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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스틱 단편 걸작선 - 웃음과 반전의 스타카토
2002-07-05

`홈쇼핑 중독`, 고이 잠드소서

부천의 단편들은 해마다 많은 관객과 조우한다. 올해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단편영화가 단순히 러닝타임이 짧은 영화인 것이 아니라, 극의 밀도가 높고 장르적 실험이 왕성한, 젊은 영화임을 관객이 먼저 알아보는 것이다. 한때 호러와 스릴러의 비중이 높던 부천의 단편들은 최근 들어 특정 장르에 편중되거나 한두 마디로 정리할 만한 경향을 보이진 않는다. 다만 다양한 장르 속에서의 기발한 세태 풍자, 극적 재미를 배가시키는 반전의 묘미 등이 두드러진다.

해외부문 - 새로워라 애니메이션

최근 단편에서 양적으로 질적으로 가장 빠른 팽창을 보이고 있는 것은 단연코 애니메이션이다. 도무지 시각화하기 힘들던 상상 속 이미지들에

날개를 달아줄 만큼 기술력이 발전한 덕이다. <나는 이상한 사람과 결혼했다>의 빌 플림턴이 내놓은 신작 먹이도

그중 하나다. 인간의 사지육신과 오장육부를 떡주무르듯 하는 과격한 상상력의 대가인 빌 플림턴의 <먹이>는 뜻밖에도 프랑스 고급 레스토랑에서

점잖게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곧 신체 변형과 토사물의 잔치로 둔갑하며 본색을 드러낸다. 사슬을

풀고는 한때 양몰이 챔피언이었던 수캐가 암양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으면서 자기 터전을 잃게 되는 기구한 운명을 그린

실사 합성 애니메이션. 슈퍼맨과 스파이더맨 등 인류를 구원하는 슈퍼 히어로의 자리에, 볼품없고 우쭐대기 좋아하는 ‘썬더 피그’를 앉힌 천둥

돼지도 기발한 풍자와 패러디가 돋보이는 코믹한 작품이다. 페르시아 카펫을 이용한 이란의 이국적인 애니메이션 샹골과

망골, 사후세계를 인상파 화풍으로 풀어낸 환상적인 작품 꿈꾸는 엘리펀트맨도

경탄을 불러일으킬 만한 수작이다.

실사영화 중에서 ‘발군’은 인터뷰와 재연드라마를 섞어 구성한, 가짜 전기영화 보이첵의 마지막

교향곡이다. 피터 잭슨의 페이크 다큐멘터리 <포가튼 실버>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픽션’임을 감추려 들지 않는다는

점에서, 길이 다르다. 소련의 프라하 침공 당시 덴마크로 이주한 보이첵은 작곡가의 꿈을 접지 못하고, 퀴즈쇼의 실로폰 연주자로, 포르노의

영화음악가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보이려 한다. 그러나 파렴치한 교수, 무데뽀 마피아, 속물적인 제작자 등이 끼어들면서, 그의 운명은

뜻하지 않게 뒤틀린다. 삶과 예술에 관한 통찰, 유머와 페이소스가 묻어나는, 영리하면서도 따뜻한 연출의 영화.

장르적으로는 호러의 코믹한 변주작들이 눈에 띈다. 지게차 운전수 클라우스는

안전규칙을 지키지 않은 새내기의 실수로, 선배와 동료들이 사지절단당하는 등 일터가 피바다가 되는 과정을 그린 스플래터영화. 산업현장의 안전교육

비디오를 천연덕스럽게 패러디하고 있다. 고딕호러 스타일의 고이 잠드소서역시

죽은 남편의 부활 이유가 무엇인지 밝혀지는 대목에서 폭소를 참기 힘들다. 좌회전은

비오는 밤의 토막 살인 사건, 그 아이로니컬한 운명을 그린 영화.

현대사회의 삭막한 풍경들을 포착한 풍자영화들도 탁월하다. SF호러 테스트는

폐차장에 간 남자가 안전사고 실험용 마네킹들의 습격을 당한다는 섬뜩한 이야기. 메트로넨시스는

기나긴 생산의 과정이 순식간에 소비되는 장미꽃 자동판매기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노동자와 소비자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이버

연인에게 줄 새로운 모듈을 찾아 동분서주하는 외로운 중년남자 이야기 플리카는

다마고치 열풍을 연상시킨다. 홈쇼핑에 중독된 여인이 어떻게 구원되는지를 보여주는 배달 왔습니다는

앞선 영화들이 제기한 문제들에 ‘해답’이 될 만한 영화.

이 밖에도 실사영화 위에 CG를 덧입혀 흑백판화 애니메이션의 효과를 낸 폭풍의 뱃노래,

촬영분을 거꾸로 돌리고 그것을 다시 역순으로 배치해 내러티브의 인과관계를 뒤집은 영화 팔린드롬등

형식적인 실험이 돋보이는 작품들도 있다.

한국부문 - 웃음을 원하는 그대에게

부천영화제의 판타스틱 단편걸작선(한국) 부문에는 실사영화 12편과 애니메이션 9편이 포함되어 있다. 웃음을 선사하는 코미디부터 실험성

짙은 작품에 이르기까지 폭도 제법 넓은 편이다. 복수의 엘레지(윤종석)는

취중 강도를 당해 칼에 찔리고 소지품을 빼앗긴 사내가 강도가 남기고 간 시계를 지니고 있다가, 일년 뒤 우연히 이 시계를 알아보는 남자를

만나게 되어 복수를 노린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 복수는 단지 칼에 찔려 쓰러져 있는 사내의 환상이었음이 밝혀진다. 코미디 감각이 발휘된

추격장면이 일품이다. 이와 비슷하게 생사의 경계에 놓인 자의 환상을 다룬 작품으로 흥미를 끄는 것은 Prognosis(우원석)가

있다. 밤중에 잠이 깬 재스퍼는 그의 사망증명서를 들고 온 집주인의 방문을 받는데 이때부터 그는 이미 자신을 죽은 이로 간주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혼란에 빠진다. 보르헤스적 환상이 미궁과도 같은 공간 속에서 펼쳐지는 영화다. 실험적인 영화들로는, 가장 인상적인 비주얼을 보여주는

手花(오현주), 3개의 에피소드를 묶은 인톨러런스(송미나),

이유없이 눈물을 흘리는 병을 앓고 있는 두 남녀의 조우를 다룬 <눈물>(부지영), 그림 그리는 한 여자의 고독하고 자폐적인 삶을 대사가

절제된 영상으로 묘사한 몰락취미를 꿈꾸다(유하) 등이 포함되어 있다.

웃음을 원하는 이들에게는 일단 나무아미타불 Christmas(박관호)를

권할 만하다. 좋아하는 여자친구로부터 크리스마스날 교회에 놀러오라는 초대를 받은 동자승은 고민에 빠진다. 대단히 새로울 것은 없는 영화지만

귀여운 동자승을 매개로 이질적인 종교 사이를 넘나들면서 훈훈한 미소를 이끌어내는 작품이다. 특히 국악기로 연주된 캐럴송이 영화의 주제를

적절히 뒷받침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사뭇 진지한 내레이션을 이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와 병치시킴으로써 폭소를 유발하는

Too Happy to Die(최진영), 아규라 불리던 한 권위적인 고교선생이 사고로 정신을 잃었다 6년 만에 깨어나

추락한 교권을 확립하려 하지만 실패하고 만다는 내용의 우유팩 살인사건 阿Q正傳(김방현,

김영민)도 있다. 한편 수사반장 트위스트 김(김태윤)에는 트위스트 김이 직접

출연해 춤 솜씨를 보여주기도 한다.

애니메이션 부문 작품들 가운데는 주목해 볼 만한 것들이 많다. 컴퓨터에 딸린 마우스 안에 진짜 쥐가 들어앉아 조종간을 움직이고 있다는

기발한 상상력을 완성도 높은 비주얼에 담아낸 클레이애니메이션 Mouse without tail(박원철)은

웃음을 선사하는 한편 직장인의 애환을 제법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 있다. 손가락을 코에 넣고 입에 넣기를 반복하는 한 할아버지를 바라보던

사내의 기이한 환상에 관한 보통사람들(박생기), 마지막 남은 식물을 살려내기

위해 스스로의 희생조차 마다않는 로봇의 이야기인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Recycling(박재오),

두드러진 색채감각으로 이국적이고 환상적인 동화공간을 잘 묘사한 <연분>(이애림), 극히 짧은 시간 동안에 오늘날 영상미디어가 쏟아내는 이미지들의

괴물스러운 모습을 고발하고 있는 3-D 디지털애니메이션 <잠식>(주성호) 등도 하나 같이 매력적인 작품이다.

박은영·유운성/ 영화평론가

■ 부천 초이스 단편부문 (경쟁)

오 마이 갓, 절로 웃음이 난다아!

푸치니의 <나비부인>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만들어진 애니메이션 <아리아>(피요트르

사페긴)는 여자의 머리에 내려앉는 한 마리 나비를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곧 인형들의 격렬한(?) 정사가 이어지고

남자는 임신한 여자를 남겨둔 채 항해를 떠난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엽기적인 감각은 갈수록 심해져, 탯줄에 매달린 아이가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가 하면, 버림받은 여자는 (말 그대로!) 얼굴을 쥐어뜯고 다리를 절단하고 마침내 산산이 부서져 바람에 실려

날아간다.

인간세상의 변화과정을 바위들의 시선으로 바라본 애니메이션 <시간의 바퀴>(크리스 스태너, 아비드 위벨, 헤이디

비틀링거)는 인간의 역사 내지는 문명의 역사라는 사뭇 무거운 주제를 재미나게 풀어내고 있는 작품이다. 산중턱에 앉아 무심히

저 너머 인간들의 세상을 관찰하는 두 바위한테는 그야말로 인간들의 시간은 일촌광음에 불과한 것. 마을이 세워지고 길이 닦이는가

했더니 어느새 아스팔트가 깔리고 거대한 빌딩들이 하늘을 가릴 만치 솟아오른다. 그리고 모든 것은 삽시간에 사라지고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는 것은 바위들이다.

애니메이션과 실사영화가 섞여 있는 <고양이의 손>(로버트 모건)에는 인간의 몸을 빼앗아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기괴한 고양이가 등장한다. 매우 짧은 단편이지만 같이 상영되는 작품들 중 유일하게 <하울링>이나 <늑대의 혈족>을 떠올리게

하는 호러 감각이 발휘된 작품.

그리스 단편 <날 기억해?>(알렉시스 알렉시우)는 함께 상영되는 작품들 가운데 가장 사색적인 내레이션과 비주얼을

보여준다. 슈퍼 8mm로 촬영된 영상과 35mm로 촬영된 영상이 함께 공존하는 가운데, 영화는 자유로이 시제를 넘나들며 기억의

의미에 대한 명상에 잠긴다. 주인공 미칼리스는 10살이 되던 해 한통의 전화를 받는다. 거기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날 기억해?”

11살 생일에 앞으로 그 누구와도 사랑에 빠지지 않겠다고 다짐한 미칼리스, 이후 그가 여자들과 만나 사랑에 빠지려는 찰나가

되면 어김없이 “날 기억해?”라고 쓰인 발신인 불명의 쪽지가 그에게 도착한다. 후반부에 가면 감독은 어떻게 과거가 현재에

개입하면서 삶을 결정하게 되는가를 반전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다소 짐작 가능한 것이기는 하지만 반전의 묘미가 있는 또 다른 단편으로는 <오 마이 갓?!>(크리스토프 반 롬페이)이

있다.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난 여자는 자신이 차 트렁크에 갇혀 어디론가 실려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오늘은 그녀의 생일.

기억을 더듬어보니 그녀는 가게에 식료품을 사러 갔다가 얼굴을 알 수 없는 괴한에게 납치되었던 것. 과연 그는 그녀를 어디로

데려가는 걸까? 짧은 무언극의 형식으로 된 <플랫폼>(로빈 월터스) 또한 어처구니없을 만큼 우스운 결말이 준비되어

있다.

재기발랄한 유머를 보여주는 스페인영화 <양상추 여자와 송어 남자>(구스타보 살메론)도 놓치지 말 것. 제목 그대로

양상추 여자와 송어 남자의 애틋한 사랑을 다루고 있다. 성인 남녀 배우들이 양상추, 게, 송어 등의 분장을 하고 연기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절로 입가에 웃음을 머금지 않을 수 없다. 잘게 갈린 양상추가 남자의 입 속에 들어가 똥이 되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내시경을 이용한 촬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 압권이다.

한 남자가 자신이 구상한 영화에 대한 수다를 정신없이 늘어놓는 <불후의 명작>(내시 애드게톤), 그리고 지난해

만들어져 호평받은 한국 단편 <8849m>(고영민)도 함께 상영된다.

유운성/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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