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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영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질투
김소영 2024-02-29

부정적인 감정이 나를 압도할 때는 종이 한장을 꺼낸다. 공책은 안되고 반드시 낱장 종이여야 한다. 거기에 감정의 내용과 그것이 생겨난 이유를 적는다. 이 종이는 곧 찢기고 구겨져 쓰레기통으로 갈 것이므로, 나는 마음 놓고 솔직해진다. 그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고, 다 쓴 다음에 보면 내용이 생각보다 싱거워서 왠지 부끄러워진다. ‘기분이 안 좋다’ 정도로 뭉뚱그린 감정이 사실은 불안, 두려움, 분노, 미움, 슬픔 등이었다는 걸 알면 그것들을 잘 다룰 수 있을 것만 같다. 문제는 ‘질투’다. 종이에 이 낱말이 적히면 생각이 복잡해진다.

‘질투는 나의 힘’이라며 긍정적인 에너지를 끌어올리는 사람도 있다. 그는 아마 기형도의 시 <질투는 나의 힘>을 모르거나 제목만 아는 사람일 것이다. 시 속에는 ‘힘’이 없다.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라는 탄식만 있을 뿐이다. 나는 그 시를 무척 좋아한다.

사실 나는 질투의 장인이다. 평생 질투를 개발하고, 거기에 사로잡히고, 질투와 싸우고 이겨내면서 살아왔다. 타고난 건지 성격이 형성될 때 무슨 불상사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어릴 때는 어른들한테 ‘샘이 많다’는 말을 들으면, 어딘가에 있을 샘이 없는 아이를 질투했다. 그 아이는 이렇게 듣기 싫은 말을 안 들어도 될 테니까. 어떻게 하면 질투를 그만둘 수 있는지 전혀 몰랐기 때문에 그저 눈물만 뚝뚝 흘렸다. 반이 달라진 친구가 새 친구를 사귀었을 때 질투를 느낀 정도는 성장의 한 과정으로 해두자. 학창 시절 나는 나랑 같은 선생님을 좋아하는 아이의 예쁜 이름을 질투했다. 선생님이 그 애 이름을 부를 때 기분이 더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른이 된 뒤에도 나의 질투는 계속되었다. 한번은 내가 좋아하는 모임에 지인을 소개한 적이 있다. 예상했던 대로, 나는 어쩜 이렇게 딱 맞는 이를 데리고 왔느냐고 칭찬을 받았다. 그런데 그이가 나보다 관심을 많이 받는 것, 그래서 질투가 빚어지는 건 예상하지 못했다. 모임에 가기 싫어졌다. 그렇다고 나만 빼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건 더 싫었으므로, 꾸역꾸역 갔다. 이런 나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 한숨이 났다.

그래서 믿을 만한 친구들에게 내면 깊은 곳의 이 어둠에 대해 고백했다. 그런데 평범한 사람들은 질투의 심각성을 짐작도 못하는 걸까? 친구들은 하하 웃으며 그 뒤로 나를 ‘질투의 무언가(화신, 화산, 불가마 등)’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쯤 되니 나도 스스로 ‘질투의 생난리’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터놓으니 조금 나아졌지만, 여전히 나는 질투를 경계한다. 질투는 남의 것을 탐내고 깎아내리는 감정이다. 반대로 남이 가진 바로 그것을 열망하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이기도 하다. 이 모순이 자신을 끈질기게 끌어내린다.

얼마 전 인스타그램에서 다른 독서 선생님, 작가들의 멋진 포스팅을 보다가 문득 발밑이 뜨거운 걸 알았다. 질투의 불길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이었다. 나는 불을 끄듯 얼른 ‘좋아요’를 눌렀다.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하기. 그게 지금껏 내가 알아낸 제일 좋은 방법이다. 그러면 적어도 내 안의 모순은 해결된다. 그런 다음 더 좋은 수업, 더 좋은 글을 고민하는 게 훨씬 낫다. 일단 급한 불은 껐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당분간 인스타그램 앱은 열지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