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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추천도서 - <메두사>
임수연 2024-08-20
제시 버튼 지음 이진 옮김 비채 펴냄

눈빛만으로 남자를 죽인 여자. 그리스신화 속 괴물 메두사는 그의 얼굴을 보기만 해도 사람들이 돌로 변하는 괴물로 묘사된다. 고르고네스 세 자매 중 유일하게 불사신이 아니다. 때문에 페르세우스에 의해 목이 잘려 죽는다. 메두사의 이미지는 많은 대중문화에서 차용되어왔고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메두사가 주는 공포를 남성의 거세 불안과 연결시켜 논의하기도 했다. 여기까지가 당신이 알고 있던 메두사다. 제시 버튼은 기존 신화에서 벗어나 메두사가 그의 언니들과 바위섬에 살던 시절부터 새롭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이미 아테나의 저주를 받고 흉측한 모습으로 변한 상태다. 어느 날 난생처음 보는 아름다운 남자, 페르세우스가 배를 타고 섬에 나타난다. 평생 사람들의 시선에 시달렸고 이젠 머리카락 대신 뱀을 갖고 있는 그는 차마 남자 앞에 나타날 수 없다. 메두사는 남자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지만 조심스럽게 교감을 시도하며 각자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런데 페르세우스의 사연을 들을수록, 그로 인해 잊고 싶었던 끔찍한 기억이 떠오를수록 메두사가 잠시나마 느낀 편안함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럼에도 그가 아테나로부터 삶이 송두리째 바뀌는 벌을 받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고백하기 시작한다.

영국의 작가 겸 배우 제시 버튼은 오인되거나 간과됐던 여성의 삶을 다시 쓰는 작업을 꾸준히 이어왔다. 제시 버튼의 첫 책 <미니어처리스트>는 영국에서만 100만부 이상 판매되며 2014년 영국 내셔널 북 어워드가 선정한 ‘올해의 책’에 올랐다. <뮤즈>는 ‘뮤즈’라는 이름 뒤에 대상화되던 여성 예술가의 이야기를 조명했고, <컨페션>은 누군가의 자식이나 연인이나 엄마가 아닌 오롯이 ‘나’로 서기 위해 분투하는 여성들을 담았다. <메두사>는 그리스신화 속 괴물 메두사를 주체로 소환해 현대적 시각에서 새로운 여성 캐릭터를 발견한다. 원래 메두사는 자신의 아름다움을 과시하다 아테나의 저주를 받은 여성 내지는 남성 영웅 페르세우스의 업적을 강조하는 도구로 서술되곤 했다. 제시 버튼은 괴물화된 여성의 복잡한 내면으로 들어가 메두사 신화를 여성의 아름다움과 대상화에 대한 슬픈 이야기로 재해석한다. 제우스와 포세이돈, 아테나 등 메두사와 페르세우스의 운명을 결정지은 그리스 신들 역시 메두사의 시점에서 새롭게 다뤄지는 대목이 흥미롭다. 평생 가장 강렬한 호감을 느낀 상대의 앞에 차마 정체를 드러낼 수 없는 심리 상태가 생생하게 묘사돼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과 다른 전복적인 결말 역시 납득 가능하게 전개된다. 일러스트레이터 올리비아 로메네크 길의 그림이 함께 수록돼 이야기의 신화적 분위기를 배가시켰다.

나는 누군가가 나를 보아주기를 원했다. 사랑을 원했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뱀들까지 전부 다,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줄 사람을 원했다. 그러길 원한다고 인정하는 게 나약한 마음이 아님을 스테노가 일깨워주었다.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어떤 여자도 외딴섬이 아니었다. 낯선 이들에게 외딴섬이 되길 강요당할 뿐. /16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