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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영화에 새겨진 감각과 체험의 오차들, ‘보 이즈 어프레이드’
김예솔비 2023-07-26
*영화의 결말에 대한 자세한 언급이 있습니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면서 작성한 메모를 확인해 보니, ‘관객이 웃지 않는다’고 적혀 있었다. 정말 웃지 않았을까? 물론 누군가 조용히 폭소를 터뜨렸으나 내가 듣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일은 항상 일어난다. 그러나 설령 이 메모가 영화의 혼란스러움에 휩싸여 날조된 픽션이라 하더라도, 이런 픽션을 쓰게끔 했던 어떤 충동이 영화에 있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장면에서. 보(호아킨 피닉스)가 벌거벗은 채로 (화면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남근을 덜렁거리면서 거리를 달릴 때, 자신의 아들 앞에서 한번도 섹스를 한 적 없다고 고백하는 아버지가 등장할 때, 죽은 줄 알았던 보의 아버지가 대뜸 고추괴물의 모습으로 나타나 울부짖을 때. 아리 애스터는 루저 남성의 자아를 박살냈다. 거세공포라는 유산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초라한 파편들로 해체시켜놓고 있다. 분명 이 장면들이 조롱을 동반한 웃음을 유발하는 농담임을 알지만, 관객은 (거의) 웃지 않는다. 이 메모가 적힌 날은 <보 이즈 어프레이드>를 두 번째로 보던 날이었기에 객석의 동태를 살필 여유가 있었다. 메모가 적히던 순간 나는 이전 관람의 기억을 바탕으로 특정한 반응을 예상했고, 그 예측이 빗나가는 오차를 받아적었던 것이다. 우리는 아마도 웃어버리기에는 난처하거나, 탈진했거나, 혹은 영화로부터 (강덕구 평론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착취당했다.

착취라는 표현은 다소 의아할 수 있다. 얼핏 보았을 때 영화 속에서 착취당하는 것은 ‘보’이기 때문이다. 영화 내내 보는 자신이 짓지 않은 죄로 질책받고, 쫓기거나, 감시당한다. 하지만 영화는 그 이유를 명확하게 알려주지 않는다. “나한테 대체 왜 이래요?”라고 반문하는 보의 억울한 얼굴이 강조하는 것처럼 ‘왜’에 대해 영화는 어느 지점에 이르기까지 집요하게 침묵하며, 이는 서사의 시점이 보가 아는 것 바깥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영화는 보의 내면에 대한 체험으로 한정되고, 관객은 보의 심리와 동일시되어 그의 여정을 따라가게 된다. 그렇게 주인공으로부터 관객에게 전이되는 피동형의 폭력은 아리 애스터가 자신의 6분짜리 단편 <보>에서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바 있는 소재다. <보>에서는 <보 이즈 어프레이드>의 시퀀스와 거의 동일하게 늦잠을 잔 보가 아파트 열쇠와 트렁크를 도둑맞고 강박과 공포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보 이즈 어프레이드>에서와 마찬가지로, <보>에서 도 모든 사건의 발단은 엄마의 집으로 향하는 귀환의 불발처럼 보인다. 그러나 <보>의 피동형은 의존적 모자 관계에 대한 느슨한 암시만을 남겨놓음으로써 극대화된다.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이미 완결된 <보>의 압축적 체험을 3시간가량으로 늘려놓은 사족일까? 물론 <보 이즈 어프레이드>에 이르러 이 체험은 더욱 정교해지고 구체화된다. 보는 엄마의 집으로 가야만 하지만, 계속해서 도착을 미루면서 여정을 지연시킨다. 영화를 추동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죄책감이다. 상담사와의 대화 도중 그가 엄마를 보러 집에 가고 싶지 않다는 반발심을 들킨 순간부터 움트기 시작한 죄책감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압박으로 외부화된다. 상황은 악화되고, 이는 무너진 치안과 통제하고 감시하는 시선으로 표상되는 자본주의에 대한 알레고리로 이어진다. 보는 마치 독 안에 든 쥐처럼 제자리를 맴돈다. 영화는 이러한 답보상태가 엄마의 (심지어 머리가 없는) 시체를 확인하는 것에 대한 공포, 그리고 자신의 실체화된 죄책감과 맞닥뜨리는 순간을 지연시키고자 보 스스로 만들어낸 악몽 같은 환상일지도 모른다는 해석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떠올려보자. 집 앞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이후 보는 환자복에서 잠옷으로, 연극의 무대의상으로 갈아입으며 잠과 현실, 무대가 뒤섞이는 몽롱한 상태를 유지한다. 이처럼 보의 정신에 대한 체험은 여러 맥락으로 갈라지고 중첩되면서 서사와 결합한다. 말하자면 <보 이즈 어프레이드>의 형식은 <보>에서 제시한 모티프를 극단적으로 팽창시킴으로써 지연되고 있다는 체험 자체, 빠져나오기 위해 애쓰면서 동시에 의도적으로 실패하는 보의 이율배반적인 몸부림 자체를 내용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형식 속에서 게임의 감각을 느끼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게임: 행위성의 예술>의 저자 C. 티 응우옌에 의하면 게임 속에서 우리의 일상적 동기 구조는 역전된다. 일상생활에서 결과라는 성취를 위해 수단을 택하는 것과 달리, 게임 속에서 종종 우리는 고군분투라는 수단을 경험하기 위해 결과(목표)를 지정받게 된다. 그러므로 게임을 고유한 예술적 경험으로 만드는 것은 자발적으로 분투하는 행위성이다. 이를 <보 이즈 어프레이드>에 비추어보자. 우리는 이미 보의 과거, 현재, 미래를 중계하는 CCTV 화면 속에서 이 영화의 결말을 본 적 있지 않은가. 결말이 정해진 추락 속에서 그 추락의 시간을 유의미하게 만드는 것은 게임의 체계를 빌리는 것밖에 없다. 또한 보는 게임 캐릭터처럼 영화 내내 부활과 (재)탄생을 거듭하기도 한다. 보가 사고를 당해 기절하고 깨어날 때마다 영화는 그가 반복해서 꾸는 악몽을 삽입한다. 이 악몽은 욕조에 잠겨 있는 어린 보의 시점숏으로 전개되며, 어린 보는 욕조에 있는 동시에 욕조 바깥에서 자신을 씻기려는 엄마에게 저항하는 또 다른 자신을 본다. 엄마는 아들을 다시 뱃속으로 집어넣으려 하고, 아들은 엄마라는 족쇄에서 벗어나려 버틴다. 이 악몽의 끝에서 엄마에게 반항하던 보는 다락방에 갇히고, 가장 수동적인 상태의 보만 생존한다.

특기할 것은 이 장면에서 카메라가 욕조 안에 있는 보의 시점으로 촬영되었다는 점이다. 사실상 영화 내내 보는 줄곧 수동적인 위치를 자처했으며, 영화는 서사적으로뿐 아니라 시각적으로 그러한 시점에 관객을 위치시킨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영화를 체험하는 감각의 오차가 발생한다. 영화는 게임의 체계를 빌려오지만 정작 이 게임은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참여를 통한 행위성이 아닌 행위성의 부재, 액션이 아닌 리액션을 유일한 반응으로 쥐여주고 있다. 어쩌면 관객이 웃지 못한 것은 실행할 수 없는 게임을 눈앞에 둔 난처함때문일지 모른다. 영화에 산재된 의미망을 연결 짓는 인지적 게임을 적극적으로 시도해야 할지, 한 루저 남자의 시점을 통해 그의 내면을 성실하게 체험해야 할지, 의미와 반응 사이에서 본질적으로 어긋나는 난처함이다. 두명의 자신으로 분열된 보의 악몽과는 달리 관객의 몸은 둘로 분열될 수 없다.

영화는 보가 엄마의 집에 도착한 뒤에야 악몽의 근원을 밝힌다. 엄마는 사실 살아 있었고 이 모든 연극은 자신을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 아들을 시험대에 올리는 보복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너무 뒤늦게 정체를 드러낸 엄마의 집착은 뒤틀린 모자 관계 속에서 길항의 힘으로 작용하지 못하고 게임의 설계도를 드러내는 추후의 반전에 그치고 만다. 결국 양수 속으로 침몰하며 파멸과 동시에 끝나는 보의 운명은 영화의 스펙트럼을 내적인 파열에 대한 체험과 동일시하려 했던 영화의 한계와도 같다. 무엇보다 영화적 체험은 단순히 시점의 일치를 구하는 단선적인 감각이 아니라 관객의 인지적 참여를 통해 세계로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경로라는 것. 아리 애스터가 이를 몰랐을 리는 없다. 다만 그는 담론을 장면화하는 것과 자신의 자전적 불안을 패러디하는 것 사이에서 둘로 분열된 몸을 미처 수습하지 못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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