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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닉 룸>으로 돌아온 데이비드 핀처의 영화세계, 그 고통의 희열(1)
2002-06-22

손가락을 자르니 피가 흐르네, 황홀하네

데이비드 핀처의 영화를 보는 일은, 고통의 시간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핀처의 영화는 육체와 영혼의 고통으로 가득하다. 그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상처받고, 빼앗기고, 좌절한다. 도망칠 곳도 없다. 도저한 운명의 굴레에서 누구도 벗어날 수 없음을 비극적으로 드러내는 <쎄븐>, 맞아서 이빨이 부러지고 선지피를 울컥 토해내는 성인들의 과격한 동화 <파이트 클럽>은 암울하고, 폭력적이다. 핀처는 관객에게 통상의 즐거움을 안겨줄 생각은 일체 하지 않는다. 당연하다. 그는 스스로, “나에겐 결코 당신이 상상하지 못할 악마가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 ‘악마성’으로, 현재 핀처는 전도 유망한 할리우드 감독이며 스튜디오 시스템에서 자라난 작가가 되었다. 찾아보기 아주 힘든, ‘야수’가 어디에선가 튀어나온 것이다. 야수의 매력을 찾아내는 가장 빠른 방법은, 야수의 룰에 동참하는 것이다. ‘고통 또한 희열’이라는 것에 동의한다면, 핀처의 영화는 극단적인 기쁨을 안겨준다. 핀처의 영화에는, 다른 즐거움도 있다. 어쩌면 그것 또한 고통이다. 시각적인 충격이 던져주는, 아찔한 아픔. ‘이미지의 시인’이라고 불리는 데이비드 핀처의 영화는 감각의 새로운 영역을 자극하고 확장한다. 관객의 기대를 충족시키고, 뒤섞어버리고, 이내 부숴버린다. 데이비드 핀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누구의 비난과 칭찬에도 구애받지 않는 천재적인 무정부주의자다.

광고와 뮤직비디오에서 잔뼈가 굵다

데이비드 핀처는 1962년 덴버에서 태어났다. 영화계로 뛰어든 것은 18살. 81년부터 83년까지는 조지 루카스의 특수효과 회사 ILM에서 일하며 <스타워즈 에피소드6: 제다이의 귀환>의 미니어처와 시각효과에도 참여했다. 한때 <스타워즈>의 다른 감독을 거명했을 때, 핀처의 이름이 오른 것은 그런 이유다. 84년에는 볼프강 페터슨의 <네버 엔딩 스토리>, 스티븐 스필버그의 <인디아나 존스> 등에서 매트 촬영 스탭으로도 일했다.

영화계의 특수효과 부서에서 주로 일하던 데이비드 핀처는 80년대 후반 광고와 뮤직비디오 업계로 들어간다. 후일 영화판에서 같이 일하게 된 <칼리포니아>와 <식스틴 세컨즈>를 만든 도미니크 세나, <죽음의 음모> <라이트 아웃> 등 B급영화를 주로 만든 나이젤 딕, 그렉 골드 등이 당시의 동료. 나이키, 코카 콜라, 버드와이저, 하이네켄, 펩시, 리바이스, 샤넬 등의 광고와 마돈나, 스팅, 롤링스톤스, 마이클 잭슨, 에어로스미스, 조지 마이클, 이기 팝, 월플라워스 등의 뮤직비디오를 찍었다. 뮤직비디오는 스토리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영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매체여서 지금도 만들고 있다. 최근작은 <퍼펙트 서클>.

광고와 뮤직비디오를 만들며 인정받은 데이비드 핀처는 92년 <에이리언3>의 감독에 발탁된다. 리들리 스콧에 이어 제임스 카메론이 2편을 찍으며 최고의 프랜차이즈로 떠오른 <에이리언> 시리즈의 감독으로 신인이 발탁된 것은 이례적이다. 뮤직비디오에서 보여준 영상감각이 탁월했고, 특히 마돈나의 <보그>와 <익스프레스 유어셀프> 등에서 여성의 신체를 ‘파워풀’하게 잡아낸 것이 이유였다. 여전사 리플리의 ‘전투’를 그려내는 최적의 감독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정작 만들어진 <에이리언3>는 좀 묘했다. 에일리언과의 전투를 마치고 수면에 들어갔던 리플리는 감옥행성 플로리나 161에 도착한다.

함께 도망친 동료들은 모두 숨졌다. 플로리나는 어둡고, 척박하고, 음울하다. 벌레 때문에 모두 머리를 밀어야 한다. 리플리도 마찬가지다. <에이리언3>는 지나치게 우울하고, 액션도 별로 없고, 리플리는 에일리언의 아이(원죄!)를 몸 속에 품고 자살하는 ‘최악의 엔딩’이다. 표범을 모델로 다시 디자인한 형상의 에일리언이 좁은 동굴을 쏜살같이 달려가는 장면은 뛰어나지만, 보는 마음은 한결같이 우울하다. 그 모든 ‘우울함’을 데이비드 핀처가 의도한 것이란 점에서, <에이리언3>는 의미를 갖는다. 핀처의 극단적으로 ‘절망적인 세계관’은 이미 <쎄븐> 이전에, <에이리언3>에서 시작된 것이다(<에이리언3>의 가편집을 본 폭스 관계자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30여분의 분량을 잘라냈다. 데이비드 핀처는 <에이리언3>의 ‘감독판’을 만들 생각은 아직 없다고 한다).

‘필름’과 ‘무비’ 사이를 넘나드는 장인

<에이리언3>로 불안한 출발을 했던 데이비드 핀처는 <쎄븐>(1995)으로 전인미답의 영토에 발을 들여놓는다. 언제나 비가 내리고, 형사들은 집안에 들어서면 전등이 아니라 플래시를 켜는 이상한 동네. 시간과 공간이 멈춰버린, 전진이나 변화가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지는, 눅눅한 도시. ‘네오 누아르’라고 불렀던 <쎄븐>의 영토는, 결코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지옥도’다. 시나리오 작가 케빈 앤드루 워커가 쓴 <쎄븐>은 지독하게 가라앉은 암울한 정서와 극단적인 엔딩 때문에, 메이저에서 제작하기는 힘든 영화였다. 하지만 <쎄븐>의 ‘힘’을 감지한 제작자 아놀드 코펠슨은 <쎄븐>의 제작을 결정했고, 과감하게 인기 스타인 브래드 피트를 영입했다. 단지 잘생긴 미국 남자였던 브래드 피트는 <쎄븐>과의 만남으로, 마침내 그림자를 얻었다.

7가지의 대죄를 저지른 사람을 찾아, 성경의 말씀대로 살인을 저지르는 남자. 그 죄악이란 게으름, 질투, 탐욕, 폭식처럼 우리 모두가 일상에서 저지르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쎄븐>의 희생자들이 되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데이비드 핀처는 관객이 고통받고, 그 고통의 의미를 느끼기를 간절하게 원한다. “영화가 꼭 사람을 즐겁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관객에게 과자를 던져주는 것에는 흥미가 없다.” 그는 관객이 불편하고, 영화를 보면서 피를 흘리기를 원한다. “나는 영화가 남겨주는 상흔에 더 관심이 있다. 내가 <죠스>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 영화를 보고 난 뒤 절대로 바다에서 수영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쎄븐>은 시종일관 관객을 괴롭힌다. 극단적인 내용만이 아니다. 데이비드 핀처는 자신만의 영상을 원한다. 새로운 테크닉을 과감하게 도입하여, 새로운 영상을 만들어낸다. 핀처의 영화에서는 카메라가 거의 신처럼 움직인다. <파이트 클럽>에서는 사람의 피부와 내장 속을 자유롭게 활보하고, <패닉 룸>에서는 벽과 기둥을 마구 넘나든다. 카메라가 열쇠구멍을 통과하기도 한다. 인간이 볼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핀처의 카메라에서 인간이란, 제한되고 나약한 존재다. 핀처의 카메라는, 그 자체로 자신의 철학을 증명한다. <쎄븐>은, 보는 것만으로 절망감이 몰려든다. 인간이란 결코 도망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내용이 아니라 영상을 보면서 직감한다. 기껏 도착한 오아시스가 인간의 시체들로 끔찍하게 더럽혀져 있는 광경을 목격한 듯한 기분이다. 데이비드 핀처는 <패닉 룸>에 대해 “어떤 초자연적인 힘이 사람을 공포로 몰고 가는 것이 아니라, 집안에서, 스스로 최악으로 끌어간다” 말했다. 그 말은, 그의 모든 영화에 적용된다. 우리를 공포로 몰아가는 것은, 바로 우리 자신 혹은 운명이다.

사진설명

<패닉 룸은 영화 대부분이 폐쇄된 실내에서 찍은 장면들로 채워져 있지만 마지막 순간 야외에서 평화를 되찾는다. 패닉 룸에 숨었던 자들이 밖으로 나오면 괴한들이 패닉 룸에 갇히는 아이러니한 상황도 벌어진다.니콜 키드먼에서 조디 포스터로 주연이 바뀌면서 영화의 톤도 달라졌다. 조디 포스터는 이혼한 뒤 불안해하는 여인이지만 딸을 지키기 위해 기지를 발휘한다.

그런데 <더 게임>(1997)은 조금 이상하다. 음모에 말려든 백만장자. 누구도 믿을 수 없고, 나 자신마저 믿을 수 없는 상황은, 단지 하나의 ‘게임’이었음으로 끝나버린다. 혹시 핀처의 암울함도, 단지 게임? 하지만 <더 게임>은 그냥 영화, 핀처식으로 말한다면 ‘무비’였을 뿐이다. 반면 1999년에 만든 <파이트 클럽>은 ‘필름’이다. “필름과 무비는 큰 차이가 있다. 무비는 관객을 위해서 만들고, 필름은 관객과 창작자 모두를 위해서 만든다. <더 게임>은 무비이고, <파이트 클럽>은 필름이다. <파이트 클럽>은 모든 부분을 합한 것 이상이 존재하지만, <패닉 룸>은 부분들의 합 그 자체다.” 데이비드 핀처는 무비와 필름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더 게임>은 그 제목처럼, 흥미로운 하나의 게임일 뿐이다.

핀처의 말처럼, 신작인 <패닉 룸>도 무비다. 하지만 무비를 만들 때에도, 핀처가 단지 관객의 기호에 맞게 영화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원칙이 있다. 처음 캐스팅했던 니콜 키드먼이 조디 포스터로 바뀌자, 핀처는 <패닉 룸>의 분위기 자체를 바꿨다. “만약 니콜 키드먼이 계속 찍었다면 그레이스 켈리를 기용한 히치콕의 작품처럼 되었을 것이다. 우아하면서도 정신병적인. 그러나 조디 포스터란 배우는 분명히 정치적으로 보인다. 오랜 세월 그녀가 쌓아온 이미지가 있다. 그녀는 누구의 애완동물도, 전시용 부인도 아니다.” <패닉 룸>은 강인한 여성의 치열한 전쟁터가 되었다. ‘가정이 붕괴하는 이야기이고, 원하는 것과 실제로 가질 수 있는 것의 차이가 얼마나 되는지에 대한 이야기’인 것은 변함없지만, 영화의 톤이 바뀐 것이다. 감독이 아니라, 배우가 바뀜에 따라서. 핀처는 상품의 질과 특성에 따라서, 자신의 역할을 분명하게 조정할 수 있는 ‘장인’이기도 하다.▶ <패닉 룸>으로 돌아온 데이비드 핀처의 영화세계, 그 고통의 희열(1)

▶ <패닉 룸>으로 돌아온 데이비드 핀처의 영화세계, 그 고통의 희열(2)

▶ <패닉 룸>의 촬영

▶ 데이비드 핀처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