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시네마 디스패치
[김민성의 시네마 디스패치] 지역과 여행 섹션: 제주에서

여행 기사를 쓰기 위해 어디론가 떠나는 삶은 일종의 환상이다. 현실은 하나의 기사를 위해 모든 것을 아껴야 한다. 제주에서의 삶도 그랬다. 특별한 것도 없이 나는 취재를 위해 가장 저렴한 숙소를 예약하고, 한잔에 2천원하는 커피를 주는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다, 하루 종일 취재를 위해 근방을 돌아다니다 잠이 든다. 이것을 여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것은 그저 일일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환상만 찾는다. 그리고 여행 기사는 어떻게든 환상을 만들어야 한다. 정작 환상을 만드는 에디터 대부분은 환상적이지 못한 삶을 살지만. 이제 더이상 나는 환상을 바라지도, 기대하지도 않는다. 벌어지는 삶의 순간들에 그럴 수 있지라며 끄덕이고, 예상하지 못하는 사건에 그럼 그렇지 하며 순응할 뿐이다. 에디터에게 중요한 건 멋진 글솜씨나 찬란한 묘사 따위가 아니다. 마감을 지키는 능력, 충분한 수면 시간, 오래도록 걸을 수 있는 여유, 고요와 적막.

영화를 찍고 있는 다름씨와 함께 제주에 있는 한 예멘 음식점에 갔다. 처음 내가 예멘 음식점을 가자고 했을 때 다름씨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민성씨, 지금 흑돼지와 각종 산해진미가 넘치는 관광지에서 예멘 음식점에 관해 쓰는 게 맞아? 어차피 무슨 글을 써봤자 아무도 읽지 않을 게 뻔한데요. 그래도 에디터면 응당 대중성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맞지 않겠어? 그래서 선생님은 대중적인 영화 찍으시나요. 우리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예멘 음식점에 가기로 했다. 그곳은 한국인들보다 예멘인들이 더 많았고 우리가 그곳의 문을 열었을 때 손님들은 되레 우리를 신기해했다. 다름씨와는 일로 알게 된 사이인데 어쩌다 서로 개인적인 이야기까지 털어놓는 사이가 되었다. 이건 그의 영화를 보며 갖게 된 내밀한 신뢰감인 동시에 그가 내 삶을 무너뜨리지 않을 것이라는 거리감 덕분에 생긴 친밀감일까. 영화나 잡지, 그리고 예술에 관해 이야기할 법도 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의 대화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나 ‘어떻게 벌어야 하나?’ 같은 이야기로만 채워졌다.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다름씨에게 몇년 내에 하던 일들을 모두 정리하고 어디론가 내려가고 싶다고 고백했다. 이제는 여행이 아니라 한곳에 머물고 싶어요. 다름씨는 고개를 흔들며 그것마저 환상이라고 답해주었다.

제주에서 보낸 그해 여름, 일기를 펼쳐 적은 단편적인 기록을 다시 죽 읽어보면서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떠오른 플롯은 그해 여름의 한 장면을 가져다 쓰는 것이었다. 여행 기사를 쓸 때 중요한 것은 너무 개인적이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개인적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3천자가량의 원고를 편집장에게 보내자 곧 피드백이 왔다. “좋네요. 하지만 약간 작위적이네요. 여행지에서 한 사람에게 이렇게 많은 일들이 연달아 일어난다는 걸 누가 믿겠어요.” 나는 웃었다. 하긴 종종 나도 내 인생이 믿어지지 않았으니까. “그래도 중반 이후부터는 한결 좋네요.” 편집장에게 답이 왔다. “계속 써보세요.”

지금 초고를 다시 살펴보니 기사가 얼마나 기사답지 못했는지 확인하게 된다. 어떤 부분은 그저 일어난 일들의 나열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 대부분은 바꿀 수 없다. 자신의 시행착오는 언제나 발행된 이후에나 확인할 수 있는 법이다.

*

2023년 6월 타는 듯한 여름의 제주시는 사람이 가득하다. 환한 밤, 자전거를 타고 해변을 달리는 날들, 낭만적인 노을. 모두가 해외로 떠나는 지금 우리가 제주 구도심을 선택한 이유는 더 새로운 것을 소개하기 위함이 아니다. 가장 새롭지 않은 곳에서 우리는 다른 것을 발견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구도심에는 빛나는 곳이 아니라 빛났던 것을 찾는 사람들이 모인다.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이 차를 타고 와서 선탠오일을 바르고 햇볕에 그을리고, 사람들은 먹고 마실 곳을 찾아 어리둥절해하며 하릴없이 돌아다닌다. 모두 이 지역을 찾아온 방문객들이다. 하지만 우리가 찾은 곳은 관광객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산도, 바다도 보이지 않는 길가에 위치한 예멘 음식점. 우리는 그곳에서 누군가는 먹을 게 못 된다고 생각하는 음식들을 먹으며 모든 것이 한없이 평화롭고 매력적이라고 느낀다.

줄 바꿔서,

해가 진 지 몇 시간이 지난다. 우리는 그곳에서 누구보다 낯선 대접을 받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웃고 떠들다 피곤함에 지쳐 떠난다. 마치 영화관을 떠나는 관객처럼. 숙소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바닥에 눕는다. 차가운 타일이 등에 닿는다. 옷을 벗어 문 옆으로 찬다. 조명이라고는 문틈으로 흘러 들어오는 희미한 빛. 은색의 어슴푸레한 빛이 전부다. 그 빛을 응시하며 이 여행이 끝났음을 깨닫는다.

*

나는 이런 결말을 좋아한다. 차에서 내려 잠시 노을이나 바라보다 다시 예정된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이야기.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바다로 뛰어들지만 다음날에 다시 빨래하고 청소하는 일상으로 돌아가는 이야기. 시답잖은 농담이나 하다가 별 볼 일 없이 끝나는 이야기. 여행 기사를 쓸 때 중요한 것은 얼마나 정확하게 그 지역을 묘사했느냐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감 시한을 지키는 일이다. 그다음으로 중요한 일은 얼마나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그대로 쓰느냐가 아니다. 어떤 세계를 만들고 또 그 세계에서 다시 무엇을 시작하느냐다. 우리가 읽고 있는 기사는 물론 그곳에 관한 것이지만 정확하게는 그곳을 다녀온 누군가의 기억이기 때문에. 누군가 자기 인생의 순간을 기사로 쓰고, 우리는 그들의 인생을 훔쳐보며 우리의 인생을 떠올리기 때문에. 아마 그것이 여행 기사의 미학일 것이다.

예멘 음식점에서 맥주만 벌컥벌컥 들이켜던 다름씨가 말했다. “민성씨, 한국에서는 한국 음식을 먹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