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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는 충분해, 상상력이 필요해
2001-03-27

컴퓨터 게임/ 하드고어 게임들

<블레이드 오브 다크니스>는 레이싱 게임이 전문인 영국 제작사 ‘코드마스터스’가 최근 출시한 판타지 배경의 액션게임이다. 레이싱은 그래픽과 운동 역학에 정통하지 않으면 만들 수 없는 장르다. 스피드에 따른 차들의 움직임과 충돌, 지면 상태에 따라 달라지는 표현 등 어느 하나만 빠져도 게임은 당장 어설퍼진다. 레이싱 장르에서 수위를 달리는 업체라는 건, 기술적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것이고, <블레이드 오브 다크니스>는 상당히 정교한 게임이다.

공격을 하면 상대의 몸이 토막나고 바닥에 피가 튄다. 실력이 발휘되는 건 여기다. 보통 게임은 타격을 입으면 정해진 곳에서 피가 터진다. 부위별로 충돌 체크를 하는 건 굉장히 까다로운 작업이고, 상처에 따른 핸디캡까지 관계되면 기술적 어려움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이다. 이 게임은 이런 어려움을 모두 해결하고 있다. 칼을 팔에 맞으면 팔이 잘리고, 다리에 맞으면 다리가 떨어져 나간다. <블레이드 오브 다크니스>는 대단히 ‘사실적’인 게임이다.

이 게임에서 ‘실감’은 ‘사실적’인 그래픽에서 얻어진다. 정확하게 때린 그 부분이 잘려나가고, 벽으로 몰아 목을 찌르면 벽에 피가 튄다. ‘죽음’은 ‘죽는다’는 상황을 통해, 혹은 문맥을 통해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목이 잘렸다’라는 비주얼을 통해 경험된다. 대신 상상이 힘을 발휘할 공간은 줄어든다. 정확하고 정교하게 표현될수록 그렇다.

게임에서 몰입감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리고 몰입을 하기 위해서는 게임이 현실을 대신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게임이 현실보다 ‘더’ 실감나야 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현실과 가까운 비주얼을 보여줄수록 게임이 더 현실적이 되는 건 아니다. 2등신 캐릭터들이 어설픈 그래픽을 배경으로 조잡하게 움직이는 게임이라도 상상력은 빈틈을 얼마든지 채울 수 있다. 그 속에서 슬픔, 공포, 외로움, 기쁨, 모든 걸 느낄 수 있다. 오히려 모든 걸 다 보여주려고 마음먹은 순간 상상은 설 자리를 잃는다. 아무리 정교한 그래픽이라도 완벽할 수는 없다. 아니, 완벽하더라도 무언가 모자란다.

상상을 기술로 대신할 수 있다는 건 오만이다. 그래픽이 좋아지는 걸 반대할 사람은 없다. 문제가 되는 건, 훌륭한 그래픽만으로 상상력을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다. 최근 쏟아지는 하드고어 게임들은 부족한 상상력 대신 넘치도록 많은 피를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가치판단이나 도덕성의 문제를 들고나올 필요는 없다. 피가 튀고 목이 뎅겅 날아가는 게임을 하는 게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 판단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거기에 검열의 정당성이나 표현의 자유에 대한 논란까지 얽히면 더욱 그렇다.

<부시도 블레이드>에서는 녹색 피가 튄다. <하우스 오브 더 데드> 역시 가정용으로 출시되면서 피가 노란색으로 바뀌었다. 덕분에 몇몇 열성 팬들은 피를 다시 붉은 색으로 바꾸어놓는 일명 ‘피패치’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피 색깔이 바뀐다고 폭력이 희석된다는 건 설득력이 없다. 이런 미봉책은 영화에서 등장인물의 주요 부위를 하트 모양으로 가려놓는 것만큼이나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더 많은 피, 더 많은 폭력이 쏟아질수록 게임이 더 현실적으로 된다는 생각은 더 우습다. 그리고 위험하다. 피는 대가를 요구한다. 정당한 핏값은 언젠가는 치러져야 한다. 폭력의 안이한 남발은 검열이 아닌 대중의 외면에 의해 설 자리를 잃을 것이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sugulman@chollian.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