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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추천도서 - <이반지하의 공간 침투>
임수연 2024-08-20
이반지하 지음 창비 펴냄

현대예술가이자 퀴어적 존재로서 다양한 글쓰기를 해온 이반지하의 세 번째 단독 저서. 이번에는 ‘공간’에 대해 다룬다. 주제로 삼기엔 너무 광범위한 개념을 담은 단어일까? 책은 “완전히 열려 있어도, 한 귀퉁이만 닫혀 있어도, 어디로도 통하지 않는 길, 서로를 연결하는 길”도 공간이라고 말한다. 집, 직장, 사회복지 내지는 규범 모두가 포함될 수 있다. <이반지하의 공간 침투>는 미흡한 폐쇄성으로 정의되는 넓은 의미의 공간에 대해 느슨하게 연결된 에세이들을 모은 책이다.

작가는 고정된 공간에 속해서 정착하고 가꾸고 안주해본 적이 없다. 머물던 곳에서 도망치고 다른 장소로 이주하는 삶은 결혼이라든지 매끄럽게 설계된 독립과 무관하며 ‘작품’이라 부르는 짐더미를 이고 지고 사는 예술가인 그의 정체성과 무관하지 않다. 글쓰기의 괴로움을 토로하고 매일 먹는 도시락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친구에게 받은 에드바르 뭉크 인형의 위치를 고민하는 그의 글에는 일상 속에서 퀴어 예술가이기에 할 수 있는 생각들이 녹아 있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은 한국 사회가 규정하는 폐쇄적인 공간에 성소수자 작가가 침투하거나 밀려 나올 때, 때로는 서로를 이해해가는 사연을 담은 챕터들이다. 2023년 7월15일 울산 남목도서관에서 진행하기로 되어 있던 작가의 강연이 갑작스레 취소됐던 사건이 등장한다. 당시 일부 시민사회단체가 ‘퀴어’가 부적절한 소재라며 도서관에 민원을 넣었기 때문이다. 이같은 처사가 성소수자 차별임을 지적하며 집단 항의가 들어간 결과 강연은 재개됐다. 단, ‘퀴어, 젠더, 동성애’라는 키워드를 뺀다는 전제하에. 팬의 부탁으로 난생처음 헤테로 커플 결혼식에 참석한 이야기는 기묘한 감동이 서려 있다. “큰 현금 다발을 산 채로 태우는 동시에 수거하는 행사”이자 “입에 붙지 않는 각종 낯간지러운 멘트들이 난무하는” 곳이지만 “막상 식의 일부가 되어 이들을 구경하고 있으니, 짧게나마 나름 통속적인 감동”을 느꼈다는 대목은 일부 성소수자들이 결혼식을 중요시하는 이유를 이해하게 하고 궁극적으로 퀴어들에게 배제된 경험들을 고민케 한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 속 종이남자들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졌다가 남양주 돌비시네마에서 마주친 3D 남성 때문에 잊고 있던 현실이 침투했다는 사연 역시 흥미롭다. 2D가 완벽하고 안일한 온실처럼 여겨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지, 또 그곳에서 튕겨져 나올 수밖에 없던 생생한 경험담은 비남성이 주축이 된 문화 콘텐츠 산업을 분석하는 새로운 앵글을 더하게 해준다.

집게는 집을 나선 자였다. 등허리에 지고 있는 집 외에 다른 집이 세상이 있는지 알아볼 여유 같은 걸 부릴 겨를 없이 무작정 길을 나서버린 자였다. 속한 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 그 생각만으로 가득 찬 생물체였다. 속했던 곳을 완전히 빠져나오고 나서야 그 좁은 플라스틱 세상에 다른 소라 껍데기 같은 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집게는 온몸이 완전히 말라비틀어질 때 까지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맨몸으로 발악하듯 누비다 죽어버렸다.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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