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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연의 TVIEW] 폭싹 속았수다
이자연 2025-03-28

“애순아, 엄마 죽거들랑 너 이 집 바로 나가. 작은아버지한테 가서 나 죽었소 해.” 남편과 사별한 뒤, 동네 최고 한량 염병철(오정세)과 재혼한 광례(염혜란)는 자신의 이른 죽음을 예감하며 딸 애순(아이유)에게 말한다. 광례는 조구도 안 주고, 가문의 장손과 차별하고, 높은 학업 성적을 눈치 주는 친가에 왜 애순을 보내려 한 것일까. 아마도 광례는 제한된 선택지 앞에서 오랫동안 고민했을 것이다. 염씨네 집에 식모살이를 보낼 것인가, 친가에서 이유 불문의 구박데기를 시킬 것인가. 그나마 학교 보낼 경제력만이라도 갖춘 곳. 애순이가 커서 문자 쓰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딱 기본적인 뒷받침을 해줄 수 있는 곳. 그게 광례의 선택이다. 임상춘 작가의 작품 속 엄마들은 ‘엄마 없는 딸’이 어떤 처지에 놓이는지 본능적으로 안다. <동백꽃 필 무렵>의 정숙이(이정은)가 동백이(공효진)에 대한 뜬소문을 퍼뜨리는 마을 주민들에게 으르렁거리며 가벼운 협박을 건넨 것도, <폭싹 속았수다>의 광례가 학교를 찾아가 기어코 “애순이도 엄마 있거든요”라고 말한 것도 엄마 없는 딸들이 얼마나 낮은 자리에 위치하게 되는지 그 운명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들이 딸에게 전하는 말은 시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연결된다. “쫄아붙지 마. 너는 푸지게 살아”라는 광례의 말이 “쫄지 좀 마. 그러니 만만하게 보지” 하는 정숙의 말로. 이것은 살아내느라 너무나 피로해져본 엄마들의 선언이자 방패막이고, 위로이자 포옹이다.

광례의 말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애순은 사뭇 다른 엄마가 된다. 인생이 자꾸만 발을 걸 때, 시원하게 넘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는 결코 땅끝에 묻히지 않는다. 도동리에서 오징어잡이 배 선장을 하는 상길(최대훈)은 지역 유지로 꼽힐 만큼 부유하지만, 자신과 결혼할 뻔했던 애순이 자꾸만 마음에 걸리는지 애순의 남편 관식(박보검)을 질리도록 괴롭힌다. 관식의 손이 부상당한 걸 보고도 상길이 배를 육지로 돌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 애순은 더이상 참지 않고 사자후를 날린다. 게다가 모욕적인 조롱을 던질 때에도 참지 않은 사람은 만삭의 애순이다. 으레 이런 장면에서 주먹을 날리는 건 남자주인공이지만 “쫄아붙지” 않고, “푸지게 살고” 싶었던 여자는 참지 말아야 할 때 참지 않는 어른이 되었다. 애순의 첫째딸 금명이도 그를 똑 닮았다. 경제력 차이로 결혼을 못마땅해하는 연인의 어머니에게 금명은 늘 충실하게 수저도 놓고, 반찬도 덜어주고, 미역국도 푸고, 김치도 칭찬하고, 숭늉도 떠주지만 적어도 쉽게 뒷걸음질친 적은 없다. 시청자에게 예비 시어머니와 금명의 관계를 처음 공개하는 4화에서 시어머니가 결혼 이후 일을 그만두라고 말하자 금명이는 무려 이렇게 말한다. “저는 허기진 애라 그냥 취직은 성에 안 차서요. 그냥 과장, 부장, 사장까지 다 해먹고 싶어요. 그게 부끄러운 마음은 아니잖아요.” 분명히 두려워하는 게 있지만 그것이 곧 제동의 이유가 될 수는 없고, 자신을 뒷받침해온 비빌 언덕의 눈물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광례-애순-금명으로 이어지는 삼대는 마음속에서 서로를 무기 삼는다. 이 무기는 그 어떤 모욕의 말이나 좌절의 순간을 거뜬히 거쳐온 긴 시간의 산물이라 영영 사라지지 않는 이들만의 자산이다. 부산 공순이가 될 뻔했던 애순의 팔자나 집에서 남편 뒷바라지만 할 뻔했던 금명의 운명이 현실이 되지 않은 건, 그것을 스스로 거부할 힘을 이 무기로부터 전이받았기 때문이다.

<폭싹 속았수다>는 엄마와 딸의 관계를 헌신이나 봉사로 함부로 전환하지 않는다. 사랑의 절댓값. 다른 단어로 이름 짓거나 그 의미를 바꾸기보다, 이렇게 ㅣ사랑ㅣ에 절댓값을 씌워 온전히 그것대로 바라보게 만든다. 이를테면 틱틱대는 딸에게 전전긍긍하는 엄마의 모습은 헌신이 아니라 걱정이고, 집안에서 왕이 되는 딸은 엄마의 봉사가 아닌 ‘너보다 우위한 게 세상에 없다’는 절대불변의 위로가 된다. 엄마 없는 딸은, 혹은 엄마를 고향에 두고 홀로 상경한 딸은 이토록 무의식적으로 먹고 자란 사랑을 연료로 씩씩하게 살아간다. 그 어떤 설움에도 쉽게 매몰되지 않는 지구력을 건네받는 것이다. 금명이가 계속해 연인을 만나는 과정을 두고 누군가는 무용한 로맨스의 비중이 크다고 말한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금명의 일본 유학 생활은 어땠는지, 그가 어떤 대기업에 다니는 건지, 계장이 된 엄마를 보고 자란 금명이는 어떤 자기만의 성과를 거두었는지 나도 궁금하다. 이 정보의 공백이 크면 클수록 아쉬움도 커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광례-애순-금명 삼대는 가족적인 지지대가 딸에게 어떤 힘을 주는지 증명해냈기 때문에, 작품에서 금명이는 이 관계를 이어받아야만 하는 운명을 지닌다. 금명의 연애가 주요하게 등장하지만 그렇다고 시리즈의 중심이 되지 않은 것은 이 이유에서다. 나는 여태껏 여자주인공의 ‘엄마 됨’을 진부한 결말로 여겨왔다. 자신의 길을 걷던 여성이 집 안으로 돌아가는 장면은 이미 현실에서 충분히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폭싹 속았수다>에서만큼은 조금 다르게 다가온다. 광례가 애틋하게 키운 애순이는 웃음과 눈물로 금명이를 키웠다. 혹여나 눈가에 그늘 지지 않게, 그렇게 사랑으로 키웠다. 이제 금명이는 어떤 엄마가 될까. 그는 다음 세대의 딸에게 어떤 사랑을 줄까. 금명이가 손에 쥔 견고한 무기는 그것을 건네준 사람을 배반하지 않는, 자신의 가치를 어떻게든 지켜내려는 늠름한 딸에게 이어질 것이다.

check point

이제 시리즈 바깥의 여성들을 생각해볼 차례. 애순과 같은 처지였으나 그들에게 관식이조차 없었던, 너무나 고달픈 전투를 홀로 이어온 모든 제주 여성들을 생각해보면 마음 끝이 울망울망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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