웃음) 말이 나와서 말인데 양조위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액션 신의 주인공이다. <색, 계>에서 “도망가요”라는 쪽지를 본 순간 거의 몸을 날리듯 피신하는 양조위의 움직임은 내가 살면서 본 것 중 가장 치사하고 아름다운 액션이다. 우스꽝스럽고, 비겁하고, 그래서 대단히 슬픈 몸짓. 이렇게 하나로 단정하기 어려운 사건과 인물을 만나면 흔들린다. 가수 이소라님에 대한 팬심도 비슷한 점에서 기인한다. 무대 위에서 엄청난 카리스마를 내뿜는 그가 실은 두손으로 마이크를 꽉 쥔 채 버티고 있다는 사실 같은 것을 알아차릴 때, 그런 복잡한 레이어가 아름답게 느껴진다.
- 구교환의 멜로드라마를 볼 시점이 왔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주성치 영화들과 더불어 좋아하는 영화로 곧잘 <첨밀밀>을 꼽곤 하는데, 최근 구교환을 사로잡은 새로운 사랑 이야기가 있다면 무엇인가.
= 요즘 영화는 아니고 내 기준 ‘애정 카테고리’에서 <첨밀밀>과 대적할 만한 또 다른 영화는 존 카사베티스 감독의 <글로리아>다. 마피아들의 세계 안에 그렇게 진득한 사랑의 정서를 담아내다니. 이런 변칙적인 장르물에 항복하곤 한다.
- 훌륭한 연출자이면서 <악마의 씨> 같은 작품에선 훌륭한 장르영화 배우로 기능하기도 했던 존 카사베티스가 구교환의 좋은 레퍼런스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이다. 존 카사베티스, 또 샘 레이미처럼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도 자신만의 지독한 취향을 지킨 사람들, 자기 작업을 계속해서 밖으로 공유한 사람들처럼 되고 싶다.
- 남겨둔 기대작이 많은 상황에서 앞으로 구교환식 유머와 익살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캐릭터를 하나 귀띔해준다면.
= 아직 발표된 적 없는 작품 중에서 말해도 되나. 언젠가 극장에 걸릴 내 첫 번째 장편영화 속 캐릭터다. 첫 장편 연출작은 꼭 내가 쓰고 주연배우까지 겸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가장 좋아하는 주성치의 영화들도 대부분 그가 직접 배우로 출연한 시기의 작품들이다.
- 첫 장편 연출작에 대해 그동안 잘 언급한 적 없는데 이건 언제 한 결심인가.
=음, 지금…?
- 그럼 지금 첫 연출작의 공개 시기도 대략 예상해본다면. (웃음)
= 더 늦기 전에, 내가 더 노련해지기 전에 만들고 싶다. 사실 장면들은 언제나 머릿속에 있다. 그런데 이미지로만 현혹하는 작품을 만들고 싶지는 않아서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반드시 영화로 만들어야 할 이유를 찾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런가 하면 또 어느 날은 영화를 찍기 위해 만드는 일도 나쁘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늘 끄적이는 농담들이 모여서 언젠가 더 거대한 농담이 되고, 그것이 누군가에겐 취향에 딱 맞는 영화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마음이 이토록 자주 바뀌니까 내친김에 오늘 미리 장담을 해둬야겠다. 언제든 번복할 기회를 주신다면, 기한을 5년으로 설정해놓으면 어떨까. 5년 안에는 꼭 공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