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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국제 영화&TV견본시, 홍콩 필름마트를 가다(2)
2002-07-12

`메이드 인 아시아`의 도약 꿈꾸는 영화장터

합작 혹은 메인랜드 진출의 교두보

웃통을 벗고 주판알을 튕기는 걸쭉한 상인들이 아니라 깔끔한 슈트에 마음속에 계산기를 품은 냉정한 바이어들이 분주히 오고가는 이 시장은 ‘영화’라는 상품을 ‘신뢰’라는 포장으로 파는 곳이다. 이 시장 저 시장을 메뚜기처럼 뛰어다니는 ‘보따리장수’나 일단 팔고보자는 식의 ‘야바위꾼’은 살아남기 힘든 곳이다. 또한 이 시장의 주소는 ‘홍콩’이지만 그 상품이 ‘메이드 인 홍콩’이냐, 아니냐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지난 20년간 하강곡선만을 그려온 홍콩의 영화시장은 쓸 만한 인재들은 죄다 해외로 떠나보내고 텅 빈 상태다. “값싼 오락성 영화나 붕어빵찍듯이 생산해내는 상태에서 이런 식의 전시성 행사에 돈을 쓰는 건 국내 영화발전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불만을 품고 있는 홍콩 사람들도 있다.

◀ 홍콩을 비롯, 중국 동남아시아 바이어들은 한국드라마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 "특히 아름다운 배우, 뛰어난 영상"이 가장 큰 경쟁력이라고.

물론 필름마트에 참가한 홍콩영화인들 역시 홍콩영화 자체부활에 대한 장밋빛 미래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영화를 파는 전시업체보다는 바이어들의 숫자가 월등이 많은 홍콩참여자들의 비례불균형에서도 나타난다. “홍콩 내에서는 더이상 희망을 발견할 수가 없다. 그래서 합작을 꿈꾸고 메인랜드(중국)로의 진출을 꿈꾸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이런 마켓이 필요한 이유다”라고 3개국 합작영화 <쓰리>의 막바지 작업이 한창인 진가신 감독은 말한다. 실제로 필름마트가 열리는 기간에는 합작이나 해외자본 유치 등의 이유로 한국의 몇몇 영화사 대표들도 홍콩을 찾았고 영진위는 ‘아시아 영화네트워크 구축사업’을 위해 필름마트에 참여해 아시아의 다른 국가들과의 합작시 유통과 관세 및 지원시스템 등에 대한 케이스를 찾는 데이터베이스 작업을 진행하기도 했다.

물론 마켓의 입구에 전시해놓은 이소룡의 밀랍인형이나 대형화면을 통해 틀어대는 <해피투게더>, 천장을 대형스크린 삼아 머리 위로 수놓는 홍콩영화의 빛나는 장면들은 여전히 서극이나 오우삼, 왕가위가 만들어놓은 홍콩영화의 부흥기를 그리워하는 이들의 마음을 비춰보이고 있다. 하지만 홍콩은 영화라는 도박판에서 일확천금을 만져보겠다는 야심보다는 안전하고 확실하게 떨어질 ‘하우스비’에 더 관심이 많은 듯하다. 누구든 팔고 사세요, 택스(tax)는 프리(free)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당신들의 일에 소외시키진 말아주세요. 홍콩은 나라가 아니다. 도시다. 그것이 홍콩의 한계이자, 휘어질듯한 유연성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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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마트에서 만난 사람들

한국영화 해외 세일즈, 이들에게 물어봐

“보험도 얼마나 많이 들어놨는지 몰라요.” 한국영화를 들고 해외에서 뛰는 해외 마케팅

담당자들. 크게 상반기에 열리는 베를린영화제와 AFM을 시작으로 칸영화제, MIFED, 홍콩필름마트, 베니스영화제까지 일년의

2/3는 해외를 돌아다니다보니 이들의 목숨은 비행기가 쥐고 있는 셈이다. 본격적인 해외 세일즈의 시작을 <쉬리> 이후로 본다면

3, 4년 남짓한 기간에 비해 한국의 해외 세일즈, 마케팅 분야는 꽤나 대견한 성장을 이루었고 이들은 그 성장의 숨은 공로자들이다.

시네클릭아시아의 서영주씨는 1998년 일산창투에서 영화 해외업무를

담당하다가 3년 전인 2000년에 처음 회사를 차리고 해외업무를 시작했다. <번지점프를 하다> <조폭 마누라>, 최근 <챔피언>까지

크고 작은 영화들을 해외에 팔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2000년 칸 마켓에 들고나간 <박하사탕>. 워낙 좋은 작품인데다가

현지반응이 좋아 당시만 해도 무명이었던 회사가 다양한 바이어들을 만날 수 있게 해준 고마운 영화였기 때문이다.

시네마서비스 이용신씨는 뉴욕주립대 MBA에서 아트매니지먼트를 공부했고

마지막 한 학기를 미국 굿머신인터내셔널에서 인턴생활을 했다. 귀국 뒤 2000년부터 시네마서비스에서 일해온 그는 <시월애>를

들고 대만이라는 녹록지 않은 마켓에 뛰어들었던 일과 결국 그 영화의 리메이크판권을 워너브러더스에 50만달러에 성사시킨 순간을

잊지 못한다.

미로비젼의 남경희씨는 충무로 조명감독 남진아씨의 친동생. 국문학도였던

그가 영화판으로 떨어진 데는 언니의 영향이 없지 않았다. <텔미썸딩> <반칙왕>을 통해 해외업무의 ABC를 배웠던 그는 이번엔

중국영화 <크라이우먼>과 박진표 감독의 <죽어도 좋아>를 들고 홍콩으로 날아왔다.

강제규필름의 황병일씨는 우연한 기회로 이 일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시드니의 UTS에서 영화연출을 전공한 그는 강제규 감독의 조감독으로 강제규필름에 입사했다가 마침 해외담당자 자리가 비는 바람에

엉겁결에 일을 하게 된 케이스. 이제 겨우 1년을 넘긴 초보 세일즈맨이지만 <쉬리>부터 <오버 더 레인보우>까지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영화가 없을 정도다. 특히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전에 <블루>를 일본의 포니캐년에 20% 투자와 함께 프리세일

70만달러까지 총 20억원 넘는 딜을 성사시킨 것이 가장 뿌듯한 기억이다.

해외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폴 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픽처스 대표인 폴 이는 버클리대를 졸업하고 1, 2회 부산국제영화제 어드바이저로 일했고 3회 때부터 제1회

부산프로모션플랜(PPP)을 만든 장본인이다. 영진위 해외진흥부를 잠시 거쳐 지난해 명필름과 손잡고 본격적인 해외 세일즈 회사인

이픽처스를 설립했다. “한국 시장이 전세계 시장의 2%라는데 국내 시장에서 번 돈 이상을 외국에서 못 벌라는 이유가 없다”는

게 그의 믿음. 하지만 “모든 해외 마케팅의 발전은 내부에서 질높은 영화들을 만들어줄 때 가능한 것”이라며 좋은 영화만 있다면

기꺼이 목숨을 내놓고 비행기에 오를 거라고.

서영주

이용신

남경희

황병일

폴 이