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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경의 <사각사각>등 만화가 이야기
2002-06-20

그들의 펜이 불타오른다

어떤 소설가들은 자신을 1인칭으로 해 고백의 이야기를 전한다. 개인사 속에 각인된 사건들을 진실된 문장으로 드러내는 그 작품들 중에는 소설가라는 직업 자체에 대한 깊은 회의를 담고 있는 경우도 없지 않다. 영화감독들 중에도 자신이 겪어온 영화계를 무대로 한 작품들을 발표한 경우들이 있다. 로버트 알트먼의 <플레이어>처럼 그 대부분은 영화세계의 허상을 비꼬는 작품들이다. 만화가들 역시 자신의 분신인 만화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우거나, 아예 자기 스스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품들을 그려낸다. 그런데 이 고백의 만화는 고백의 영화, 문학, 드라마가 근접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을 자랑하고, 그 성격까지 전혀 다르다. 어쩌면 그것이 만화 문화의 본질일지도 모르겠다.

만화 잡지를 탐독하는 독자들이라면, 만화가 스스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만화들을 쉽게 보아왔을 것이다. ‘화실 일기’ 정도로 통칭할 수 있는 이 만화들은 처음에는 단순한 팬 서비스에서 출발해 이제는 만화 잡지에서 절대 빠뜨릴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코너가 되었다. 남성만화 잡지에도 이 코너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만화가와 독자의 관계가 훨씬 밀착되어 있는 여성만화 잡지에서 좀더 두드러진다. 이 ‘만화 뒤의 만화’, 혹은 ‘만화 곁의 만화’는 만화가, 어시스턴트, 담당 기자, 만화 독자, 그리고 만화 주인공들까지 혼연일체가 되어 웃고 떠들 수 있는 놀라운 세계를 펼쳐낸다.

만화 뒤의 만화, 화실 일기

권교정의 <교의 리얼토크>는 만화가의 본 작품 이상의 인기를 얻으며 독립된 단행본으로 출간되기까지 했다. 여기에서 만화가는 보통 고무줄로 머리를 질끈 묶은 꾀죄죄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권교정은 핸섬 가이 J씨와의 가상 인터뷰를 통해 “그 위쪽으로 올려 묶은 머리 말예요. 그거 어떻게 좀 안 되겠습니까?” “… 왜? … 보기 싫으신가요?”라고 자문자답하기도 하는데, 비단 이 만화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만화가들이 자신의 모습은 가급적 구질구질하게 그린다. 물론 항상 마감에 쫓기는 만화가들 실제의 모습에 가까울지도 모르겠지만, 진지하고 화려한 본 작품의 분위기에서 잠시 독자들을 탈출시키기 위해서는 만화가 스스로 느슨하게 몸을 낮출 필요도 있는 것이다.

고바야시 마코토의 <미스 헬로> 등 일본 만화에 등장하는 만화가들의 모습을 보면 마감이 끝나면 긴자의 고급 요정을 찾고, 연말에는 호텔에서 최고급의 축하 파티를 여는 다소 화려한 묘사들이 많다. 이러한 일본 만화가들의 처지와 ‘화실 일기’에서까지 귀여운 비굴함으로 ‘한권만 사주세요’라고 판촉 활동을 벌이는 우리 만화가들의 현실에는 확실히 차이가 존재하는 듯하다. 하지만 일본 만화 역시 ‘화실 일기’는 가급적 위화감을 조성하지 않으려고 한다. 수입이 많은지 적은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만화가들이 돈 쓸 시간없이 바쁘고 구질구질해 보인다는 점은 확실히 부각시킨다.

그래서인지 가상의 만화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만화에서도 만화가의 게으름과 무책임함이 단골 소재로 등장한다. 김나경의 <사각사각>에는 게으름뱅이 만화가 제리와 그를 들들 볶는 잡지사의 꽃다발 기자, 그리고 만화가의 뒤치다꺼리를 다해주는 어시스턴트 봉오리양이 등장해 웃음 소동을 펼친다. 어쨌든 만화 독자들은 약간씩은 만화가 지망생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그들은 쳐다보기도 어려운 천재 만화가보다는 이처럼 별로 재능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생존을 유지해가는 만화가의 모습으로부터 더 큰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게 아닐까? 물론 만화가의 생활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를 깨닫게도 해줄 것이다.

만화가는 모두 게으르고 실수투성이?

가끔은 실제 만화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보여주면서, 잠재적인 만화가 지망생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거나 만화 팬들의 지적인 호기심을 채워주기도 한다. <고스트 바둑왕>은 특이하게도 스토리 작가인 호타 유미가 이 코너를 맡고 있다. 그녀는 초등학생이 처음 만화를 그릴 때의 소박한 기법으로 바둑 문외한인 작가가 어떻게 자료를 수집해가고, 또 만화가와 내용을 조율해 가는지를 보여준다. 여대생이 꽃미남 농사꾼을 쫓아 시골생활에 적응해가는 과정을 그린 <그린>의 니노미야 도모코 역시 만화 작업 이전의 취재 여행을 상세하게 만화로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시골생활을 취재한다는 핑계로 남편과 함께 시작한 여행이 민속주, 민속 음식 체험기가 되어버렸다는 이야기는 본편 이상의 재미를 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처럼 게으르고 실수투성이인 만화가밖에 만날 수 없는 걸까? 아니다. 시마모토 가즈히코의 <울어라 펜>은 앞에 등장하는 나약한 만화가들을 한방에 날려버릴 만큼 강력하다. “언제 봐도 내가 그린 만화는 최고다!”라고 떠벌리는 만화가 호노 모유루의 프로덕션에서는 언제나 불꽃 튀기는 마감 전쟁이 벌어진다. 때로는 아이디어 고갈로 궁지에 몰리고, 때로는 표절 만화가의 도전에 부딪히고, 또 때로는 황당하게도 미녀 저격수의 표적이 되기도 하지만, 그때마다 불굴의 의지로 돌파해가는 만화가의 모습은 한없은 웃음과 함께 정말로 터무니없는 용기를 준다. “생각해보면 인생의 어느 순간에도 만화 따위는 그리고 있을 틈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린다!”이명석/ 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중 www.sugarspr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