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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영의 디스토피아로부터] 할머니
김소영 2023-11-02

나이가 드는 건 좋은데 노인이 되는 건 두렵다. 나는 생활의 경험을 쌓고 나에 대해 더 잘 알게 된 지금이 과거 어느 때보다 좋다.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 그런데 노인이 된 나는 상상이 되지 않는다. 눈이 침침하고 근력이 부족하고 청력이 떨어지는 신체상의 노화도 걱정이지만, 사회적으로 어떤 존재가 될 것인지 떠올리면 겁부터 난다. 모든 신기술에 꼴등으로 적응해온 나는 키오스크와 태블릿 주문에 익숙해지는 데만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따라잡을 자신도 없고, 초연해질 배짱도 없다. 나는 도태될 것이다. 광고 속 할머니는 보통 온 가족과 함께 등장한다. 희끗희끗한 머리가 단정하게 손질되어 있다. 깔끔한 니트를 입고 딸 아들 손주들에 둘러싸여 온화하게 웃는다. 이런 게 사람들이 이상적이라 생각하는 할머니의 모습일까? 하지만 나는 누군가의 할머니가 될 수 없다. 자녀가 없으니까. 그런데도 마트 같은 데서 나를 “어머니”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앞으로 나를 “할머니”라고 부를 것이다. ‘할머니’는 나이 든 여성을 친근하게 부르는 말이기도 하다. 할머니라는 말 자체는 좋다. 다만 어떤 할머니가 될지, 진로가 고민된다. 어떤 사람들은 우아한, 명랑한, 귀여운, 세련된 할머니가 되고 싶다고 한다. 그러려면 경제적 정서적 여유가 필요하고, 내 나이쯤부터 그런 기미가 보여야 할 텐데 그른 것 같다. 역시 나는 도태될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동네 미용실 의자에서 갑자기 길을 찾았다. 염색을 자주 하면 머리카락이 상할 수도 있으니 며칠 있다가 오시라는 원장님한테 호통을 치는 할머니 덕분이었다. “죽을 때까지 몇번이나 할지도 모르는데 그냥 해줘!” 할머니는 원장님이 염색약을 바르는 동안에도 엄청난 기세로 말씀을 이어갔다.

“나는 인제 하고 싶은 거 다 해. 수박도 한통씩 먹어. 복숭아는 일곱개. 포도는 입이 시릴 때까지. 아주 잇몸이 시릴 때까지. 내가 90살까지는 살아야지 했는데 이제 12년밖에 안 남았어.” 그러자 다른 할머니들의 증언이 쏟아졌다. 나는 술 먹고 담배 피우고 못된 건 다 하는데 블루베리를 먹어서 건강하다, 나는 파프리카 먹고 눈이 좋아져서 안경을 내던졌다, 나는 운동 안 하고 친구들이랑 얘기나 하면서 하루에 딱 만보만 걷는다. 할머니들의 머리는 모두 짱짱하게 까맸다.

이제 내 꿈은 수박 한통을 해치우는 할머니가 되는 것이다. 저녁에 아파트 벤치에 앉아 산책 나온 동네 강아지들의 인사를 받는 할머니도 되고 싶다. 도서관에 큰 글자 도서를 제일 많이 신청하는 할머니가, 철마다 버스를 타고 패키지여행을 다니는 할머니가 되겠다. 병원에서 검사실을 잘못 찾고 의사에게 같은 질문을 세번 하는 할머니도 되겠지. 그 걱정은 그때 가서 하자. 2053년의 ‘요즘 문화’에 쩔쩔매는 할머니가 되겠지만 그때 가서 쩔쩔매자. 일단 머리가 까맣고 후드티를 입는 할머니가 되고 싶다. 나의 노후 준비는 수박 먹는 양 늘리기, 블루베리랑 파프리카 챙겨 먹기다. 나중에 만보를 함께 걸을 친구들과 계속 술 먹기, 동네 강아지들 이름 많이 알기다. 나는 끝까지 살아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