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ovie > 무비가이드 > 씨네21 리뷰
[리뷰] 낭만과 향수를 미묘하게 무너뜨리는 유희적 연출. 어쩌면 아름다운 악몽, <그랜드 투어>
김소미 2025-03-26

미겔 고메스의 신작 <그랜드 투어>는 시공간의 경계를 영화적으로 조작하는 감독의 오랜 관심사가 녹아든 유랑영화다. 서사는 두개의 축으로 나뉜다. 1918년 버마(현 미얀마)에서 시작되는 1막은 영국 행정관 에드워드(곤살로 와딩턴)의 도피극이다. 그는 약혼자 몰리(크리스티나 알파이아테)가 자신을 찾아오기 직전에 돌연 싱가포르행 기차에 몸을 싣고 방콕, 호찌민, 마닐라, 오사카를 거쳐 상하이와 충칭에 이르는 여정을 이어간다. 2막은 몰리의 이야기로 전환된다. 남자의 행적을 되짚어가는 여성은 웃음과 희망을 잃지 않으려 애쓰지만 같은 길 위에서도 두 사람은 결코 마주치지 못한다. 이국적인 모험담의 표면 아래엔 극복되지 않는 공허가 도사리고 있다. 20세기 초 서구인들이 소구한 아시아 여행을 뜻하는 ‘그랜드 투어’의 식민적 맥락, 그리고 서구적 상상력의 한계 역시 발설하는 지점이다.

무성영화 시기 로맨스를 표방하는 동시에 인물 대신 풍경으로서 발화하는 에세이영화이기도 한 <그랜드 투어>는 끊임없이 불가해한 틈새를 남겨두는 영화다. 픽션과 다큐, 흑백과 컬러, 스튜디오 촬영과 현장 촬영을 넘나드는 형식적 실험이 몽환적 보기를 요청하고, 화면과 내레이션 사이의 축적되는 긴장은 시간과 기억의 추상적 관계를 탐구하게 만든다. 중요한 것은 좁혀지지 않는 어떤 괴리다. 미겔 고메스 감독은 <타부>에서 사용한 16mm 필름 이미지와 현대 도시 풍경을 다큐멘터리처럼 병치해 과거와 현재의 간극, 관계의 거리, 역사로부터 탈주하려는 개인의 몸부림을 한편의 경이로운 꿈처럼 형상화한다.

관련영화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