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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희의 디스토피아로부터] 그들이 그렇게도 밉고 우스워 보이더냐?
정준희 2024-01-18

가족 같은 회사. 나도 그렇지만, 직장을 다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싫어하는 말일 테다. 가족으로만 구성된 회사는 있을 수 있어도, 가족의 화목함을 기대할 만한 회사란 없다. 가족조차도 애초에 화목함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목적이 있는 기업, 특히나 영리를 추구하는 회사는 화목함이 아닌 다른 운영 원리에 기초를 둘 수밖에 없고 그게 훨씬 더 바람직하다. 따라서 가족 같은 회사란 가족보다도 못한 회사의 다른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수십년도 전에 대학이란 곳에 학생이 되어 다닐 때에도, 같은 ‘족’(族)자가 붙는 단어인 민족이란 말이 쓰일 때 거슬린 적이 많았다. 게다가 그 거대하기만 한 민족을 좁디좁은 가족으로 환원하는 어법은 더욱 싫었다. 국토를 어미나 누이의 몸으로 환유하고, 침략자를 그 여성 신체를 유린하는 이민족 남성으로 묘사하는 발언을 들을 때마다 돋아 올랐던 소름. 내가 침략당하는 민족에 속한 남성‘으로서’ 같이 분노해주길 바랐을 것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분노는 오히려 중간에서 턱턱 막혔다.

그런 수사법이, 적어도 진실한 마음을 담고 있는 한, 완전히 그릇된 것만은 물론 아니다. 잘못은 환유 자체가 아니라, 게으르고 자기중심적인 시선에 있다. 사장이자 가장의 시선으로 묶인 회사와 가족은 화목하기보단 억압적일 가능성이 높다. 가족의 평화와 회사의 안녕이란 그 각각에 맞는 인간관계를 정립하는 데에서 올 뿐이다. 내 누이나 어미가 유린당하는 건 당연히 견디기 어려운 분노를 만든다. 하지만 그 이전에 한 인간 집단에 의한 다른 인간 집단의 대량학살 자체에 분노해야 한다.

나는 배우 이선균을 죽음의 골짜기로 밀어넣은 그 숱한 유무형의 폭력에 분노한다. 정치적 선호를 떠나서, 정치인 이재명의 목덜미에 칼날을 꽂아넣은 그 광기에 절망한다. 그런데 그보다 더 화나고 또 황망한 것은, 그걸 바라보는 이들의 냉랭하기 짝이 없는 시선이다. 죽음에 이르렀거나 이를 뻔했던 그 과정의 폭력성에 주목하기보다, 당사자들이 뒤집어써야 할 티끌과 오명에 초점을 맞추는 시선과 비릿한 냉소. ‘잘나갔던 배우’니까 그 정도 손가락질은 감당했어야 했다고? 혹은 ‘국회 안에서 큰 권력을 휘두르는 정치인’이니까 살상 행위를 한 범인은 너그럽게 용서하고 서울대병원으로 향했던 헬기 문제나 책임지라고?

굳이 같은 민족으로, 국민으로, 정치집단으로, 또 가족으로 환원해서 애끓는 공감을 호소할 생각, 없다. 그런데 한 인간이 다른 인간들로부터 당해야 마땅할 폭력이란 것도, 없다. 그런 폭력에 의해 죽음에 이를 뻔했거나 실제로 이르고 만 이들 앞에서 가장 먼저 꺼내놓는 게 냉소라면, 이른바 ‘타자화’와 ‘대상화’의 정도가 심각할 지경에 이른 게 아닐까? 모든 폭력은 상대가 나와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비릿한 인식에서 시작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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