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피플 > 커버스타
[인터뷰] 오직 나만이 이해할 수 있는, <한국이 싫어서> 배우 고아성
이유채 사진 백종헌 2024-08-20

4인 가족의 장녀이자 20대 직장인 계나(고아성)가 바라는 건 단 하나다. 춥지 않은 것. 그러나 겨우내 패딩을 입고 지내야 하는 냉골 집, 만날 때마다 주눅이 드는 애인(김우겸)의 중산층 가족, 의견 하나 받아들여지지 않는 회사는 줄곧 살을 에는 추위를 느끼게끔 한다. 이렇게 살다가는 결국 얼어서 부서질까봐 그는 홀로 뉴질랜드 이민행을 택하지만 한국을 떠난다고 해서 삶이 갑자기 순탄한 길로 들어설 리 없다. 낯선 땅에서 따뜻한 햇볕과 살랑이는 바람을 충분히 느끼면서도 채워지지 않는 결핍과 아득한 미래가 주는 불안감, 두고 온 가족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여전히 몸을 옹송그린다. 배우 고아성은 종착점을 지정하지 않고 과정에 표류하기를 자처한 영화에서 중심을 잡되 의도에 맞는 연기로 작품과 관객을 연결해냈다. 인터뷰로 만난 그는 계나처럼 양팔로 몸을 감싼 채 말하는 모습이 언뜻 추워 보였지만 대화가 깊어질수록 그가 지금 얼마나 열의에 차 있는 상태인지를 알 수 있었다.

- 영화계 대표 애서가로서 <한국이 싫어서>를 원작 소설로 먼저 접했을 것 같다.

=그렇진 않았다. 외출 중에 장강명 작가님의 <한국이 싫어서>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의 시나리오가 들어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때 마침 서점 근처라 곧장 서점에서 소설을 샀고 바로 읽었다. 한자리에서 한 호흡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라 하루 만에 다 끝냈다. 그리고 다음날 시나리오를 읽었다. ‘소설의 이 부분은 살았구나. 이 대목은 영화적으로 더해졌구나’ 하면서 조금 색다르게 접근했다. 기억에 남을 만한 재미있는 이틀이었다. 외적으로는 시나리오 표지에 적힌 ‘35고’가 준 임팩트가 컸다. 얼마나 인상적이었냐면 장건재 감독님과의 첫 미팅 때 “35번 수정하시면서 정말 힘드셨겠다”라는 말씀을 먼저 드렸을 정도다. 그러자 감독님이 “재밌었어요”라고 한마디 하셨는데 그 말씀을 하시는 모습이 믿음이 갔다. 그때 출연을 마음먹었던 것 같다.

- <한국이 싫어서>는 인물이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나아가는 영화가 아니다. 유보적인 주인공인 계나의 톤 앤드 매너를 잡는 게 어렵진 않았나.

=처음에 세운 기준 같은 게 있다면 한국을 탈출해야 한다는 계나의 주장을 관객에게 100% 납득시키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타지에서 다시 시작하는 게 더 힘들 거라는 주장과 팽팽하게 갈리면 더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애초 설득의 부담이 없었기 때문에 계나가 맞부딪히는 상황과 감정에 충실할 수 있었다. “계나는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이, 남녀노소 누가 봐도 지금의 자신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캐릭터여야 한다”라는 감독님의 말씀을 부표로 삼기도 했다.

- 그럼에도 뉴질랜드 이민이 계나가 말하듯 “외국 병에 걸려서가 아니”라는 걸 초반에 분명히 짚어준다. 계나가 한국을 뜰 결심을 토로하는 오프닝 시퀀스의 내레이션이 그러한 역할을 하는데 녹음 당시 어떤 감정을 담고자 했나.

=소설을 읽었을 때부터 핵심이라고 생각한 건 계나가 마냥 착한 여자주인공도 경쟁적인 한국 사회의 피해자 역할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래서 잡은 계나의 상(像)이 자신의 필요와 판단하에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한 여자였다. 그만큼 계나의 주체성이 잘 드러나도록 신경 쓰며 녹음했던 기억이 난다.

- 한국에서의 계나와 뉴질랜드의 계나의 외형적, 감정적 차이를 크게 두지 않은 건 어떠한 판단에서였나.

=계나가 서서히 변화해 나가는 게 또 다른 핵심이라고 봤다. 그럴 수 있도록 연출팀에서 세심히 신경 써주셨다. 한국에서의 시간-뉴질랜드 도착 한두달차-정착 3년 후 이런 식으로 시간의 흐름을 기간별로 정리해주셔서 거기에 맞춰 계나의 영혼과 육체를 잘게 쪼개서 준비했다.

- 후반부 롯데리아 신이 극 중 가장 독특한 계나의 장면이 아닐까 싶다. 여기서 계나는 어쩌면 유령인 동기 경윤(박승현)을 보고 처음엔 놀라는 듯하더니 이내 그 상황을 받아들인다. 그 순간 계나의 심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신을 풀어나가려 했는지 궁금하다.

=그 신은 시나리오를 읽을 때부터 가장 끌리고 찍고 싶었던 신이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너무너무 복잡한 무언가가 올라왔다. 그런 채로 현장에 갔는데 신기하게도 승현 배우와 호흡이 잘 맞았고 우리 사이에서 어떤 감정이 원활하게 오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그 순간을 믿고 느끼는 대로 움직였다. 영화를 오래 하면서 언어화할 순 없지만 인물의 감정을 정확하게 느낀 순간을 정말 많이 만났다. <항거: 유관순 이야기>의 8호실에서 나 혼자만 정면을 바라보는 신을 찍을 때도 그랬다. 그러한 알 수 없음, 복잡함을 관객 분들이 항상 풀어주셨다. 직접 만날 수 있는 자리에서 그분들의 해석을 경청하고 있다 보면 행복하고 영화하는 기쁨이 여기에 있다는 생각을 매번 한다.

- 등장인물이 돌아가며 행복을 정의한다. 성공, 춥지 않은 날씨. 미세먼지 없는 대기, 가족의 건강, 과대평가된 개념까지 실로 다양한데 고아성 배우의 행복론을 들려준다면.

=편집된 장면 중에 행복을 돈에 비유해 설명하는 장면이 있다. “행복에는 성취했다는 한때 기억에서 행복이 계속 흘러나오는 ‘자산성 행복’과 행복 자산에서 이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아 순간순간 행복을 창출해야 하는 ‘현금흐름성 행복’이 있다”는 소설 속 대목이다. 계나도 나도 후자가 맞는 사람이다. 나의 경우, 어느 날의 영광에서 느끼는 행복은 시간이 흐르면 희미해져서 매일 내가 보고 싶은 사람과 연락하고 읽고 싶은 책을 찾고 좋아하는 것들을 주변에 두어야 한다. 최근에는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는 동안 확실한 행복을 느꼈다.

- ‘연기가 싫어서’라고 느낀 적이 있나.

=싫다기보다는 힘든 순간이 매번 있다. 뜻대로 안돼서 속상한 때도 너무 많고. 그럼에도 여기서 탈출하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현실에 잘 맞춰 어떻게든 해내는 선택지만 있을 뿐이다.

- 1990년대에 태어난 30대 한국 여성, 집에선 막내딸이자 밖에선 20년차 직업인인 고아성 배우에게 지금 한국은 어떤 느낌으로 다가오나.

=너무 덥다. (웃음) 이렇게 더운 날과 겨울의 그 추운 날을 한해에 겪어내는 한국인들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새삼 든다. 심한 양극화는 비단 날씨만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극과 극 사이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 계나 그리고 이미례 인턴(<오피스>), 이자영 사원(<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서혜영 조사관(<트레이서>)이 한 회사에 다니는 재미있는 상상을 해봤다. 차기작 <파반느>의 미정 역시 직장인인데 미정은 고아성의 그동안의 직장인과 어떻게 다를까.

=백화점 직원 미정은 말하자면 미생물이다. 나중에 영화를 보면 미생물이라고 표현한 이유를 납득할 수 있을 거다. <파반느>를 찍는 동안 10kg 정도 찌웠다. 이종필 감독님의 요청은 아니었고 내가 그러고 싶었다. 그동안 스크린에서 숱하게 보인 모습과 카메라 앞에서의 마음가짐이 이번에는 좀 달랐으면 하는 욕심이 있었다.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