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클라베>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벌거벗은 내 모습을 보여주었어. 그러자 남자들은 벌벌 떨었어.
내가 하느님의 창조물이라는 것을 알게 됐던 것이지.
-마누엘 푸이그, <천사의 음부> 중에서
그들은 내 성기에 깊은 경외감을 느꼈음에 틀림없다!
보통의 성기와는 달랐으니 더 강력할 수밖에 없겠지!
-키라 트리아, <파워, 오르가슴, 그리고 심리호르몬 연구실> 중에서
<콘클라베>는 이전에 교황 선거에 대해 다룬 영화(<두 교황> <우리에겐 교황이 있다> 등)가 교황 선거 자체를 주요 제재로 그리기보다는 몇몇 주요 등장인물의 심리를 그리기 위한 배경으로 다룬 것과 정반대의 접근법을 취한다. 영화는 세계 최대 종교 종파의 수장을 뽑는 비밀 행사를 엿보는 듯한 호사가적 즐거움을 정면으로 제공한다. 잘 알려졌다시피 일반 대중은 교황 선거 기간에 굳게 잠긴 문 너머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 수가 없다. 이때 카메라는 깨진 창문으로 들이치는 바람처럼 홀연히 문 안으로 들어가 고풍스러운 절차와 장소, 등장인물을 보여주며 관객을 유혹한다.동시에 영화는 오프닝부터 등장인물과 관객이 원하는 것을 순순히 주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기도 하다. 영화는 교황의 시체가 실려나가는 과정과 교황의 숙소가 봉인되는 과정을 교차편집으로 보여준다. 우리가 궁금해하는 저 닫힌 문 너머에 있던 것이 실은 아무런 신비로움도 없는, 덜컥거리며 환자운반차에 실리는 차갑게 식은 물체에 불과하다는 은밀한 암시다. 격무에 시달리다 사망한 노인의 시체는 차에 실려 사라졌고 방은 이미 텅 비었다. 멋들어진 리본과 밀랍으로 봉인된 문을 열고 들어가도 그곳엔 아무것도 없다. 혹은 추악한 진실로 가득한 보고서가 있거나.
타이틀롤이 뜬 직후 펼쳐지는 장면은 흡사 마피아물을 방불케 한다. 검은색 옷을 차려입은 남성들은 단체로 모여 담배를 나눠 피우고 편을 나누기 시작한다. 이처럼 제법 대담한 시작에 고조된 흥분은 영화가 진행되며 점차 사그라든다. <콘클라베>가 막상 정치 스릴러로서는 미심쩍은 전개를 보여주고 있어서다. 기본적으로 영화 속 선거는 보수파와 진보파의 대립 속에서 벌어진다. 진보파 후보 벨리니는 영화 초반부터 보수파 유력 후보 테데스코를 절대 당선되어서는 안되는 자로 단정짓는데, 영화가 테데스코에 대한 특별한 추가 정보를 주지 않기에 관객으로서는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없다. 물론 상당히 양심적으로 보이는 주인공조차 이러한 단정에 별다른 반론을 제기하지 않고, 테데스코가 반감이 드는 언행을 반복하는지라 일단은 믿을 수밖에 없는 처지이기도 하다.
영화는 뜻밖에도 이런 양강 구도를 넘어 제3지대 후보인 아프리카 출신 흑인 후보 아데예미가 득세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러나 아데예미의 혼외자 스캔들이 불거지고, 투표가 다시 양강 구도로 재편되면서 진보파는 보수파 후보 당선을 막기 위해 비리 의혹이 있는 트랑블레를 차악의 후보로 내세운다. 이제 사건은 반복되기 시작한다. 트랑블레 역시 주인공의 결단에 따라 비리 스캔들이 폭로되고, 얼떨결에 주인공만 진보파의 마지막 후보로 남는다. 일련의 과정은 주인공이 비밀을 알게 되고 고뇌한 후 결단하는 패턴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약간의 변주는 있지만 계속해서 같은 일이 반복되므로 후반부로 갈수록 긴장감이 옅어지는 느낌이다. 결과적으로 보수파 유력 후보는 가만히 있는 와중에 그 상대편에 있는 후보끼리 합종연횡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정작 악으로 규정된 보수파 후보는 이야기의 중심 줄기에서는 한 발짝 떨어져 있다.
문제는 이것이 보수를 절대 악으로 규정하는 이분법과 기성 정치에 대한 염증에 근거한 전개로 보인다는 점이다. 영화상 보수파를 대표하는 테데스코 추기경은 ‘폭탄 테러’와 관련해 ‘종교전쟁’을 설파하는 대목에서 노회한 추기경이라기보다는 너무나도 뻔하게 관객이 규탄할 만한 위험분자로 비친다. 같은 편조차 옷깃을 잡으며 말리는 ‘자폭 선언’을 할 정도로 테데스코는 바보였단 말인가? 왜 이런 바보를 막기 위해 영화 내내 그토록 치열한 정치 암투극을 벌여야 했는가? 그가 차기 교황으로 부적격인 이유를 대사 몇줄로 설명하려다 보니 영화는 모든 등장인물을 반장 선거에나 적합한 정치력을 가진 존재로 격하시킨다. 이슬람을 적으로 규정하고 절멸하려 드는 극우 포퓰리즘을 비판하면서도 정작 영화 스스로 보수를 하나의 정치적 선택지로 인정하지 않고 손쉽게 배제하려 드는 자가당착에 가까운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이는 마지막 남은 진보파 후보로 여겨진 주인공 대신 철저한 외부인에 가까운 베니테스 카불대교구장 추기경이 교황에 당선되는 반전으로 해소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썩은 정치와 무관한 비정치인, 권력욕이 없는 영웅’에 대한 열광이야말로 일종의 메시아적 정치지도자에 대한 대중의 욕망을 투영한 것으로, 현실에서 포퓰리스트 정치인을 탄생시킨 원인이기도 하다.
그런데 잠깐, 아직 반전은 끝나지 않았다. 곧 영화는 마지막 펀치를 날릴 준비를 하며 득의양양하게 결말로 향한다. 알고 보니 교황이 된 인물은… ‘간성’이었던 것이다! 이 반전의 순간 영화는 재구성된다. 영화의 마지막 숏이 안뜰에서 웃고 있는 세명의 수녀라는 점을 기억하자. 수녀와 관련된 서브텍스트(아데예미와 트랑블레를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두 수녀와 베니테스의 수녀에게 바치는 기도 등)가 메인 텍스트로 떠오르며 영화는 리버럴 가톨릭 판타지로서 온건하게 끝을 맺는 대신 관객이 판타지와 현실 사이의 간극을 의식하게 만든다. 세명의 수녀가 왼쪽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지고, 그들을 안뜰로 내보낸 문은 조용히 닫힌다. 이처럼 영화는 열리고 닫히는 문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삽입해 관객에게 계속해서 오프닝 장면을 상기시킨다. 진실로 중요한 것은 문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문밖에 있다. 아마도 이 사실을 추기경들은 깨진 창문 사이로 계시처럼 들이닥친 빛과 바람을 보며 깨달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 판타지 속에서 간성은 가톨릭 교황이 될 수 있지만, 현실에서 간성 영아는 여전히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의학적으로 무의미한 비동의 수술을 받고 있다. 베니테스의 자궁절제술을 둘러싼 고뇌는 이 이야기를 진보와 보수 구도를 넘어서 구도 자체에 대한 해킹 시도로 이끈다. 메시아적 열망이 투영된 존재가 실은 (가톨릭적 관점에서) ‘부적격 인사’였다는 반전 앞에서 관객은 어떻게 답할 것인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영화의 전개가 이 마지막 반전마저 값싼 반전처럼 보이게 만드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최후의 펀치가 ‘간성 의료 개입’이라는 시의적절한 부위를 타격한다는 점은 인정해야 마땅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