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가 내린다. 가벼운 졸음이 눈꺼풀 위로 살짝 내린다. 포근하고 촉촉한 습기가 반가우면서도, 전국을 삼킨 산불을 진정시키기엔 턱없이 모자란 양이라 부슬부슬 내리는 빗방울이 못내 야속하다. 헌법재판소 판결은 여전히 나올 줄 모르고 어수선한 정국 따라 마음도 번잡스러워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고 핑계를 대어본다). 따뜻하고, 나른하고, 심란하고, 마음이 고된 3월의 마지막 주 목요일이 그렇게 지나가는 중이다. 맥 빠지는 상황에 잠시 넋을 놓은 듯. 적어도 겉보기엔 아무 일도 없는 듯. 일상이 흘러간다.
이른 아침 출근길. 10년 만에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친구는 불현듯 생각나 전화를 걸었다며 수줍게 말문을 열었다. 우리는 침묵에 쫓기는 사람처럼 다급하게, 그 시절 소소한 추억들을 꺼내며 낄낄거렸다. 신나고 재미난 일이 참 많았던 것 같은데,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대부분 기억이 흐릿했다. 어색하고 아쉬운 통화를 마친 뒤 잠시 혼자 걷다가 문득 그가 왜 갑자기 전화를 걸어왔는지 이해가 됐다. 생일이나 MT, 축제 같은 구체적인 일들은 거의 기억나지 않건만 언젠가 그 친구와 밤새 술을 마신 뒤 기숙사로 걸어갔던 새벽의 촉감이 또렷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뺨을 스쳐가는 착잡한 새벽 공기, 말 한마디 없이 한참을 걸으면서도 빈틈없이 꽉 찼던 시간이 거기에 있었다. 그땐 잠시 ‘이 순간이 이대로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비록 그 바람은 이뤄지진 않았지만 10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되살아난 감각을 마주하며 묘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이 감각이 또다시 기억 저편으로 가라앉기 전에 찬찬히 곱씹어본다. 소란스러운 이벤트가 너무 많아지고 당연해진 탓일까. 돌이켜보면 특별함을 기념하고 기록했던 순간들은 간직하려 애쓸수록 오히려 흐려지는 것 같다. 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넘겼던 평범한 날 뜻밖의 순간이 불쑥 바로 어제 일처럼 떠오를 때가 있다. 반가운 봄비로 연결된 그날의 새벽처럼.
몇주 전부터 초조한 마음으로 준비했던 <씨네21> 1500호를 마감하며 자연스레 옛 기억들을 강제로 대면하는 중이다. 30년 세월 중 그래도 절반 가까이 직접 책을 만들었는데, 막상 돌이켜보니 불꽃 튀듯 빛나는 순간이 잘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그게 지난 몇주 동안 나를 괴롭힌 불안의 정체였나보다. 독자로 읽었던 지난 책 중에는 빛나는 기사들이 너무 많은데, 직접 만든 700여권을 뒤지면서도 특별히 기억에 남는 기사나 글을 발견하지 못했다. 점점 초조해 졌다.
열등감으로 질척이던 불안이 봄비를 맞으며 오늘에야 씻겨 내려간다. 자랑할 만한 특별함을 찾으려니 보이지 않았던 거다. 특별한 순간 같은 건 없었다. 대신 평범해서 잘 기억되지 않을 모든 순간이 똑같은 빛깔로 반짝이고 있다. 돌이켜보면 매주가 이번주 같았다. 역량이 부족했을지언정 한순간도 진심으로 매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씨네21>에 발을 담근 모든 이들이 마찬가지였으리라. 그 한주 한주가 쌓여 어느덧 1500권이다. 30년 세월의 무게나 영광 같은 건 아직 잘 모르겠다. 너무 크고 멀어서 실감이 나지 않는다. 다만 한주의 정성과 한권의 무게만큼은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 그 감각을 믿고, 이번주도 몸이 기억하는 대로 또 한권을 만든다. 1499권에 한권을 보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