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피플 > 커버스타
[인터뷰] 후회 없이, 남김없이, <탈주> 이제훈
이유채 2024-07-02

북한 최전방 내무반에 밤이 찾아오면 오직 한 사람만이 눈을 뜨고 탈출 연습을 시작한다. 전역을 앞둔 중사 규남(이제훈)의 목표는 탈북이다. 이유는 심플하다. “내 앞길, 내가 정”하기 위해서다. 출신성분이 낮은 탓에 사회로 복귀해도 지위 상승은 요원하고 무엇보다 자유가 없다는 걸 견딜 수 없던 규남은 적어도 실패할 기회가 주어지는 남한에서 새 삶을 시작하려 한다. 그러나 보위부 장교 현상(구교환)이 그의 질주를 가로막고 규남은 난관에도 자기 꿈을 이루고자 더 빠르게 달린다.

그간 배우 이제훈은 온기를 전제한 캐릭터들을 연기해 왔다. <박열>의 독립운동가 박열이 폭발할 듯 뜨거웠다면 <시그널>의 박해영 경위, <모범택시> 시리즈의 김도기 기사, <수사반장 1958>의 박영한 형사는 비정한 한국 사회에서 차라리 과열돼버리기를 택했다. <내일 그대와>의 유소준과 <여우각시별>의 이수현은 로맨스물의 남자주인공으로서 사랑을 타고난 존재들이었다.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의 홍길동은 원수의 손녀들을, <아이 캔 스피크>의 박영재 공무원은 ‘구청의 민원 왕’을, <무브 투 헤븐: 나는 유품정리사입니다>의 조상구는 얼결에 후견하는 아이를 차마 떨치지 못하고 결국 그들 편에 선다. 이제훈의 캐릭터들이 따뜻한 기운을 풍기는 건 그가 도통 차갑게 식을 줄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힘이 영화에 있다는 걸 여전히 믿는 그는 작품과 역할을 통해 자신이 그리는 사회, 있어 주길 바라는 사람을 그린다. 그렇다면 <탈주>의 규남은 어떤가. 단 하나의 목표를 이루고자 사지(死地)를 달리는 청년은 데일 듯 뜨겁고 그런 인물을 맡은 배우는 “마지막 작품”이란 일념으로 자신을 모조리 소진하는 연기를 펼친다. 그러니까 <탈주>는 이제훈의 필모그래피에서 전심전력을 다한 영화로 자리할 것이다.

- <탈주>를 보자마자 <고지전>(2011)을 다시 봤다. <고지전>의 신일영 대위(이제훈)가 집에 가기 위해 달린다면 <탈주>의 중사 규남은 자기 신념을 위해 달린다.

=그랬다. <고지전>이 있었다. (웃음) 돌이켜보면 <고지전> 현장도 장난 아니었다. 실제 가파른 산 위에서 찍은 험난한 촬영도 많았고 몇날 며칠을 한 시퀀스만 준비해서 찍은 적도 있었다. 그런 만만치 않은 순간들이 좀더 많이, 촘촘하게 모인 작품이 <탈주>가 아닌가 싶다.

- 규남은 <모범택시>의 김도기 기사(이제훈)가 끄는 택시 뒷자리에 태워 과거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은 캐릭터다. 전사가 없는 주인공이 깔끔한 영화가 되는 데에 한몫했으나 캐릭터를 구축해야 하는 배우 입장에선 고충이 있었을 것 같다.

=오히려 직선적이고 명쾌하게 하나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캐릭터라 접근하기 어렵지 않았다. 처음부터 나는 규남이 쉽게 이해됐다. 자유에 대한 갈망은 인간의 근원적인 부분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누구나 한번쯤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나 더 나은 곳을 향해 가고 싶다는 마음을 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어느샌가 관객이 규남을 응원하며 이 영화를 보면 좋겠다 생각으로 시나리오를 읽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출연하겠다는 결심이 섰다. 이후 이종필 감독님이 그동안 규남이 어떻게 살아왔고 왜 탈출하길 바라는지가 담긴 장문의 페이퍼를 따로 주셔서 공감이 안될 수가 없었다. 심지어 촬영 전날 내일 찍을 신은 왜 필요하고 전후 신과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관한 장문의 문자를 보내주셔서 더더욱 그랬다.

- 규남이 탈주를 꿈꾸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며 연기했나.

=내 삶에 빗대어서 얘기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워낙 영화를 좋아하지만 연기 경험은 없었던, 20대 초반부터 배우를 하고 싶었다. 후회하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커 휴학하고 대학로를 기웃대다 독립영화를 찍고 25살 때 대학(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을 새로 입학했다. 들어갔다고 해서 보장되는 건 없었다. 아무리 계산해봐도 답이 안 나오는데도 나는 이 불확실한 직업을 선택해서 시도도 하고 실패도 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규남에게서 그렇게 살아온 내가 보였다. 규남은 삶의 주도권을 자기가 잡는 것을 최우선 가치에 두고 그 주도권을 쟁취하고자 고난이 예정된 목표점을 향해 기꺼이 달리는 인물이다. 나 역시 그렇기에 이런 사람의 진심이 온전히 전달되어야 한다는 책임 의식을 가지고 매 신 최선을 다했다.

120%의 진심

- 규남은 사전 준비를 요하는 캐릭터다. 북한 사투리를 익히는 게 우선이었을 것 같다.

=배우기 전까지만 해도 조금 수월하지 않을까 하는 예상을 했었다. 그동안 미디어를 통해 학습해온 세월이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현실은 달라서 언어 준비에 가장 많은 시간과 공을 들였다. 규남 전담 선생님이 함흥에서 태어나 황해도에서 군 생활을 하고 비무장지대(DMZ)를 통해 탈북한 20대 초반의 친구였다. 그런데 그의 말투가 내게 익숙한 북한말의 그것과 전혀 달랐다. 각 잡고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에 정신이 바짝 들었다. 선생님에게 규남의 대사를 녹음한 파일을 다양한 버전으로 받았다. 무척 빠르거나 느린 버전, 격하거나 차분한 버전 등 여러 가지였다. 나 역시 대사 한줄 한줄의 속도와 감정을 다 다르게 녹음해서 선생님께 피드백을 받았다. 현장에서 선생님이 고개를 갸웃하는 장면은 다시 갔고 후시녹음도 여느 때보다 더 디테일하게 갔다. 어설프게 들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정말 컸는데 시사회 때 선생님과 함께 목숨 걸고 탈북한 친구들이 잘했다는 코멘트를 주셔서 그 순간 정말 안도했다.

- 내내 뛰고 넘어지고 몸싸움에 카 체이싱까지 많은 액션 신을 소화하기 위한 체력 단련도 필수였겠다.

=솔직히 그동안 남들보다 체력과 지구력이 뛰어나다고 자부하며 살아왔고 매일같이 운동하는 만큼 이번에도 액션을 무리 없이 해낼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런데 나이를 간과한 거다. (웃음) 그렇지만 내 사정을 봐줄 만한 장면은 없었다. 맡은 역할이 죽기 아니면 살기로 질주하는 인물인데 어떻게 배우가 타협을 말하겠나. 그만큼 이번 작품에서는 스스로를 한계에 한계까지 밀어붙였다. 이를테면 누군가가 쫓아오고 총알이 빗발치는 상황에서 달리는 장면을 찍을 때 ‘지금보다 더 빠르게 뛰지 않으면 넌 죽을 수밖에 없어’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압박했다. 긴장감과 공포감에 사로잡혀 온몸에 소름이 돋은 채로 거의 모든 신을 소화했다.

- 해가 막 뜨기 시작할 때 규남이 홀로 비무장지대를 뛰어가는 장면을 보면서 배우는 외로운 직업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그런 감상에 빠질 만한 순간이 아니었던 거다.

=그 신 찍을 땐 정말… 숨이 막힐 정도였다. ‘규남이 안 잡혔으면 좋겠다’ 그런 응원의 마음으로 영화를 지켜볼 관객들을 상상하며 죽기 살기로 뛰었다. 질주 신들은 ‘내가 지금 전력을 다해 달렸는가?’라고 자문했을 때 확신이 없어 오케이가 났는데도 리테이크를 외쳤다. 짧은 탈주 기간에 규남이 음식 섭취를 제대로 했을 리 만무하고 계속 굶주린 상태일 테니 먹는 것도 엄격히 제한했다. 컷 사인 뒤 물 마시는 것조차 망설였다. 눈앞의 이 물을 마셔도 내가 규남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을 느끼는 지경까지 갔다. 모르겠다. 이런 식의 접근법이 맞았던 건지. 다만 그렇게 했을 때 큰 스크린 너머로 규남의 절박함과 처절함이 제대로 전달될 거라고 믿었을 뿐이다.

- 그렇게 매번 다 쏟아붓고 나면 다음이 힘들지 않았나.

=그걸 생각 안 했고, 그래서 일이 생기기도 했다. 한밤에 총을 잡고 풀숲을 내달리는 신을 계속 찍었는데 거의 막바지쯤 나침반을 든 컷에서는 무릎이 안 굽혀졌다. 그런데도 지금 아니면 다시 못 찍는다는 생각에 말 한마디하지 않고 달렸더니 티가 나더라. 다들 놀라고 완급 조절을 못한 자신에게 너무 화가 났다. 이후로 오랜 시간 계단을 내려가면 바깥쪽 무릎이 아프다. 배우 이제훈과 인간 이제훈 사이의 간극이 갈수록 없어지는 것 같다. ‘오늘 촬영 끝났으니 이제 쉬어야지’ 같은 상태가 잘 안된다. 계속 젖어 있다. 슬기롭게 일하는 나만의 방법을 어서 찾아야 할 텐데 자꾸만 미련해져 큰일이다.

- 빠른 편집를 강조한 영화라는 걸 인지한 상태로 촬영했나. 규남의 민첩한 움직임이 작품 전체의 속도를 파악한 배우의 판단에서 기인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 스토리보드를 통해 빠르게 갈 거라는 걸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만큼 촬영할 때 영화 전체의 빠른 리듬감을 염두에 두고 움직였다. 스피디한 속도와 전개는 요즘 관객이 원하는 포인트라는 판단하에 특히 신경 썼다. 후에 달파란 음악감독님의 과감하고 독특하게 피치를 올리는 사운드가 더해지면서 영화의 완성도가 더 높아졌다고 생각한다.

- 청룡영화상에서 이제훈 배우가 구교환 배우에게 러브 콜을 보낸 것이 <탈주> 투톱 캐스팅에 영향을 미친 건 잘 알려진 일화다. 실제 호흡은 어땠나. 개성 있는 리듬감을 가진 구교환 배우와 마주하면 기존과는 다른 리액션이 나올 것 같다.

=그랬다. 예상치 못한 독특한 액션이 상대 입장에선 신선한 충격이었다. 예컨대 규남이 차 안 룸미러를 통해 현상과 눈이 마주쳤다가 피하는 사소한 장면이 있었는데 테이크를 네다섯번 가는 동안 교환이 형의 표현이 다 달랐다. 규남의 놀람이 목적인 신의 의도에 맞게 내게 매번 새로운 자극을 준 것이었다. 덕분에 테이크마다 내 리액션이 바뀌었고 그런 게 너무 좋았다. 차에서 내린 현상이 비둘기가 나오는 것처럼 마술을 보여주는 컷은 형의 아이디어였다. 대본에는 ‘현상이 물티슈로 손을 닦고 차에 타서 핸드크림을 바른다’는 신이어서 현장에서 처음 보고 재밌었던 기억이 있다. 천진난만하고 자유롭게 창작하는 구교환이란 배우의 매력의 끝은 어디일까. 한 작품 같이하는 걸로 끝내기에는 아쉬운 동료다. (웃음)

이건 다 영화를 사랑해서 벌인 일

- 감독 겸 각본가, 콘텐츠 제작사(하드컷)와 매니지먼트(컴퍼니온) 대표이기도 하다. 롤의 확장이 연기에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보나.

=전체를 보는 인식이 커졌고 동시에 연기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됐다. 단편영화 <블루 해피니스>(이제훈 감독·각본)를 찍을 때 정말 힘들었다. 뭐하나 계획대로 흘러가지를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스태프들은 각자의 역할에서 최선을 다하면서도 함께 해결 방안을 찾아나갔다. ‘우리는 지금 돌아올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최선의 컷을 하나하나 완성해나가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퍼뜩 들면서 사람이, 시간이, 영화가 더없이 소중해졌다. 현장에 배우로 돌아갔을 때의 마음가짐도 ‘오늘 내 연기 잘해야지’에서 ‘후회 없는 한 장면을 만들어야지’로 바뀌었다. 전체에서 내가 어떤 변수에 따라 어떻게 쓰일지 모르니 전보다 더 다양하게 준비해가고 때로는 다른 파트에 의견을 내기도 한다. 그렇게 호흡을 맞춰나가다 보면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우리가 처음 의도했던 바로 그 신이 된다.

- 그렇게 전체를 위해 <탈주>에서 아이디어를 낸 장면이 있다면.

=보신 분들은 아실 텐데 규남의 손끝이 하얀 선에 닿을락 말락 하는 신은 내 아이디어가 많이 반영된 신이었다. 원래 대본상에는 바로 닿고 끝이었는데 나는 그 신이 좀더 절박하고 긴장감이 넘치길 바랐다. 늪에 빠지는 장면도 혼자 해내야 할 부분이 많았다. 실은 고요한 웅덩이였던 터라 무릎, 허벅지, 허리 그리고 얼굴까지 단계적으로 잠기는 공포를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 감독 이제훈의 차기작도 궁금하다. 감독으로서 관심 가는 소재가 배우일 때와는 다른가.

=그렇진 않다. 둘 다 방향은 비슷하다. 비주얼이 아닌 이야기에 집중한 시나리오를 쓰고 싶은데 쉽지 않다는 걸 집필하면서 체감하고 있다. 누군가 내게 좋은 글을 들고 와 연출 제안을 한다면 할 의지가 있지만 현재로서 그건 어디까지나 배우 다음의 일이다.

- 최근 영화에선 마동석 배우의 마석도 형사(<범죄도시>) 같은 피지컬형 히어로가, 드라마에선 이제훈 배우의 김도기 기사, 박영한 형사 같은 지략가형 히어로가 활동하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다. 사회 이슈에 늘 관심을 두고 현실에서 책임지는 역할이 늘었다는 점이 앞서 말한 것과 같은 작품을 선택하는 데 영향을 미친 게 아닌가 하고 짐작한다. <모범택시> 시리즈와 <수사반장 1958> 같은 정의로운 대리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작품의 출연을 결정할 당시 어떤 마음이었나.

=재밌는 관찰이다. 작품을 고를 때 ‘내가 맡은 인물을 통해서 보여주고 싶은 무엇인가’ 항상 질문한다. 그러다 보면 요즘 사람들의 애환, 가해자가 제대로 처벌받는 세상, 가슴 아픈 실화가 반복되지 않는 사회라고 답하게 되고 결국 그런 이야기를 하는 작품을 선택하게 된다. 켄 로치, 다르덴 형제의 작품처럼 배우의 근간이 되어준 작품들 때문인 것 같다. 그들의 영화가 내게 영화와 시대가 서로 얼마나 깊이 연관돼 있는지, 한 작품이 한 사람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지대한지를 가르쳐주었다. 세상과 영화에 관한 관심이 계속되는 한 앞으로도 그런 선택을 할 것 같은데 다만 악을 대표하거나 선악을 구분할 수 없는 캐릭터를 맡는 것으로 다른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고 메시지가 강한 작품만 하겠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단순한 즐거움과 행복을 말하는 작품에도 마음의 문은 활짝 열려 있다. (웃음)

- 그러고 보니 <내일 그대와> <여우각시별> 같은 로맨스 드라마를 찍던 시절도 있었다.

=맞다. 지금도 너무 원하는 장르다! 간절하게 하고 싶다!

- 개인 유튜브 채널 <제훈씨네>를 운영하고 있다. 원주의 ‘고씨네(Go-Cine)’를 시작으로 광주극장까지 다녀갔다. 이목을 쉽게 끌 수 있는 브이로그가 아닌 전국의 작은 극장을 알리는 콘텐츠를 기획한 이유는 무엇인가.

=집에서 스마트폰과 노트북으로 쉽게 영화를 볼 수 있는 세상이지만 여전히 나는 극장 영화가 주는 즐거움과 감동은 대체될 수 없다는 믿음이 굳건한 사람이다. <제훈씨네>를 시작한 건 누군가의 추억이 담긴 공간을 기록해두고 싶었고 궁극적으로는 소개의 목적이 있다. 독립영화극장 운영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제훈씨네>를 보다가 마음에 드는 극장이 생겼다면 직접 그곳을 찾아주셨으면 좋겠다. 관객이 늘어야 극장이 계속될 수 있다.

- 안판석 감독의 차기작 <협상의 기술>을 촬영 중이다. 문학적인 감독의 세계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된다.

=기업간 인수합병(M&A)을 다룬다. 최근 감독님이 만드신 러브 스토리와는 전혀 다른 결인데 감독님 특유의 연출 스타일은 그대로 녹아 있다. 든든한 감독님과 함께 세상을 포착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나가겠다.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