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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 부부의 섹스탐험기 <신혼일기>
2002-06-20

anivision

80년대 말 아직 일본 만화가 개방 전인 시절 <도시의 사냥꾼>이라는 이름으로 불법해적 출간이 된 만화책이 큰 인기를 끌었다. 비록 몇년이 지나지 않아 정식 출간본이 나오긴 했지만 한동안 유해만화의 대표작으로 꼽혔던 그 만화의 원제는 <시티 헌터>였다. 하지만 이 ‘유해성인만화’는 일본의 대표적인 소년만화 잡지인 <점프>에서 연재되었던 작품으로 일본의 초등학생은 봐도 되는 작품이 한국에서는 성인이 되어야 정식으로 볼 수 있는 조건이 부여된 것이다. 물론 문화적 상대성은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지만, 만화에서 유사성이 많은 한-일간에 만화를 바라보는 잣대는 상당히 상이한 부분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최근 일본 만화수입이 개방된 이후 최신 인기만화는 물론 10년도 넘은 과거 작품까지 무차별적으로 수입되고 있는 실정에서 무려 1200만부나 팔린 초인기만화 한종은 아직 국내에 특이하게 수입되지 못하고 있다. <신혼일기>라는 해적판으로 국내에 출판된 ‘카츠 아키’ 원작의 <둘이서 H>(‘H’는 일본어의 ‘변태’(hentai)라는 뜻의 말이지만, 최근에는 성(性)적 이미지나 행동을 칭하는 용어로 쓰이고 있다)라는 작품이다. 국내 검열도 요즘은 어지간한 폭력이나 누드에는 많이 관대해지긴 했지만 누드나 정사신이 자주 등장하는 이 작품에 대해서는 아직 정식출간이 멀어 보인다. <Young Animal>에 1997년부터 연재하기 시작한 <둘이서 H>는 현재 17권까지 단행본이 출간되어 있는데 이 작품의 꾸준한 인기 비결은 온갖 변태적인 성행위도 허용해주는 일본의 일반적인 성인포르노성 만화와는 다르게 변변한 연애 한번 못해본 25살의 평범한 샐러리맨 ‘오노다 마코토’군와 똑같은 입장인 ‘가와다 유라’양의 결혼을 벌어질 수 있는 각종 성적 고민들을 하나하나 풀어가면서 현대에서 ‘부부’라는 새로운 가족의 출발의 모습을 아주 자세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는 점이다.

웬만한 성교육책은 상대가 안 될 정도로 다양하고 세밀한 성지식을 알려주는 이 작품이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일본에서 7월 말 출시된다. 성인 취향이라는 한계 때문인지 인기도에 비해 단지 2편의 OAV로만 제작될 예정이어서 아쉽긴 하지만, 이 두 주인공 ‘초보 부부’의 섹스 모험담을 애니메이션으로 접할 수 있게 된 것은 최근 TV의 약진에 따라 질저하가 두드러지고 있는 일본 OAV계의 또 다른 활력소가 되어 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같은 작가의 또 다른 작품인 <사이킥 아카데미>는 얼마 전부터 TV에서 방영을 시작하였으나 깔끔하고 귀여운 원작의 이미지랑 많이 달라진 캐릭터 디자인으로 팬들의 원성을 사고 있지만 이 <둘이서 H>는 그럴 염려는 없어 보인다. 자금투입이 유리한 OAV라는 매체적 특성과 함께 감독 겸 그림콘티를 모리야마 유우지가 맡고 있기 때문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나 오시이 마모루처럼 국내에 많이 알려진 감독은 아니지만 <프로젝트A코> <청공소녀대> <정글로 가자> <지오브리더스> 등 수많은 작품에서 활약한 배테랑으로 특유의 귀여운 캐릭터 디자인과 3D의 현란한 기계적 액션과는 느낌이 다른 파격적이면서도 유연한 동선처리 능력은 일본은 물론 해외에서도 인정을 받고 있는 애니메이터이다.

이 작품이 국내 심의에 들어가면 자주 보게 될 누드나 정사신 때문에 ‘유해물’로 판정받기 쉬울 것이다. 성(性)을 단순하게 터부시하고 숨기려고 하기보다는 다양하고 정확한 상식을 알려줘 진정 ‘가족’이 중심이 되는 사회를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나무만 보고 숲을 못 보는 눈들이 많은 곳에서는 발전의 씨앗은 자라기 힘든 일이다. 김세준/ 만화·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 neoeva@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