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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관객이 사고하도록 돕는 영화음악,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시바시 에이코 음악감독
정재현 2024-04-02

이시바시 에이코는 전천후 뮤지션이다. 그 자신이 수십장의 앨범을 발매한 음악가이자 드러머이고, 호시노 겐이나 마에노 겐타 등의 뮤지션이 음반 작업과 라이브 무대 모두에서 키보디스트나 플루티스트로 적극 기용하는 연주자이기도 하다. 이시바시 에이코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과 <드라이브 마이 카>로 한 차례 호흡을 맞춘 바 있다. 하마구치 류스케와 무성영화 형식의 라이브 공연 <GIFT>를 기획 중이던 그는 어느 날 동일 영상을 활용한 영화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각본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잘됐다!”를 외치며 영화를 위한 몇곡을 추가로 만들어갔다. 현재 <GIFT>의 월드 투어 중인 이시바시 에이코와 <씨네21>이 화상으로 만나 나눈 단독 인터뷰를 전한다.

-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에게 영화의 배경인 자연환경 답사를 위해 야마나시현이나 나가노현의 거주민들을 직접 소개해주었다고. 해당 지역의 이미지가 스코어를 작업하는 데 영향을 주었나.

실제로 나의 거주지와 생활권이 나가노현 근방이다. 매일 차를 타고 장을 보며 온천을 다닐 때 보이는 풍경이 내 생활의 일부다. 그 풍경이 자연스럽게 나의 음악에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 영화와 주제의식을 공유하는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연극 <쓰레기, 도시 그리고 죽음>을 하마구치 감독이 궁금해하던 중, 당신이 위 연극이 일본 무대에 올랐을 때 음악감독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작업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고 들었다. 악기의 편성이든 조성의 사용이든, 연극의 음악과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스코어가 닮은 요소가 있나.

<쓰레기, 도시 그리고 죽음>을 무대에 올렸을 때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곡이나 러시아 민요 등 이미 삽입곡이 지정돼 있었다. 지정곡 위에 밴드 사운드를 새로 편곡하거나 신시사이저를 활용해 성부를 새로 편곡하는 식이었다. 그리고 한곡만 새로 가사를 써 연극에 추가했다. 영화의 스코어를 작업할 땐 <쓰레기, 도시 그리고 죽음>을 크게 의식하진 않았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연극에 활용했던 바그너의 곡들에서 지금의 스코어가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다.

- 대다수의 시퀀스에서 스코어가 중간에 뚝 끊긴다. 편집 방식에 관해 감독과 사전에 논의를 거쳤나.

음악의 사용 방식은 <드라이브 마이 카> 때부터 감독님에게 전적으로 일임한다. 감독님은 영화 내내 바이올린, 첼로 등 스트링(현악기)을 활용한 드라마틱한 음악이 반복되다 보니 이런 음악이 계속될 경우 관객의 감정을 뒤흔들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그리고 음악의 느닷없는 중단을 통해 음악과 관객간의 감정의 거리를 두고자 한다는 연출 의도를 설명해주었다. 나 역시 그 편이 더 맞다고 생각했다.

- 기타와 피아노, 바이올린과 첼로로 이루어진 악기 편성이 영화와 어울린다고 판단했나.

사실 처음 스코어를 작곡했을 땐 스트링 세션에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와 콘트라베이스를 염두에 두었다. 그런데 작업을 하다 보니 예산 문제가 생겨 비올라의 음역까지 커버할 수 있는 바이올린 연주자와 콘트라베이스의 음역까지 커버할 수 있는 첼로 연주자를 섭외하게 됐다. 이들의 연주를 더블링하며 풍성한 음의 효과를 만들어냈다. 여기에 일렉트릭 기타 사운드를 추가했으면 좋겠다는 감독님의 요구가 있었다. 나와 수차례 협업한 훌륭한 기타리스트 짐 오루크의 기타 사운드였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건네 들었다. 이미 만들어진 곡에 짐의 연주를 덧입어 지금과 같은 스코어가 탄생했다.

- 타쿠미(오미카 히토시)가 떠난 아내의 물건인 피아노를 쓰다듬을 때 흐르는 스코어엔 정작 피아노가 편성되지 않았다.

영상과 음악이 직접적인 관계를 맺길 피하는 감독님의 의도가 아닐까. 감독님은 감정을 자극하는 전형적인 음악을 사용하는 것이나 영상과 음악이 지나치게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을 꺼린다. 나 또한 영화에 음악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와 음악은 어른스럽게,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해야 한다. 영상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직접적인 음으로까지 표현하는 일은 피하는 편이 낫다.

- 영화음악의 기능이 뭐라 생각하나.

관객이 사고하도록 돕는 것. 음악이 관객의 감정을 정의, 강요, 유도하지 않아야 한다. 관객이 영화를 떠올리며 사고할 때 영화음악이 약간의 도움을 주는 정도로 기능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며 음악을 만들고 있다.

- 보육원의 아이들이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며 놀 때 영화 전체에서 가장 불길한 스코어가 등장한다. 어떤 경위로 작곡된 곡인가.

이 영화의 각본이 나오기 전 감독님이 ‘먼지’를 주제로 여러 아이디어를 내놓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 내가 먼지를 주제로 만든 신시사이저 연주곡이 시초였다.

- 하르트무트 비톰스키의 <먼지>(2007)에서 영감을 얻은 세곡이 있었다던데 그 곡을 사용했나.

그렇다. 감독님의 소개로 그 영화를 보게 되었다. 하지만 영화는 접어둔 채로 먼지나 쓰레기를 주제로 음악을 만들면 어떤 결과물이 나올까 상상하며 데모곡을 만들었다. 그 곡이 영화에서 어떻게 사용될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 영화 전체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있다면.

마을회관에서 벌어지는 글램핑장 사업 설명회 시퀀스를 좋아한다. 특히 도리 유토 배우가 일갈하는 대사들이 가져다주는 울림이 있다.

-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과의 작업은 당신에게 어떤 영감과 자극을 주나.

창작은 무엇이 만들어질지 불투명한 상황에서도 공을 들여 자신의 생각을 정성스레 구현해가는 과정이다. 감독님은 그 시간을 혼자만의 판단으로 밀어붙이지 않는다. 주변 동료들과 함께 창작의 과정을 끌고 나가는 균형감을 가진 분이다. 그래서 함께 작업하기 무척 편하다. 언제나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일해야 하는 예술가로서 감독님이 지닌 균형감이 희망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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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그린나래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