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스코어가 이렇게까지 많이 든 게 처음이다. 정말 비현실적이다.” 개봉 3일 만에 100만 관객 돌파, 이튿날 200만 돌파. 데뷔작 <은교>(2012) 이후 어느덧 출연한 영화가 10편이 넘은 데뷔 11년차 배우 김고은은 지난 며칠간 <파묘>가 보여준 이례적 흥행 기세에 놀라워하며 운을 뗐다. 또래 젊은 배우 중 가장 돋보이는 표현력을 가진 그는 이번 작품에서 알아주는 젊은 무당 화림으로 분했다. 극 중 온몸으로 신을 받들던 그에게서는 코끝을 귀엽게 찡그리던 소녀(<쓸쓸하고 찬란하神 - 도깨비>)도, 가난한 집의 첫째 딸(<작은 아씨들>)도, 독립군의 정보원(<영웅>)의 모습도 찾을 수 없었다. 그를 직접 만나 <파묘>와 화림, 그리고 요즘 김고은을 요모조모 파헤쳐보았다.
* 인터뷰에 <파묘>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흥행 가운데 화림과 봉길(이도현)의 관계에 관한 관심이 특히 뜨겁다. 둘이 사제 관계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시나리오에 더 있었나.
= 그렇진 않았다. 감독님이 해주신 설명을 보태자면 대학 야구선수였던 봉길이 내가 있는 사당으로 찾아온 거다. 자기가 신병을 앓고 있는데 신을 받겠다고. 화림은 그 길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잘 아니까 안타까운 마음에 봉길을 말리지만 그의 의지가 워낙 강해 결국 내림굿을 해주고 둘은 사제 관계가 된다.
- 화림, 봉길, 상덕(최민식), 영근(유해진) 등 주요 인물들의 이름이 독립운동가의 이름과 같고, 대살굿을 할 때 화림이 요즘 유행하는 ‘가시 번’ 헤어스타일을 하고 컨버스 운동화를 신었다는 점, 공연장에서 쓰는 마셜 스피커를 썼다는 점까지 화제다.
= 독립운동가들의 이름을 따서 캐릭터명을 지었다는 건 감독님이 한창 촬영 중일 때 지나가는 말로 해주셔서 알고 있었다. 가시 번은 분장감독님의 아이디어였다. 으레 하는 머리 망과는 다르게 가보자고 의견을 주셔서 좋다고 했다. 컨버스는 대살굿이 역동적인 굿이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정확하지는 않으나 요즘 (무속인) 선생님들도 굿할 때 운동화를 신기도 한다고 알고 있다. 그리고 마셜 스피커는… 솔직히 있는 줄 몰랐다. (웃음)
- 화림이 “저는 한국사람이에요”라고 밝히는 첫신으로 돌아가보자. 처음에는 그 신을 화림이 정확한 성격이라 그런가보다 하고 넘겼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일본인이 아닌 한국인이라고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것이 작품의 전체 주제를 관통하는 행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 그 신이 관객에게는 주제적으로 다가왔겠지만 내게는 현실적으로 남아있다. 실제로 첫 촬영이었기 때문이다. 화림처럼 옷을 입고, 그처럼 말을 뱉는 것도 다 어색할 때였다. 아직 모든 게 내 것 같지 않아 불안감도 컸다. 한국인이 일본인으로 오해받았을 때 우리만이 갖는 감정선 같은 게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준비한 기억도 난다. 화림이 일어를 꽤 하는 이유는 그가 아기 무당 때부터 모셨던 선생님이 일본에서 활동했었고 그를 따라 일본에 가기도 했기 때문이다.
- 화림을 범접할 수 없는 무속인이 아닌 커리어에 자부심이 있고 자기관리에 철저한 직장인처럼 표현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모든 인물이 직업인으로서의 자기 삶을 살아간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고 거기서 오는 리얼리티가 좋았다. 그 점을 살리고 싶었다. 그래서 연기할 때 화림이 무속인이라는 ‘직업’을 가졌으며 워라밸을 잘 챙기고 젊은이답게 꾸미는 것에도 관심이 많은 인물처럼 느껴지도록 신경 썼다. 외적인 컨셉의 경우 현실을 많이 반영했다. 컨셉 회의에서 들은 바에 따르면 요즘 젊은 무속인 중에는 무속인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모를 정도로 잘 차려입고, 좋은 차를 끌고 다니는 분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그 밖에 화림과 관련해서 내가 아이디어를 낸 부분은 말투다. 내 생각에 화림은 상대가 상덕처럼 나이가 많더라도 꼬박꼬박 존대를 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존댓말로 쓰인 대사들을 듣기에 너무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반말, 존댓말을 섞어가면서 쳤다.
- 무당이 되기 위한 준비 과정은 어땠나. 뮤지컬영화 <영웅> 때만큼 지난한 연습실 생활을 거쳤을 것 같은데.
= <작은 아씨들>을 찍다가 한달도 안 있다가 <파묘>로 넘어가야 하는 일정이었던 터라 시간 여유가 많지 않았다. 대신 드라마 휴차 때 틈틈이 선생님들 집에 찾아갔다. 사실 그 시간 동안 기술적으로 뭔가를 익힌다기보다는 선생님들의 삶은 어떠했는지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밥 먹고 커피 마시다가 잠깐 방에 들어가서 징 치고, 경문 외고, 동작 배우고, 그러다가 다시 또 나와서 바람 쐬고 몇 시간씩 수다 떨기를 반복했다. 이야기를 들을수록 뭐랄까, 무속인들의 삶에 스미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범하게 직장 다니다가 원치 않더라도 신을 받아야만 하는 상황을 겪고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 이들의 공통된 정서를 이해하고 싶었다. 개인적으로 굿도 많이 보러 다녔다. 유심히 보면서 캐치하고 싶었던 건 무속인들이 퍼포먼스에 들어가기에 앞서 하는 특유의 움직임들, 예컨대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떤다든지, 뭔가를 살피고 느끼면서 도구를 집는다는지 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보기 힘든 대국은 동영상으로 찾아봤다. 같은 동작일지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느낌이 다르고 무속인마다 자기 스타일이 다 있더라. 거기까지 확인한 뒤에는 내 스타일대로 가도 되겠다는 방향성이 잡혔다.
- 스미는 시간을 거쳐 들어간 본 촬영은 어떻게 기억하나. 대살굿 신과 혼 부르기 신에서의 김고은 배우는 무당뿐만 아니라 댄서, 스포츠 선수, 가수 등 여러 아티스트를 삼킨 것처럼 보였다.
= 대살굿 신은 전날 리허설을 하고 그다음날 반나절 동안 본 촬영에 들어갔다. 4명의 베테랑 촬영감독님이 카메라 한대씩 잡고 알아서 찍어주셔서 나는 내 퍼포먼스에만 집중하면 됐었다. 칼을 허벅지부터 댈 건지, 볼부터 댈 건지 하는 순서까지는 정했고 머리는 알아서 풀렸다. 혼 부르기 신을 찍을 땐 음을 타며 경문을 외는 게 어설퍼 보일 것 같아 끝날 때까지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준비할 때도 걱정이 하도 돼 자문해준 젊은 무속인 선생님의 경문 녹음본을 통으로 외웠다.
- 험한 것과의 사건 뒤 4인방은 각자 후유증을 안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 어떤 일이든 결국 다 지나간다. 중요한 건 그 자리에 어떤 식의 흔적들, 잔재들이 남는다는 거다. 그럼에도 우리는 거기서 계속 살아가야 하는 것이고. 장재현 감독님이 그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사건 이후에 인물들의 삶까지 영화에 담으셨다고 생각한다.
- 데뷔 초에는 배울 게 많은 선배의 출연 여부가 작품 선택의 제1기준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11년차에 들어선 지금은 그 기준에 변화가 생겼을 것 같다.
= 아무래도 이제는 선배들에게 하나라도 더 보고 배워서 부족한 나를 채워야 한다는 부담감을 덜 느낀다. 때마다 다른 선택을 할 만큼의 여유가 생겼달까. 예컨대 <파묘>는 감독님에 대한 신뢰 때문에 했다. <파묘>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 내 상상으로 채워야 하는 지점들이 많다는 게 불안 요소였는데, 번뜩 ‘이건 오컬트의 장재현 감독님 작품이잖아’라는 생각이 들면서 주저함이 사라졌다. 그렇지만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건 시나리오에 답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우선 그 안에서 무엇인가를 확보해야만 레퍼런스든 뭐든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 오래전부터 음악 예능에 출연하거나 O.S.T를 부른 적도 있지만 최근 부쩍 음악과 가까워졌다는 인상이다. <영웅>이 지지난해 말에 개봉했고 얼마 전엔 <이효리의 레드카펫> 무대에 섰다. 10주년 팬미팅에서 뉴진스의 <Hype boy>를 춘 게 크게 화제가 되기도 했고.
= 집에 들어가자마자 음악부터 틀고 작품마다 어울리는 플레이리스트를 짜는 그런 이미지가 생겨버렸는데 사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웃음) 굳이 따지자면 노래방이라는 공간에 가는 걸 좋아한다. 집에서 음악을 거의 듣지 않는다. 심지어 블루투스 연결하는 법도 서툴다. 다들 잘 모르지만 정적을 잘 견디는 편이다.
- 화림의 대사를 빗대어 묻자면 “보이고 만질 수 있는 것만” 믿는 편인가.
= 그렇지 않다. 그건 너무 일차원적이지 않나. 이를테면 난 외계인도 있다고 본다. 이 드넓은 세상에 인간만 살 리 없다. (웃음) 우리가 바닷속 끝까지 들어가보지 못했듯 아직 지구 밖 우주를 다 탐색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진지하게 생각한다.
- 확정된 차기작은 이언희 감독의 <대도시의 사랑법>과 넷플릭스 시리즈 <은중과 상연>이다.
= 두 작품 모두 우정을 다룬다는 공통점이 있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촬영을 마쳤고 올해 안에 개봉한다. 박상영 작가의 연작 소설 <대도시의 사랑법> 중 <재희>를 다룬다. <은중과 상연>은 한창 촬영 중이라 2025년은 돼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아주 큰 주제 하나가 있고 그걸 향해 달려가는 이야기인데 그 커다란 게 무엇인지는 비밀로 남겨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